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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성의병, 출정에 앞서 도체찰사 정철에게 시무책을 건의하다.(2)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8회 장성의병, 출정에 앞서 도체찰사 정철에게 시무책을 건의하다.(2)

도유사 서연이 도체찰사 정철에게 전달한 건의서를 계속하여 읽어보자.

우리 임금께서 서울에 돌아 올 수 있게 하는 뿌리가 바로 전라도입니다. 그런데도 도내 10중 7인은 흩어지고 18고을의 창고가 텅 빈 지 이미 오래이며, 무기는 땅을 쓸어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즉묵에 사람이 없고 강회에 재물이 없으니 서울을 수복할 근거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전라도가 국난을 극복하고 임금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할 근본인데 이런 땅이 이제는 숱한 인력 차출과 재물 공출로 피폐해졌다. 강제징병, 강제노역, 강제징수가 너무 심하여 이제 나라를 살릴 근본마저 무너지고 있다.

1592년 12월 10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도 이런 전라도의 피폐함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이 장계를 읽어보자.

삼가 상의 드릴 일로 아뢰나이다. 흉한 적도들이 각 도에 가득 차 있으나 오직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우심에 힘입어 다소 온전히 보존되어 나라의 근본이 되다시피 하였는바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모두 다 이 도에서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6,7월 사이에 6만의 군마들과 수많은 군량들을 경기지역에서 다 잃어버렸고(전라도관찰사 이광의 용인전투에서의 패배를 말함), 또 병사(전라병사 최원을 말함)가 거느렸던 4만 명의 군졸들도 또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다가 이제 또 순찰사(전라도 순찰사 권율을 말함)가 정예 군사들을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가면서 다섯 의병장들도 서로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멀리 출전을 나가게 됨으로써 이로부터 이 지역에서는 소동이 일어나고 공사 간에 비축된 양곡이 탕진되고, 비록 늙고 약한 백성들은 남아 있다고 해도 그들이 병기와 군량을 실어 나르면서 채찍질을 당하고 쓰러지고 넘어져 구렁텅이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는 자들이 줄을 잇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럴 때에 또 징병관이 내려와서 내륙과 연해안 지방을 구별하지 않고 뽑아갈 군사 수를 미리 정해 놓고 심하게 독촉하기 때문에, 각 고을에서는 그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어려워서 이미 변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군졸들 까지 많이 뽑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체찰사와 그 종사관 9명이 각 고을을 나누어 검색하여 남아 있는 장정들의 징발을 독촉하고 심지어 변방 진의 무기까지 다른 곳으로 실어가고 있습니다.

또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이 그 뒤를 따라 일어나서 이 지경에 있는 절들의 노비(寺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뽑아갔는 바, 징병 모집관이 방금 내려와서 뽑아갔는데 또 서로 교대로 와서 수색하여 잡아가기를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으니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끊어지는 날이 없었습니다.

나라의 회복과 부흥을 기대하기에는 실망되는 바가 너무 커서 한 쪽 모퉁이에 있는 외로운 신하는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하면서 마음은 이미 죽어 버렸고 형체만 남아 있습니다.

- 도망병이 생긴 경우 일족 중에서 대신 뽑아 충당하지 말라는 명령을 취소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 請反汗 一族勿侵 之命狀)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징병하고 있으니 전라도 백성들의 원성과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장성남문 창의가 4개월의 시간이 걸린 것도 이해가 간다. 그들도 의병과 식량 모집에 큰 애로를 겪었으리라. 더구나 강제성도 없었으니.

이어서 글을 계속 읽어 보자.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일은 패전한 뒤 흩어진 병졸들이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밭곡식을 거두고 상수리를 주으면서 산야에 숨어 하루하루를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남은 백성들이 군량을 수송하는 데 군량 한 섬이 비록 관청에서 나왔더라도 곡식 값 10섬이 마냥 백성에게서 나오니, 피가 마르고 목이 말라 입마다 불평의 말들을 응얼응얼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번거로운 부역, 술상을 차리는 비용, 도로를 닦는 일, 구렁에 굴러 떨어진 주검, 침략의 처참함, 전사의 슬픔, 싸움터에 출정하는 고통, 부자간의 이별, 어머니와 아내의 통곡, 굶주린 낯빛, 하소연하는 소리 등 수 많은 상황은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장성의병에 참여한 선비들이 원근에서 직접 보고 들은 실제 사례들이다. 전쟁의 후유증과 백성들의 힘든 삶이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니 문득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가 생각난다. 그는 전쟁의 잔혹성과 백성들의 아픔을 몸소 목격하고 3별 3리 三別 三吏(신혼별 新婚別, 무가별 無家別, 수노별 垂老別과 신안리 新安吏, 동관리 潼關吏, 석호리 石壕吏) 시를 읊었다.

당나라 숙종(肅宗) 건원(乾元, 758~760) 초에 당나라 정부군은 안녹산․사사명의 반란군과 업성(鄴城)에서 교전 끝에 패배하자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장정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였다. 당시 두보는 낙양(洛陽)에서 화주(華州)로 거처를 옮기면서 신안과 석호, 동관 등지를 지나 갔는데, 이 때 삼별삼리의 소재가 되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고 마을은 쑥밭이 되었으며, 전쟁의 참혹상은 날로 더해만 가는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갈 곳을 잃고 헤매었고, 자식과 아내 또한 뿔뿔이 흩어진 지경이었다. 두보는 민중들의 끝없는 고통과 전장에 나간 사람들의 아픔 그리고 관리들의 무자비한 착취와 박해를 목격하고 사회시(社會詩) 또는 시사(詩史)를 지었다.

두보의 3별은 전쟁으로 인한 이별을 이야기 하는 시이다. 신혼별( 新婚別)은 신혼부부의 이별을 신부의 입을 빌어 읊은 시인데, 결혼한 이튿날 출정하는 신랑을 보내는 아내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수노별(垂老別)은 늘그막 이별이라는 뜻인데 늙은 몸으로 징발되어 싸움터로 가는 이의 설움을 적은 시이다. 무가별(無家別)은 전란으로 가족을 다 잃은 외톨이가 패전으로 낙오하여 고향에 돌아 왔으나 아무도 없다. 이별 할 가족도 없다.

삼리(三吏)는 세 군데의 관리라는 의미인데, 신안리(新安吏)는 두보가 759년에 낙양 근처의 신안을 지나다가 직접 목격한 일인데 고을에 장정이 바닥이 나서 나이 어린 애들까지도 군대로 끌려가는 비참함을 읊었다. 동관리(潼關吏)는 동관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읊고 있다.

석호리(石壕吏)는 두보가 하남성의 석호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본 사실을 시로 읊은 것이다. 한 밤중에 강제 징집을 하는 관리들의 장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중에서 석호리 시를 읽어 보자. 할머니가 전쟁터에 끌려가는 현실은 너무나 애절하다.

날 저물어 석호촌에 묵었더니
한 밤중에 관리가 사람 잡더라.
할아버지 담장 넘어 도망을 가고
할멈이 문 열고 나와 보네.
관리는 호통치며 화를 내고
할머니 애통하게 눈물 흘리네.
할머니 나서서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세 아들이 업성 싸움에 출정하여.
한 아들은 편지 보내와 소식 있으나
두 아들은 또 다른 전쟁에서 죽었다네.
살아 있는 몸 잠시 삶을 누리나
죽은 자는 영영 끝날 뿐이네.
집 안에는 남자라곤 다시 없고
오직 젖먹이 손자가 있을 뿐.
손자 어미 아직 내 집에 있으나
출입할 치마조차 성한 것이 없다오.
늙은 할멈 비록 몸은 쇠약하나
나리 따라 이 밤으로 갈까 하오.
급한 대로 하양 부역에 응하여
새벽 취사 거둘 수 있을 것이오.
밤이 깊어오자 말소리 끊기고
숨 죽여 흐느껴 우는 소리만 들리네.
날이 밝아 다시 길을 떠날 때
오직 할아버지만이 작별 인사를 하네.

이렇게 두보는 안녹산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시대적 상황 속에서 관리의 침탈까지 겹쳐 고통을 겪는 백성들의 삶을 읊고 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이 그 아들에게 두보시를 배우라고 한 것일까.

장성의병의 건의서를 계속 읽어보자.

항심이 없는 저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산 속에 숨어사는 저들과 서로 호응하여 도적질을 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의 피해는 저 왜적들 보다 더 심할 수도 있으니 장차 어찌하오리까. 이를 생각하니 간담이 떨어질 듯합니다.

정말 그랬다. 임진왜란 초기에도 순창과 옥과에서 난동이 일어나서 전쟁수행에 큰 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경남의 <난중잡록> 1592년 5월 18일자를 읽어보자.

순창과 옥과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부사 이경린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

이를 보면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 민심을 얻지 않고서는 왜적과 이길 수 없다. 글은 이어진다.

강회(江淮), 즉묵(卽墨)과 같이 믿었던 우리 전라도가 어찌할 수 없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저 숨어사는 자들을 무슨 방법으로 풀어 줄 것입니까. 어리석은 우리들은 궁마를 다루는 재주가 없고 가히 쓸 만한 지혜도 없기 때문에 오늘날 전쟁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는 것을 항상 억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 달 초 9일 비로소 어른들의 부름을 받고 도청(都廳)을 설치할 것을 논의하여 가로되, “임금이 서촉(西蜀)으로 갈 때 임금의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지만 대신(체찰사를 말함)이 분양(汾陽)에 와 있으니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임금은 당나라 현종이 안녹산의 난에 서촉으로 피난 간 것처럼 지금은 의주에 있지만, 체찰사 정철이 전라도에 와서 일하고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심이 돌아오지 않고 군량과 병력이 부족하니 비록 분양의 백배가 된 다 한들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민심이 돌아오고 식량이 풍족해지는 방법은 백성에게 있지 않고 수령에게 있으며, 수령에게 있지 않고 합하에게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습니다. 고을마다 공납을 바치지 못한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조정에 즉시 계문(啓文)을 올리시어, 매양 3분의 2를 줄이게 하시고, 수령의 식탁에 음식이 너무 번잡하오니 10분의 8을 줄이도록 급히 명령을 내리시어 잘 따르도록 조치하시고, 그 소리(小吏)들로 하여금 잔꾀를 부리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인이 먹을 양식과 군마에게 먹일 콩을 확보함으로서 백성들의 힘을 튼튼히 하고 군기(軍器)의 자원으로 사용하여 국권을 회복할 기반을 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렇게 장성의병청은 도체찰사 정철에게 수령과 아전의 부패를 척결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도록 하자고 건의하고 있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