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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성의병, 출정하여 서울로 향하다.(2)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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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의병, 출정하여 서울로 향하다.(2) 이미지 1
제33회 장성의병, 출정하여 서울로 향하다.(2)

12월 9일에 장성의병은 금강 장기점(충남 공주시 소재)에서 머물렀다. 의병장 김제민은 청주, 천안, 온양 경계로 보낸 척후병을 기다리면서 군사들에게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 그는 행군 중에 수시로 의병들을 훈련시켰다.

12월 10일에 의병장 김제민은 무장(茂長) 출신 의병 장작금을 주민을 노략질한 죄로 군중(軍中)에서 목을 베고, 또 도망병 2명도 잡아 진영 밖에 목을 매달았다. 이러하니 전군(全軍)이 두려워 떨었다.

의병이 주민들을 노략질 한다는 것은 민심을 잃게 되는 가장 큰 해악이다. 그 사례가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일이다. 열세의 모택동 군대는 수 천리 도망을 가는 대장정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장개석 군대를 이긴 것도 군율에 있었다. 모택동의 홍군은 국민들을 노략질 하지 않았다. 반면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장개석의 백군은 국민에게 여러 가지 폐해를 끼쳤다. 이러하니 민심이 장개석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도망병을 목매 단 조치를 한 것 또한 기강 잡기의 일환이다. 도망병을 방치하면 어느 누가 왜적과 싸우려 할 것인가? 전라좌수사 이순신도 경상도 첫 출정에 앞서서 자기 집으로 도망간 수군 황옥천을 잡아서 목을 베어 여수 고소대에 높이 매달았다. 이는 1592년 5월3일자 <난중일기>에 나온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나 장성 의병장 김제민 모두 군율을 엄히 세우고자 일벌백계 조치를 한 것이다.

12일에 정탐을 하러 갔던 홍계훈이 청주에서 돌아왔다. 그는 “청주읍 서쪽에는 위험한 상황이 많아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윽고 박운이 천안에서 돌아와서 “변이중 군대가 수원, 안성 사이에 주둔하고 있으니 진군하여도 된다.”고 보고하였다. 소모사(召募使) 변이중은 6천명에 달하는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수원, 안성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박운의 보고를 받은 의병장 김제민은 행로를 천안 쪽으로 정하였다.

12월 13일에 김제민은 군사를 출발시켜 궁원(弓院)에 이르자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아 여기에서 머물렀다. 군사들은 최씨 누정과 마을 집에 나누어 들어가 유숙했다. 여기에서 궁원은 공주에서 천안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12월 14일에 장성의병은 덕평(德坪)에 진군하여 하루 종일 조련하였다. 덕평 역시 어디인지 알 수가 없으나, 이곳도 공주에서 천안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이 날도 의병장 김제민은 진군하면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실제 전투에서 이기려면 실전 같은 훈련을 하여야 한다.

12월 15일에 김제민은 천안에 진군하여 소모사 변이중에게 합세하자는 뜻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변이중으로부터 회답을 받지 못했다.

김제민이 있는 천안과 변이중이 머물고 있는 수원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장성 출신 변이중은 11월 17일에 남문의병 결단식에 참여하여 축사를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김제민은 합동 작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제민은 변이중의 회답을 받지 못했다.

한편 1593년 1월말에 변이중 군대는 죽산 전투에서 쓰라린 패전을 한다. 변이중은 소가 끄는 화차로 죽산성을 공격했는데 왜적이 우차(牛車)에 불을 던져 우차를 태우니 군사들이 죽고 변이중도 겨우 목숨을 건졌다.

12월 16일에 의병장 김제민은 다시 홍계훈, 박운, 김경우, 박응춘 등을 시켜 적정(賊情)을 정탐케 하였다. 17일에 장성의병은 천안에서 척후병의 보고를 기다리면서 하루 종일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18일에 홍계훈이 연기에 다녀와서 “왜적들이 도로를 가로막고 마을을 노략질하고 있으니 경솔하게 진군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연기는 지금의 충남 연기군으로 세종시 근처이다.

이윽고 박응춘이 평택을 다녀와서 “왜군들이 이웃 고을로 흩어져 들어가서 길이 약간 트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장 김제민은 왜군의 집결이 느슨한 평택 방향으로 진군하기로 하였다.

평택 방향으로 진군한 의병장 김제민은 12월 19일에 직산읍에서 왜군과 첫 싸움을 하여 승리하였다. 직산읍은 천안 위쪽에 있는데 경기도 평택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장성의병은 직산에서 왜적 수백 명을 만나 오래도록 싸웠다. 그리하여 왜적 수십 명의 목을 베어 진영의 문에 걸었다. 첫 전투에서의 쾌거였다.

의병장 김제민은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의병을 일으켜 몇 달 동안에 겨우 적도(賊徒) 수백을 베었으나 싸움의 성패는 가히 추측할 수 없다.”하였다. 김제민의 이 말은 참으로 힘겨운 전투였음을 실토하고 있다 하겠다. 한편 이 전투에서 의병의 희생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남문일기>에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12월 20일에 장성 의병은 경기도 평택에 진군하였다. 다음날인 21일에 장성의병은 날씨가 추워서 진군하지 못했다. 음력 12월이라 엄청 추웠으리라.

22일에 장성의병은 직산 전투에 이어 진위읍에서 두 번째 전투를 하였다. 진위읍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이다. 평택 시가지를 지나서 있는데 오산시에 가깝다.

장성의병은 이곳에서 왜군 정탐자 15명을 잡아 13인을 베어 침범할 수 없다는 위력을 보여주고, 2인은 놓아주어 돌아가 예의가 엄함(禮義之嚴)을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보면 진위에서의 전투는 왜군과의 전면전이라기보다는 왜군 척후병과의 전투이다. 그럼에도 이 전투 또한 값지다.

12월 23일에 장성의병은 오산점에 진군하였는데 이윽고 박운, 최보의 등이 샛길을 다녀와 전하기를 “왜적들이 많이 준동하고 있으니 진군이 불가하다.”하였다. 이에 김제민이 북소리를 높이고 깃발을 높이 매달고 하루 종일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이 당시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권율이 호남에서 대군을 이끌고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이 단절될 것을 염려하여 왜군 수만 명으로 독성산성을 에워싸고 권율을 공격 중이었다.

독성산성은 지금의 경기 오산시 지곶동 162-1이다. 당시에 전라도관찰사 권율은 독성산성에서 진지를 구축했다. 그는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했다. 왜군은 세 개의 진채(陳寨)를 오산 등지에 만들어 놓고 날마다 싸움을 걸었다.

그런데 권율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성곽을 견고하게 방어했다. 간혹 정예부대를 매복시켰다가 소수의 적과 진지를 공격해 적의 예봉을 꺾었다. 권율은 한 때 왜적의 거센 공격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권율은 날마다 체찰사에게 보고해 위급상황을 알리고 원군을 요청했다.

양호체찰사 정철은 전라도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서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해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퍼져 있고, 독성산성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의 주장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봐도 응원이 없으므로 날마다 3번씩이나 급히 보고하니, 본도의 관군과 의병을 성화(星火)같이 보내 독산성의 군사를 구하라”했다. 그래서 전라도사 최철견과 의병장 변사정 · 임희진 등 의병이 독성산성으로 달려왔다.

왜군은 조선군이 지구전을 계속 벌이자 예리함이 차츰 꺾이고 공격에 따른 소득도 별달리 없어 마침내 진영을 불사르고 서울로 철수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권율은 1천여 명의 정예기병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기습해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기도 하였다. 결국 독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왜군의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포위전술과 유인전술을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특히 독성산성 내에는 샘이 없어 물이 부족했는데, 왜군이 첩자를 통해 이런 사정을 탐지한 후 산성으로 흘러들어가는 냇물을 차단해 극심한 급수난에 허덕이게끔 하려했다. 그런데 왜군의 계획을 미리 간파한 권율은 며칠 동안 지탱할 수 있는 물을 비축하도록 한 다음, 서장대에 장막을 치고 연회를 크게 벌이고 군마 몇 마리도 데려다가 물로 씻기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장면을 본 왜군은 성안에 말을 씻길 정도로 많은 물이 있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냇물 차단을 포기했다. 그런데 권율이 서장대에서 말을 씻긴 물은 진짜 물이 아니고 흰 쌀이었으며, 말 위에 뿌렸던 쌀이 햇빛에 반사돼 멀리서 보면 맑은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서장대는 세마대(洗馬臺)라 불렸다고 하는데 권율 장군의 고도의 심리전술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행주산성의 대첩기념관에는 바로 이 세마대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이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로 경기도의 왜군들은 서울로 몰리는 형국이 됐고, 이때부터 의주에서 호남에 이르는 서쪽길이 확보되었으며 서울 수복의 가능성도 보였다.

1592년 12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권율의 독성산성 진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라 순찰사 권율이 수원의 독성(禿城)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권율이 직산에 이르자 체찰사 정철이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도록 경계하므로 권율이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보고했다.

조정이 전지를 내려 정철을 책망하고 권율을 재촉해 경성으로 진출하여 도모하도록 청했다. 권율이 지난날 평야의 전투에서 군사가 패한 것을 징계해 독성으로 진출해 머물렀다. 선조 임금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달려가 내려주게 하면서 ‘여러 장수들 중에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고 했다.

경성의 적이 진을 나눠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했으나 권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적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했다.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자 경기도내(畿內)에 주둔했던 적이 모두 경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西路)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돼 여러 의병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해 주둔하면서 중국 군사를 기다렸다.

사진 독성산성 세마대 - 행주산성 대첩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