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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경수와 김중기, 기효증과 곽재우에게 양곡을 보내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33회 김경수와 김중기, 기효증과 곽재우에게 양곡을 보내다.

12월 3일자 <남문일기>에는 “김경수, 김중기 등이 군량 3백섬, 세모시 15필을 내어 법성포에서 기효증에게 맡겨 행재소에 바치고, 또 1백섬을 내어 영남의 곽재우 의병소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성의병 맹주 김경수와 김중기, 기효간 등은 후방에 남아서 군량을 모아 의곡장 기효증에게 맡겨 의주 행재소에 바치고 또 영남 의병장 곽재우에게 보낸 것이다.

8월 19일에 장성남문 의병청에서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을 만난 기효증(奇孝曾 1550~1616)은 의곡장으로 임명되고, 박경은 기효증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후 기효증은 나주에 의곡도청을 설치하고, 각 고을의 양곡 모집 책임자가 정하고 의곡과 근왕병 모집을 하였다.

<호남절의록>에는 기효증과 함께 의곡을 모은 이는 영광의 이굉중·이용중 형제, 오귀영, 이희룡, 송약선, 이헌, 임수춘, 이안현, 최희윤, 이곤과 이분, 김재택이고, 광주의 이운홍, 남평의 송기원, 무장의 오희량, 순천의 이안현, 고창의 김홍우, 무안의 윤황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전 참봉 이굉중은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어서 기효증을 적극 지원하여 영광 도유사가 되었고, 영광 출신들의 많은 참여를 유도하였다.

한편 송약선은 중종 때 청백리인 지지당 송흠의 4대손으로 영광에서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고창의 김홍우와 무안의 윤황은 장성 남문 창의에 합류한 선비들이었다.

기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함재근왕록>에는 의곡을 모은 사람으로 이굉중, 민근, 이영립, 임업, 이운홍, 이천룡, 기효분, 기효민, 박경, 이한, 이녕 등의 이름이 나오고, 무안생원 김충수가 쌀 2백석, 순천 낙안 유생이 3백석, 태인 유생 안광주가 2백석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 여기에서 기효민은 기효증의 동생이고, 기효분은 기효증의 사촌이다.

9월 하순까지 나주 의곡도청에는 의곡 3,200석과 콩 50석, 좁쌀 50석, 옷감과 말 그리고 의병 460명이 모아졌다.

기효증은 의곡과 의병을 배에 싣고 서해안을 따라 의주로 향한다. 맨 먼저 9월 16일에 영광군 의곡도유사인 이굉중과 생원 이용중, 유학 이홍종, 생원 이극부 등이 함께 모은 의곡 1.200석이 영광 법성포에서 출발하였다. 9월 21일에는 나주에서 양곡을 실은 배 3척이 출항한다.

기효증은 나주 배를 타고 간 것으로 보인다. 배들은 서해안을 거치면서 점점 늘어났다. <함재근왕록>에 의하면 의곡과 의병을 실은 배는 모두 24척으로서, 강진 1척, 영암 2척, 나주 3척, 무안 1, 임치 1척, 함평 1척, 영광 2, 무장 2, 흥덕 1, 고부 1, 금모포 1, 부안 2, 임피 1, 옥구 1, 태안 2, 근포 2척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남문일기>과 <함재근왕록>에 기록된 날자의 차이이다. 남문일기에는 12월 3일에 김경수 등이 영광 법성포에서 기효증에게 의곡 3백석과 세모시 15필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함재근왕록에는 기효증은 9월 하순에 이미 나주에서 배를 탄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필자의 견해는 장성의병청에서 의곡 3백석과 세모시 15필을 지원한 것은 확실하나 지원 일자는 12월 3일 이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문제는 고증이 필요한 사항이다.

한편 의곡과 의병을 실은 배들은 10월 15일에 고부에 도착하고, 11월 6일에는 군산포(羣山浦) , 11월 10일 충청도의 람포(藍浦), 12월 3일에 태안(泰安)에 도착한다. 그리고 12월 6일에 근포진, 12월 10일 독진을 거쳐서 1593년 1월 19일 강화도에 도착한다.

포구에 이를때마다 배가 안전 운항을 할 수 있도록 제문을 올리고 해신에게 제사를 드리었다. 이를테면 11월 6일 군산포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원 임업(林業)이 제문을 지은 ‘제서해신문(祭西海神文)’이 <함재근왕록>에 실려 있다.

1592년 겨울은 너무 추웠나 보다. 의병선 5척이 풍랑에 표류되기도 하였고 바다가 얼어서 제대로 운항을 못하였다. 그런데 의주의 행재소는 함재 기효증이 의병과 의곡을 싣고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것 같다.

1592년 12월 17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윤두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기효증이 정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있는데 삼화도가 얼어 붙어 건너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또 이곳 정군을 뽑아 이빈(李薲)에게 주어 싸움터로 보내면, 그는 그곳의 형세를 잘 알고 있고 또 전에 이미 오래 머물면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스스로 공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배는 1593년 1월말 경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효증이 2월 1일에 벼슬을 사양하는 사직상소문을 썼기 때문이다. 기효증은 의주 거련관에서 선조 임금을 뵈었다. 선조는 기효증을 불러 따뜻하게 말씀하시길 “고통을 무릅쓰고 먼 곳에서 이곳에 이르니 내가 매우 기쁘도다. 또한 풍랑이 심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무사히 도착한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라고 위로하였다.

이 때 임금의 호위가 허술하였는데 호남에서 정예 근왕병 460명이 오자 비로소 호위병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양곡은 주로 명나라 군사들의 식량으로 쓰였다.

조정에서는 도체찰사가 포상을 청하는 보고서를 올려 기효증은 형조정랑 및 군기시 첨정 벼슬을 제수받았다. 군기시는 병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기효증은 신하로서 할 도리를 다한 것이지 별다른 공로가 없으니 4품 벼슬을 사양한다는 사직상소를 올린다. 선조임금은 기효증의 사직 상소를 보고는 “천리 길을 달려와 임금을 도왔으니 그 충의정신이 장하다”고 하였다.

기효증이 선조에게 올린 사직상소문에는 의병 460명과 의곡 3,200석, 콩 50석, 조 50석을 모았고, 각지에서 차출된 배, 그리고 종사자 명단이 상세히 나와 있다. 의곡종사 감수관 전몽성, 참모 최지남, 군량 선물 참모 강형, 주사장(舟師將) 김몽일, 해남의 의곡유사 윤광계, 백진남 이름 등이 나온다. 백진남은 삼당시인 중 한 사람인 옥봉 백광훈의 아들이다.

나중에 기효증은 동복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593년 3월에 대간들의 논박을 받고 파직된다. 한편 종사관 박경(朴璟 1559~1633)은 평시서 직장에 제수하였으나 그 또한 벼슬을 사양하였다. 이에 선조 임금은 궤장과 죽림처사라는 호칭을 내리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마을 월봉서원 가는 길에 칠송정(七松亭)이 있다. 이곳이 바로 기효증이 선친 고봉 기대승의 시묘살이를 하던 곳이다. 일설에는 칠송정은 기대승과 큰 아들 효증 그리고 효민과 효맹 부부와 고봉의 딸 기씨 부인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기효민과 효맹은 정유재란 때 피난 가다가 길에서 왜적을 만나 죽었고, 고봉의 딸 기씨와 효민과 효맹의 부인 양씨·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특히 고봉의 딸 기씨 부인은 하서 김인후의 손자 김남중의 부인으로 시체를 찾지 못하고 팔뚝 하나만 남아있어 이를 묻었다 한다. 소위 일비장(一臂葬)이다.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하서 김인후 묘 아래에는 그녀의 팔뚝 무덤이 있다.

한편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경상도 의병들은 여세를 몰아 경상도에 있는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전라도에 의병과 양곡 지원을 요청한다.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에는 경상의병장 정인홍과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의 호소문이 실려 있다. 이에 따라 장성의병청에서 의령 출신 의병장 곽재우에게 양곡 100석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시 호남은 이렇게 영남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호남사람들은 경상도에 양곡을 지원하였고, 임계영․최경회등 호남의병은 경상도에서 싸웠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