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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성의병, 출정에 앞서 도체찰사 정철에게 시무책을 건의하다.(1)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7회 장성의병, 출정에 앞서 도체찰사 정철에게 시무책을 건의하다(1)

11월 17일에 진용을 갖춘 장성 남문의병은 출정에 앞서서 18일에 백성들을 쉬게 하고(休民) 넉넉히 먹이는 것(足食)이 급무(急務)라는 것과 인재를 얻어 백성들의 고통을 살펴야 한다는 뜻을 조목조목 진술하여 도유사 서연을 보내 도제찰사 정철에게 올리었다.
十一月十八日 條陳休民足食之急務 得人察묘之至意送徐渷上書于都體察使鄭相國澈

임진왜란은 정철(1536~1593)에게는 기회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정철은 평안도 강계에서 위리안치되어 있었는데 5월초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선조 임금을 모신다.

이윽고 정철은 7월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총괄하는 양호체찰사에 임명된다. 체찰사란 임금을 대신하여 그 지방에 가서 정무․군무를 총괄하는 임시벼슬이다. 발령을 받은 정철은 곧바로 임지로 가지 않고 선조를 모시고 의주에 머물다가 9월에야 남쪽으로 내려간다.

정철은 1581년 12월부터 1582년 8월까지 전라도관찰사를 한 바 있어 전라도는 그리 생소한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창평현(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어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윤제,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김인후, 송순, 양산보 등이었다.

10월에 정철은 강화도에서 선조에게 보고서(箚辭)를 올린다. 이 보고서의 대강을 읽어보자.

전란으로 나라는 황폐하고 민생은 파탄되었으나 다행히 전라도와 충청도(兩湖)에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곳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임금께서는 정주로 옮겼다가 명나라 군사를 기다려 평양을 수복하는 한편, 세자는 양호에 와 머물면서 양호 백성의 원한을 보답하여 주신다면, 비록 나라가 위태롭기는 하지만 강토를 버리고 요동으로 건너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윽고 도체찰사 정철은 충청도에 머물면서 양호를 지휘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경상도의 감사와 의병장들이 여러 번 체찰사 정철에게 구원병을 청하였다. 정철은 운봉현감 남간(南侃)과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에게 전라도 관군 5천여 명을 주어 개령ㆍ성주의 전투를 돕게 하였다. 10월 18일에는 전라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산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는데 왜적이 사방을 포위하여 매일 공격을 하니, 체찰사 정철이 전라도사에게 급히 명령하여 전라도사 최철견과 의병장 변사정ㆍ임희진이 달려갔다. 또한 정철은 복수의병장 고종후에게 사노(寺奴) 등을 의병에 종속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여기에서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에 실려 있는 ‘도체찰사 정철 상국에게 올리는 글(上都體察使鄭相國澈書)’의 전문(全文)을 읽어보자. 이 글은 임진왜란 당시(1592년 11월 중순) 전라도 백성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엎드려 아룁니다. 이제 국가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질 듯하고 말을 하자니 뼈가 아프며, 슬프고 슬픕니다. 목이 메여 무슨 말을 하오리까. 임금의 교서에 “나는 장차 어느 곳으로 돌아갈 것인가?”라고 되어 있고, 동궁(광해군을 말함)의 편지도 10중의 8,9는 나라가 끝났다고 하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슬프고도 슬픕니다. 목이 메이니 무슨 말을 하오리까.

이 달 초 9일(11월 9일) 이 장소에 모인 도내 부로(父老)들은 모두 다 조정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변란이 생긴 이후 바다 밖에 사는 우매한 백성들은 진실로 조정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다가, 합하(도체찰사 정철을 말함)께서 왕명을 받아 호남에 내려오시고서 비로소 조정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비들이 가로되, “우리 합하가 가시면 국운을 멈추어 버릴 것이고 우리 합하가 오시면 국운을 회복하는데 무엇이 어려울 것인가”하였고, 밭갈이하는 농부들은 가로되 “전날 전라감사 시절에는 각 고을에 폐단을 개혁하셨는데 이제 또 이 지방에 오셨으니 우리는 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합하를 의지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마치 젖 먹는 아이가 어머니를 만난 것과 같고 태산교악(泰山喬岳)이 공중에 비낀 듯하여 위태롭고 두려운 마음이 편안한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정에서 민심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합하를 보냈고, 합하 역시 민심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근심하고 괴로워 하셨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저희들도 이와 같은 민심을 알고 달려와서 이렇게 호소하오니, 합하께서는 몽매한 저희들의 호소를 기꺼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장성의병청은 정철이 도체찰사로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민심을 북돋아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어서 글은 계속된다.

대가는 멀리 서쪽으로 가 계시나 양호(호서와 호남 : 충청도와 전라도)가 나라를 위하여 굳게 지키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가는 명나라 군사를 기다리고 동궁은 호남에 와 머물면서 형세를 보아 진퇴를 하시며 혹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으면 대가 역시 바다에 떠서 남으로 오시도록 하여 양호 백성의 원한스런 마음을 보답하여 주신다면 배를 타시는 것이 비록 위태롭기는 하지만 강토를 버리고 요동으로 가시는 것 보다는 낮지 않으리까.

엎드려 생각하건데 합하의 마음은 잠시도 태만할 때가 없으며, 합하의 눈물이 잠시도 거둘 때가 없을 것이고 밥상을 대하여도 밥맛을 알지 못할 것이며 술잔을 잡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합하의 심정을 설명하자면, “우리 임금이 어디에 계시며, 기거가 편안하신지 못하신지를 누구에게 물어 볼 것이며, 음식이 차가운지 따뜻한지를 누가 살필 것이며, 여름날과 겨울밤을 어찌하여 저 변방에서 보내신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면 임금께서 대궐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임금이 돌아오실 수 있는 길은 왜적을 섬멸하는 데 있고, 왜적을 섬멸하는 길은 군량과 병력이 넉넉한 데 있으며, 군량과 병력을 넉넉하게 하는 길은 민력을 북돋우고 재물이 다 하지 않게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글이 매우 논리적이며 명쾌하다. 민력을 튼튼하게 하는 것(足民力)이 바로 임금을 다시 대궐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라는 4단 논법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라도 지역은 제나라 거(莒) 땅, 즉묵(卽墨)을 기반으로 나라를 수복하고, 당나라가 강회(江淮)를 지켜 적을 섬멸한 일들과 경우가 비슷합니다.(則全羅一域齊之惟莒卽墨大唐江淮保障殲厥醜類在於斯)

건의서는 전라도가 나라의 명맥을 잇는 최후의 보루인 즉묵(卽墨)과 같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묵은 중국 산동성 동부에 있는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읍의 지명이다. BC 284년 진·위·한·연·조의 5국 연합군은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의 지휘 아래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는 제나라의 70여 성읍(城邑)을 함락시키고 수도 임치(臨淄)까지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즉묵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점령당해 망국이나 다름없었다. 악의는 제나라를 없애고자 군대를 이끌고 즉묵을 공격했다. 그러나 즉묵의 백성들은 연나라의 강한 군대 앞에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즉묵 태수 전단(田單)을 중심으로 뭉쳤다. 태수 전단은 보통 전술로는 연나라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비책을 강구했다.

먼저 그는 민심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래를 손수 들고 병사들과 함께 성벽을 쌓았다. 또한 그의 처첩들을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전투에 참가시켰다.

이어서 전단(田單)은 성 안의 소 천여 마리를 모아서 용의 무늬를 그린 붉은 비단옷을 입히고 뿔에는 예리한 칼을 묶어세우고 꼬리에는 기름을 적신 갈대를 매어 단 다음, 성의 수십 곳에 구멍을 뚫고 밤중에 그 구멍으로 꼬리에 불을 붙인 소를 적진으로 내모는 한편 장사 5천 명으로 하여금 소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소는 궁둥이가 뜨거워지자 미친 듯이 날뛰며 연나라 군대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군영은 대 혼란이었다. 병사들은 소에 걸려 죽거나 다치고 말았다. 이윽고 즉묵의 군사들은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연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연나라 군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마침내 제나라는 빼앗긴 70여개 성을 되찾았고 피신한 제나라 양왕은 다시 수도 임치로 돌아왔다. 큰 공을 세운 전단은 귀족에 봉해졌다.

또한 건의서는 전라도는 당나라가 강회(江淮)를 지켜 적을 섬멸한 일들과 경우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일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수양성(睢陽城) 태수 허원(許遠)과 무장 장순(張巡)이 반란군에게 포위된 후 수개월이 지나자 양식이 떨어지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참새, 쥐 등을 먹어가며 수양성을 사수한 일화를 말한다.

수양성 안에 양식이 고갈되자 사람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자고 하였으나 장순과 허원은 “수양은 강회〔江淮 : 장강(양자강)과 회수淮水〕의 보장(保障)이다. 만약 이 성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깊이 쳐들어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강회는 없게 될 것이다.” 하고 끝까지 수양성을 지켰다.

안타깝게도 수양성은 포위된 지 2년이 되는 서기 757년에 안녹산의 반란군에게 함락되었고 허원․장순 등은 순절하였다.

이 글을 읽으니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1593년 7월에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인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글귀가 생각난다.

그렇다! 임진왜란 때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였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지경이었다. 호남은 국난 극복의 교두보였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