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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성의병, 남하하여 전라도로 돌아오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34회 장성의병, 남하하여 전라도로 돌아오다.
1592년 12월 23일에 오산에서 장성의병은 수원산성에 있는 조선 군사들과도 통신을 주고받았다. 수원산성에서는 장성의병의 도착을 알고 격려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장순, 허원의 책임이 제군자(諸君子)에게 있지 않느냐.”고 하였다.
12월 26일 장성의병은 유천(柳川)에 진군하였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중지하고 점사(占舍)에서 잤다. 유천과 점사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경기도 수원 근처 어느 곳일 것이다.
12월 27일에 장성의병은 안성 경계에 주둔하면서 왜적의 남하를 막았다. 이 시기에 장성의병은 오산, 수원, 안성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28일부터 1593년 1월 9일까지의 장성의병의 활동은 알 수가 없다. <남문일기> 기록이 없다.
1593년 1월 10일에 장성의병은 용인까지 진군하였다. 그런데 이 날 의병장 김제민은 남하를 결정한다. 먼저 1월 10일 <남문일기>부터 읽어보자.
1593년 1월 10일 소서행장 등이 이여송 제독에게 패하여 도망간다는 정보를 듣고 중도에서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용인에 진군하여 적도들이 내려오는 길목에서 잠복하였는데 이여송이 도리어 행장에게 졌다는 소식을 들은 김제민 등이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우리나라 액운이 어찌 이다지도 극에 이르렀는가.”라 하였다.
이때 송응창 경략이 화의를 주장하게 되자 김제민 등이 말하기를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도 지쳤는데 여기 머물러 있으면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하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1월 10일의 일기에는 세 가지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 장성의병은 왜장 소서행장 등이 명나라 이여송 제독에게 패하여 도망간다는 정보를 듣고 중도에서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용인에 진군하여 왜적들이 내려오는 길목에서 잠복하였다.
1592년 12월 25일에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4만 3천명의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평양성에는 왜군이 1만 5천명 주둔하고 있었는데 명군은 왜군보다 3배나 많았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곧장 평양성을 공격했다. 조선군은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병력 8천명이었다. 이들은 1593년 1월 6일부터 1월 8일까지 3일간 평양성을 공격하여 평양성을 되찾았다. 조명연합군은 왜군 1,285명을 참획하고 군기 45,000건을 노획하였으며 조선인 포로 1,015명을 구출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왜장 소서행장은 퇴각하는 길을 막지는 말라달라고 애걸하면서 평양성을 빠져 나갔다. 평양 패전으로 왜군은 수세에 몰려 서울로 철수하였다. 소서행장은 개성을 거쳐 서울로 철수하고, 황해도 지역에 있던 흑전장정 역시 서울로 후퇴하였다. 이여송은 개성까지 쉽게 장악하여 서울 탈환만 앞두고 있었다. 이런 쾌보를 입수한 장성의병은 용인에 진군하여 매복하면서 왜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월 10일 <남문일기>의 두 번째 내용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패배이다. 용인에서 잠복하고 있던 장성의병은 이여송이 도리어 행장에게 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김제민 등은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우리나라 액운이 어찌 이다지도 극에 이르렀는가.”라 하였다.
승승장구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너무 성급하였다. 당장에 서울을 수복할 것 같았다. 이여송은 1월 25일에 부총병 사대수로 하여금 조선의 장수 고언백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정탐하였다.
조명연합군은 벽제역 남쪽 여석령에서 왜군을 만나 적병 1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소식을 듣자 1월 27일에 이여송은 대군(大軍)을 뒤에 두고 휘하의 기병 1천 명만 거느리고 벽제(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때 왜장 고바야카와가 지휘하는 1만 명의 왜군이 여석령 뒤에 매복하고 있었다.
당시에 명군은 모두 기병으로서 화약무기도 없고 더구나 험로에 진흙이 잔뜩 쌓여 말도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왜군은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대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서 감히 왜군의 날카로운 기세를 대적할 수가 없었다.
왜군을 가볍게 본 이여송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도 낙마하여 부상을 입고 파주로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이여송은 개성에서 몸을 사리고 서울을 탈환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1월 27일의 전투를 벽제관(碧蹄館) 전투라고 한다. 벽제관은 중국 사신이 한성에 들어오기 전 잠시 머물던 곳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사무소 부근에 있다.
1월 10일 <남문일기>의 마지막 부분은 장성의병의 남하 소식이다. 이때 송응창 경략이 화의를 주장하게 되자 김제민 등이 말하기를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도 지쳤는데 여기 머물러 있으면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하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일본과 명나라간의 강화교섭이 대두된 것은 1593년 3월 이후이다. 2월 12일에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룬 후 왜군은 고립되어 화의를 모색하게 된다. 그리하여 3월 15에 명나라의 심유경과 왜군의 소서행장은 서울 용산의 일본 진영에서 회담에 들어간다.
그리고 보면 장성의병의 남하 이유는 송응창 경략의 화의 주장보다는 군량도 떨어지고 군사들도 지친 것이 더 큰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장성의병은 외재적 상황보다는 내재적 상황 때문에 남하를 결정한 것 같다.(이는 조원래와 한문종 교수의 견해이기도 하다.)
사실 출전 시에 가져간 496석의 군량은 1,650명 의병의 식량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였을 것이다. 2달 정도 진군이 계속된 상황에서 지휘부는 내부적으로 식량 부족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한편 벽제관 전투와 송응창의 화의 교섭은 1월 10일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보니 1월 10일자 <남문일기>에 적힌 내용들은 1월 10일에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1월30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더구나 1월 10일과 2월 2일 사이의 장성의병 활동사항은 <남문일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장성의병은 2월 2일에 유천에, 3일에는 수원읍에 도착했다. 4일에는 오산점에, 5일에는 진위에 도착했다. 6일에는 평택읍에 도착했고 7일에 직산에 도착하여 도유사 서연을 보내 다시 여러 고을에 모아진 군량을 중도까지 운송토록 했다. 이는 양곡이 떨어져서 의병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장성의병은 2월 8일에는 천안에, 9일에는 덕평에 이르렀고, 10일에는 의병들에게 특별히 잘 먹였다. 11일에는 금강에 12일에는 이성에 이르렀다. 이성은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이다. 노성이란 지명은 조선 정조 초기에 이성현(尼城縣)을 노성현(魯城縣)으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이성이란 지명을 쉽게 찾지 못하였다.
한편 2월 12일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사가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룬 날이다. 이 승첩에는 변이중의 화차가 큰 역할을 하였다.
2월 13일에 장성의병은 여산군계에 이르러 먼저 박안동을 보내 남문에 서신을 전하여 빨리 여러 고을의 군량을 거두어 여산읍으로 운송하도록 했다.
16일에는 장성현감 이귀 또한 관군과 쌀을 보내 의병을 도왔다. 1차 출정 동안에 장성현감은 백수종에서 이귀로 바뀌었다. 이귀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고 남문창의비에 첫 번째로 이름이 적힌 인물이다.
2월 17일에 맹주 김경수는 의곡 72섬을 모아 서연을 시켜 여산읍으로 운반하였다. 의병들의 배고픔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2월 17일의 남문일기에는 두 가지 사항이 더 적혀 있다.
이때 유정락, 상지 등의 군대는 운봉과 남원 등지에서 왜적의 퇴로를 지켰다. 이여송, 송응창은 적과 강화를 꾀하면서 대병을 철거하고 우리 두 왕자와 붙잡은 배신(陪臣)들을 돌려보내도록 주장하였다.
명나라 송응창은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고, 일본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자진 철수하겠으니 퇴로를 보장하여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여 서로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왜군은 4월 18일에 서울에서 철병하였다.
두 번째 사항은 의병장 김제민의 행보이다.
이로 인하여 김제민 등은 각각 파하고 돌아올 때 김제민은 아들 엽에게 명하여 의주에 가서 왕을 모시도록 하고, 아들 흔을 보내어 권원수(권율)를 돕도록 하니 선봉이 되어 행주에서 세 번 이겼다.
김제민은 지름길로 순창에 돌아와 군대를 훈련하고 군량을 모아 적이 다시 호남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문으로부터 쫒아가 해남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 싸워 크게 무찔렀다.
여기에서 김제민의 아들 혼이 권율을 도와 행주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시기가 안 맞는다. 행주대첩은 2월 12일에 일어났는데 2월 17일 일기에 권율을 도와 행주에서 세 번 이겼다고 적혀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요컨대, 장성의병 제1차 활동은 1592년 11월 24일에 시작하여 1593년 2월 17일에 종료된다. 약 3개월간 의병활동을 한 것이다.
< 참고문헌 >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조원래, 새로운 관점의 임진왜란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2005.
o 최영희, 임진왜란,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4.
o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 한국사 이야기 11, 한길사, 2000.
o 한문종, 장성남문의병의 활동과 성격, 학술대회 장성의병활동의 재조명, 장성군, 2013. 5.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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