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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성의병, 출정하여 서울로 향하다.(1)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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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장성의병, 출정하여 서울로 향하다.(1)

<남문일기>를 계속하여 읽어보자.

11월 18일에 의병장 김제민은 군오를 가다듬어 의병들을 조련하였다. 19일에는 말 타기와 활쏘기 연습을 하고 또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잘 먹였다.

11월 20일에는 무인(武人) 허상징에게 군대를 인솔하여 동산 아래 가서 종일 훈련하도록 하였다. 의병장 김제민은 허상징이 담력이 있고 군법에 익숙하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행군 책임을 맡겼다.

허상징(1571~1597)은 중봉 조헌의 문인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 그는 육도삼략에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허상징에게 편지를 보내어 의병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허상징은 어버이 병구완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조헌은 1592년 8월 중순 금산성 전투에서 의․승병 700명과 함께 순절하였다. 충남 금산에는 조헌 등을 기리는 칠백의총이 있다.

이윽고 7월에 김경수가 장성에서 창의하자 허상징은 군량과 목면 등을 보냈고, 다시 가동과 정복남 등을 데리고 장성의병에 합류하였다.

11월 21일에 장성의병은 술과 고기를 많이 마련하여 의병장과 여러 유사, 의병과 승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종일토록 먹고 마시어 크게 취하였다.

출정을 앞두고 군사들이 단합대회를 한 것이다. 사기를 북돋우려면 역시 회식을 하여야 한다.

11월 22일에 의병장 김제민이 군중(軍中)에 명령을 하였다. 그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이었다.

“여기 모인 군졸 가운데 부모가 있는데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고, 나이가 칠십이 넘은 자도 돌아갈 것이며, 또 스무 살이 못 된 자도 돌아가라. 그 나머지 여러 의사(義士)들은 모두 내 약속을 들으라. 대저 군법이란 행군할 때 그 부모처자가 눈물 흘리며 서로 바라본다거나 출입하면서 서로 만나본다면 병사에 크게 불리한 것이니 오늘 이후로 일체 사정을 금한 것이다. 따르지 않는 자는 군령에 따라 베리로다.” 하였다.

과연 노련한 의병장답다. 김제민은 군사의 정예화를 꾀하였다. 나이가 칠십이 넘으면 제 몸도 가눌 수 없는데 어찌 전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부모가 걱정인 군인들이 전투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나 당시에는 효가 충보다 우선시 되는 시대인 만큼 부모 부양책임이 있는 의병들은 부모 걱정을 몹시 하였으리라.

한편 의병장 김제민은 군사들에게 사사로운 정을 끊고, 군율을 지키라고 하였다. 만약 군율을 어기면 군령에 따라 베겠다고 까지 호령하였다.

드디어 장성의병은 11월 24일에 출정하였다. 의병장 김제민이 김홍우, 김신남, 이수일, 윤진, 김부, 김경남, 류희진, 윤황, 홍원, 김언희, 박안동, 김극후, 김극순, 김성진, 김란, 홍계훈, 박운, 박응춘 등과 함께 의병 1,651인을 거느리고, 의곡 496섬으로 비로소 남문을 출발하였다.

한편 김경수와 김중기, 기효간, 김대립 등은 출정하지 않고 후방에 남아 지원 업무를 맡았다. 고창현감 정운룡은 관내 일 때문에 동참할 수 없었다. 김경수는 두 아들 극후와 극순을 대신 보내었다.

장성의병은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당밑들 근처인 남문에서 출발하여 장성현청 왼편 길을 따라 교촌에 이른 후 모현천을 건너서 오산창의사가 있는 북이면 모현리 길에 이르렀다.

이 길을 따라서 북이면 사거리에 도착하여 사거리에서 하룻밤을 잤다. 사거리는 사통팔달한 교통의 중심지로 나중에 이곳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가 세워졌다.

이 길은 약 5~6 Km에 이르는데, ‘장성의병 길’이라고 이름 붙인다. 필자는 장성군청의 강대익 계장과 함께 차를 타고 두 번 정도 이 길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걸어서 행진을 하지는 못하였다. 기회가 된다면 장성군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장성의병의 충의를 느끼면서 이 길을 걷고 싶다.

아울러 장성의병 길은 좀 더 고증을 거쳐 중간 중간에 의병 길 안내판을 세웠으면 한다. 그리하면 ‘이순신 백의종군 길’ 못지않는 역사관광 길이 될 것이다.

한편 장성의병이 출정한 시기에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들은 왜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여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관군인 전라도관찰사 권율은 전라도 군사 2만 명과 처영이 이끄는 승병 1천명 등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 중이었고, 소모사 변이중도 전라도 각지를 다니면서 군사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전라 좌․우의병은 경상도에서 왜군과 대치중이었다. 전라좌의병장 임계영과 전라우의병장 최경회는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요청에 따라 10월의 진주성싸움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지원을 맡아 진주목사 김시민이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진주성이 지켜지자 전라우도관찰사 김성일과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 김면 등은 여세를 몰아 경상도 지역의 왜군을 섬멸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와 임계영에게 경상도에 계속 남아 왜적을 같이 물리치자고 권유한다. 지금은 전라도가 무사하니 경상도의 왜적을 쳐서 전라도를 더욱 온전하게 하자고 설득한다.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거의했고, 김면은 조식과 이황의 문하로서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의병장 임계영와 최경회는 이들의 간곡한 부탁에 경상도에 머무르기로 한다. 이후 두 의병장은 의병장 정인홍, 김면과 더불어 거창을 본거지로 해개령과 성주의 왜적을 친다.

한편 남원의 변사정과 해남의 심우신 등도 의병을 일으켰고,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의 시신을 수습한 고종후는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광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 ‘복수의병’이라 칭하였다.

장성 북이면 사거리에서 하룻밤을 잔 장성의병은 11월 25일에 천원(川原)에 도착하였고, 26일에는 하루 종일 사격 연습을 하였다. 11월 27일에 장성의병은 태인에 이르렀는데 이 때 김대립이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먹였다.

여기에서 천원(川原)이 어느 지명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태인 아래에 있는 지역인 것만은 확실하다. 김대립은 태인 출신으로 8월 21일에 가동 10여명과 함께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고, 11월 10일에도 김후진과 함께 의곡 15섬을 모아 장성남문에 전달하였다.

이 날 태인에서 하룻밤을 지낸 장성의병은 11월 28일에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도착하였고, 29일에는 교통요지인 여산에서 잤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여산휴게소가 있는데 여산은 충청도와 경계이다.

장성의병은 12월 2일에 황화정에서 검열하였다. 황화정(皇華亭)이 어디인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는 정자이다.

12월 4일에는 장성의병은 은진을 지나 이성읍에서 잤다. 은진은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충남 논산시 은진면이다. 이성읍도 논산에 있는 지역인 것 같다.

12월 5일에 장성의병은 하루 종일 활쏘기 연습을 하였고, 6일에는 진눈개비 눈이 내려 행군을 느슨하게 하였다. 12월 7일에 장성의병은 금강 장기점에서 잤다.

이 때 도체찰사 정철이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고기와 술을 보내주었다. 금강 장기점은 충남 공주 근처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보니 충남 공주시 장기면 근처가 장기점 같다.

금강(錦江)은 한강․낙동강․영산강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강 중의 하나이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면 용계리 일대의 수분치(水分峙)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의 연기군 일대에서 미호천을 합류하고 다시 흘러서 공주시와 부여군을 지나 서천군 일대에서 황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충청남도의 젖줄 역할을 하며 하류는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금강의 다른 명칭은 호강(湖江)이다. 그래서 금강 이남을 호남이라고 했다. 양호(호남과 호서)체찰사 정철은 장성의병에게 고기와 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정철은 장성과 인연이 깊다. 정철은 하서 김인후를 스승으로 모시었다. 장성 필암서원에는 송강 정철이 쓴 시의 편액이 붙어 있다. 이 시는 하서 김인후가 인종임금의 기일인 매년 칠월이면 장성 백화정 앞의 난산에 가서 종일토록 통곡한 것을 적은 것이다.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東方無出處 동방무출처
獨有湛齋翁 독유담재옹
年年七月日 연년칠월일
痛哭萬山中 통곡만산중

송강 정철은 김경수․기효간․정운룡 등과도 친하였다. 특히 정철과 정운룡은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었다.

12월 8일에 김제민은 홍계훈, 박운, 박응춘 등을 청주, 천안, 온양 경계로 나누어 보내 적의 동정을 정탐했다. 장성의병은 금강 근처에서 어디로 행군하여야 지를 모색한 것이다.

12월 9일에 장성의병은 활쏘기 연습을 하면서 정탐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진 : 금강 지도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