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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성남문의병,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6회 장성남문의병,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 보자.

11월 10일에 류희진이 아우 류희사와 함께 의사 57인, 집안 하인 12명, 군량 35섬, 말 1마리, 소 1마리 등을 거느리고 왔다.

류희진(1558~1597)은 7월 28일에도 장성에 달려온 정읍의 선비이다. 그는 장성 남문 창의 소식을 듣고 동참하겠다는 글을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옛 시에 만사가 충효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다” 하였으니, 효란 한 가정에 관한 일이지만 충이란 그 때를 만난 후라야 가히 충을 이루는 것이니, 우리나라의 형세를 볼 때 지금이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이수일이 집안 하인 11명, 의사 52인, 군량 22석, 병서 2편을 가지고 왔다. 김후진, 김대립 등이 의곡 15섬을 보내왔다.

태인의 이수일(1534~1616)은 호남의 큰 선비 일재 이항의 둘째 아들이다. 그 역시 7월 28일에 의병을 이끌고 장성에 온 적이 있었다.

일재 이항은 칼 찬 선비 남명 조식을 연상하게 하는 호남의 유학자이다. 이항은 칠보산 아래 보림사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를 하면서 호를 일재(一齋)라 하였다. 오로지 한 가지로 집중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일재의 제자들은 김천일, 변사정, 최경회, 황진, 고종후, 백광홍, 김점 등이다. 이들 중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복수의병장 고종후(고경명의 큰 아들)는 1593년 6월 하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한 사람들도 일재의 제자가 많다. 기효간․김제민․김후진․김대립․김부․이수일 등이 그들이다. 일재는 제자들에게 육도삼략과 극기훈련도 가르쳤다. 그리고 보니 이수일이 가져 온 병서는 바로 일재 이항이 소장하고 있는 손자병법, 육도삼략 등 병서였을 것이다.

태인 출신 김후진․김대립은 8월 21일에 집안 하인 10여명을 이끌고 장성의병에 동참한 선비들이다. 이들 역시 이항의 문인이다. 이들은 김복덕․김경억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윽고 11월 10일에 김언희가 집안 하인 가동(家僮) 9명, 의사 72인, 널판지 50장, 콩 15섬, 군량 26섬, 말 9필, 소 2마리를 가지고 왔으며, 옥천사 스님 의관이 승군 37명, 백지 18속, 장지 6속, 새끼 37통으로 따라왔다.

김언희는 담양 출신으로 오천 김경수의 문인인데 그는 형 김언욱과 함께 장성의병에 참여하였다. 특이한 것은 김언희와 함께 담양 옥천사 스님 의관이 승병을 데리고 동참한 것이다.

이제 여러 지역 스님들이 의병에 참여하고 있다. 고창 문수사 스님 처한, 흥덕 연기사 스님 자혜, 담양 옥천사 스님 의관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의병활동에 크게 공헌하여 나중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에 그 이름이 올라 있다.

이어서 윤진이 의사 38인, 집안 하인(가동) 8명, 군량 31섬을 가지고 왔고, 박안동이 아들, 조카, 가동, 의사 50인, 군량 27섬, 콩 8섬, 말 4필, 소 2마리 등을 가지고 왔다.

윤진은 김경수․기효간과 함께 창의를 발의하고 격문을 지은 인물이다. 박안동은 장성 출신으로 정철의 문인이다. 그는 1590년에 부친이 병석에 눕자 자신의 엉덩이 살을 베어 봉양하였다 하여 효자로 천거되어 내섬시 봉사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박안동은 부친의 상복을 벗고 아들과 조카와 함께 의병에 합류하였다.

11월 10일에 여러 선비들이 장성 의병에 계속 참여한다.

김신남이 의사 59인, 군량 24섬, 말 2필, 소 1마리, 장편전 32촉을 가지고 왔다. 김중기가 의사 71인, 군량 15섬, 예환(銳丸) 36개를 가지고 왔다.

김신남은 오천 김경수의 사촌동생으로서 남문창의에 실무책임자였다. 나중에 1,2,3차 전투에도 모두 참여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장성 출신 김중기는 동생 김덕기와 함께 가장 먼저 참여한 선비이다.

김성진이 의사 185인, 군량 68섬, 콩 13섬, 창검 98자루를 가지고 왔다. 김란이 의사 80인, 군량 22섬, 장편전․예환 등 물건을 가지고 왔다.

김성진은 고창 출신으로 삼종형 김홍우와 함께 참여하였다. 김란 역시 고창 출신이었다.

김부, 김명, 홍원 등이 의사 87인, 심부름꾼 17명을 거느리고 의곡 37섬, 콩 5섬, 말 7필, 소 한 마리, 장평전 33촉, 전립 50개를 가지고 왔다. 윤황이 의병 89인을 데리고 군량 32섬, 장편전 17촉을 가지고 왔다.

김부 · 김명 · 홍원은 7월 28일에도 격문을 보고 장성에 달려온 선비들이었다. 나주의 김부(1569~1597)는 일재 이항에게 학문을 닦아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김부는 동생 김명, 외종사촌 윤황과 함께 달려 온 것이다. 윤황은 무안 출신이다.

홍원(1576~1603)은 나주 금안리에서 살았는데 1592년 김천일 의거에 16세의 어린 나이로 동참하여 가동과 군량을 보내고 북상하였는데 중도에서 병을 얻어 다시 나주로 내려왔다. 그 후 김경수 등이 창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고향 동지인 김부, 김경남 등과 함께 장성에 달려 온 것이다.

이렇게 11월 10일 하루 동안에도 여러 지역의 선비들이 의병과 하인들을 이끌고 식량과 무기를 가지고 장성 남문에 도착하였다.

11월 11일에는 서정후가 심부름꾼 7명을 데리고 군량 17섬, 말 2마리, 소 1마리를 가지고 왔다. 함평의 정절이 의사 57인을 거느리고 군량 28섬, 말 2필, 예환 7개, 장편전 42촉을 가지고 왔다.
서정후는 당초에 김천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장성의병에 참여하였다. 나중에 그는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11월 12일에는 고을 원님이 고기와 안주를 많이 장만해 가지고 의병청에 와서 위로했다.

장성현감 백수종의 장성의병에 대한 격려는 한결같다. 그런 그가 <호남오산남문창의비>에 이름이 없다니 참 아쉽다.

11월 14일에는 김제민이 의사들을 거느리고 동산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으며, 김익웅, 김무철 등이 왔다.

순창현감 김제민은 이제 본격적으로 의병들에게 전투 훈련을 시키고 있다. 김익웅은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기대승․정철 등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아들 김덕생을 데리고 장성의병청으로 달려왔다. 김무철은 나주의 김부와 같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장성 의병청에 달려 왔다.

11월 15일에도 군사들을 조련하였으며, 정읍의 최보의, 함평의 정충량, 장흥의 김정, 장성의 박성 등이 군량을 싣고 왔다. 11월 16일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습하였으며, 고창의 조여일, 장성의 유덕문, 함평의 이원개, 나주의 김국서 등이 왔다.

드디어 장성의병은 11월 17일에 초단을 만들어 김경수와 김제민을 맞이하여 앉히고, 중론으로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또 각 사항과 유사를 정하여 군량과 군기 등을 맡게 하였다.

이 날 변이중이 와서 위로하여 말하기를 “제공의 의거는 참으로 열성조에서 길러 준 은택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장성 남문의병은 7월 18일에 오천 김경수가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 한 이후 4개월 만인 11월 17일에야 비로소 진용을 갖추었다.

이 날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부사 기효간, 참모 김홍우, 종사 윤진, 의곡장 기효증, 종사 박경, 도유사 서연 등을 선정하여 대오를 편성하였다.

한편 남문의병이 진용을 갖추기까지 4개월이나 소요된 이유는 순창· 부안· 정읍·금구·남원·함평·무안·영광 등 광범위한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는데 큰 어려움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전라도 중서부지역 16개 고을에서 달려 온 1,651명의 의병과 군량 486석이 모아졌다.

장성 남문의병 결성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의병의 출발지인 장성을 비롯하여 나주·담양·함평·영광·무안·광주·정읍·태인·고부·고창·흥덕·무장·부안·금구·순창 등 전라도 중서부 지역 16개 고을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둘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장성 인근에 산재해 있는 사찰의 승려와 사노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호남오산 남문창의비> 이름이 기록된 9명의 의승과 사노 애금이 바로 그들이다.

장성 남문의병에는 장성 백암사, 취서사, 하청사, 수도사, 고창 문수사, 흥덕 연기사, 담양 옥천사 등 장성 인근에 산재해 있는 사찰에서 달려 온 승려 105명이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장성 남문의병에는 집안 하인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그중에서 김경수의 하인 애금은 김경수의 서신을 각 읍에 전달하였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호남오산 남문창의비>에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셋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장성과 그 인근 지방의 수령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었다. 먼저 장성현감 백수종이 적극 지원하여 주었다. 또한 고창현감 정운룡, 순창현감 김제민도 의병에 참여하였다.

넷째, 장성 남문에 모인 70여명의 선비는 학연에 의해서 그 결속기반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항·김인후·기대승․정철 등 호남출신 대유들과 학연으로 맺은 사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항의 문인은 아들인 이수일, 기효간, 김제민, 김대립, 김부, 김후진 등 6명이고, 김인후의 문인은 김경수, 김인혼, 기효간 등 3명, 기대승의 문인은 기효증, 정운룡, 기효간이고, 박안동은 정철의 문인이다.

다섯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혈연을 바탕으로 부자·형제 또는 문중의 사람, 가솔 등을 데리고 의병에 참여한 자들이 많았다. 남문창의의 맹주인 김경수는 아들 김극후․김극순, 종제 김신남, 김인혼 등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김극순의 장인 정운룡도 의병에 가담하였다.

또한 순창현감 김제민은 아들 김엽․김흔이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고, 장성의 김중기․김덕기 형제, 정읍의 류희진․류희사․류희문 형제, 고창의 김홍우․김광우․김덕우 형제, 부안의 김억일․김극온 부자, 영광의 이응종․이극부․이극양 부자, 장성의 박안동과 아들․조카, 함평의 김익웅․ 김덕생 부자, 정충량․정득량 종형제, 담양의 김언욱․김언희 형제가 의병에 함께 참여하였다.

이처럼 장성 남문의병은 각 지방의 사림들이 학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그의 가솔들, 지방관과 관군, 승려,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계층을 초월하여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전라도 중서부지역의 의병 총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