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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각 읍의 의사들, 의병과 곡식을 가지고 장성으로 모여들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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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각 읍의 의사들, 의병과 곡식을 가지고 장성으로 모여들다.

11월 9일에 고창의 김홍우가 의병 82명을 데리고 군량 32섬, 편전 31촉, 말 7필, 소 3마리를 가지고 왔으며, 문수사 스님 처한 등 승병 16명이 따라왔다.

김홍우는 7월 20일에 장성 남문창의 격문을 전라도 각 읍의 선비들에게 돌린 이로 동생 김광우․김덕우와 함께 장성에 왔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고창 문수사(文殊寺) 스님 처한 등 승병 16명이 함께 참여한 것이다. 문수사는 취령산에 있는 절인데, 승병들도 남문 창의에 참여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이윽고 흥덕현(興德縣)의 서연이 연기사 스님 자혜 등 17명과 의병 49인, 하인 6명, 백지 19속, 장지 7속, 새끼 37통, 군량 24섬 7말 등을 가지고 왔다. 흥덕현은 동쪽으로 고부군, 남쪽으로 고창현과 인접하여 있다.

이어서 부안의 김홍원이 모집한 의사 100인, 승병 31명, 군량미 47섬, 군기 등 물건을 김해(金垓)에게 보내왔다.

김홍원(1571~1645)는 부안 출신으로 부친의 병을 구완하기 위하여 의병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집한 의병과 군량미 등을 친척인 김해(1563~1637)에게 보낸 것이다.

부안의 김억일도 하인 수 십 명을 데리고 와서 “원하노니 제공과 한 마음으로 죽고자 합니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억일(1544~1604)은 분기하여 아우 김구일과 아들 김극온에게 편지를 주어 고경명에게 전달토록 하였는데 이들은 노령에서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김억일은 너무 상심하다가 장성남문에서 창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의 적이요, 개인의 원수를 갚고자 합류한 것이다.

한편 이 날 오희길(吳希吉 1556~1623)이 정읍 내장사에서 찾아와 격려하기를 “여러분들의 의거는 나에게 십분 의기를 고취시켰다.”고 말하였다.

당시에 오희길은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으로 있었는데 전주가 위태하여지자,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과 제기(祭器), 그리고 전주사고에 있는 역대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어 보존하고 있었다.

오희길은 호가 도암(鞱庵)으로 김인후·정여립의 문인이었다. 그는 고창에 살았는데 정여립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 그 잘못된 점을 적어 정여립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여립은 매우 노하여 오희길을 혼내었다. 그런데 1589년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오희길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는데 정여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정여립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고, 이 편지를 읽은 선조가 오희길을 기특하게 여겨 참봉 벼슬을 제수하였다.

국조보감과 1589년 12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먼저 국조보감(선조 1589년)을 읽어 보자.

○ 이에 앞서 고창 사람 오희길이 정여립에게 종유하며 배웠다. 하루는 정여립이 이이ㆍ성혼을 헐뜯어 배척하는 말을 듣고 이에 긴 글을 지어 여립의 간특한 정상을 나열하고 말하기를, “이로부터 희길의 발길은 마땅히 문하(門下)에서 끊어질 것이다.”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그 서찰이 여립의 문서 속에 있었다.

상이 이를 열람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전라 감사가 올린, 여립의 문도로서 수금당한 문안에 희길의 이름이 있음을 보고서 특명으로 석방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필시 기사(奇士)이다. 내가 벼슬을 주고자 하니, 정부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라.”하였다. 대신들의 의견이 성상의 분부와 같았다.

이조에 전교하기를, “고창에 사는 충의위 오희길은 정해년에 간당들이 사류를 배척하고 사악한 말들을 떠벌려 이이와 성혼이 그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조정에서도 이이와 성혼을 구제하고 여립을 배척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는데, 희길이 이때에 역적의 우두머리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이와 성혼을 추존(推尊)하고 역적의 심술을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라.”하였다. 이에 참봉을 제수하였다.

진사 정운룡은 장성 사람인데 향리에서 조행이 있었다. 이때 현감 이계가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가르쳤는데 운룡을 초빙하여 선생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립이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어 제수(祭需)를 요구하였는데 열읍에 두루 미쳤다.

이계가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과는 하루의 교분도 없는데 어찌하여 서찰을 보내어 요구하면서 수량을 정하여 징수하기를 마치 상사(上司)가 호령하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하고 드디어 답하지 아니하였다. 운룡이 여립과 서로 알고 있음을 알고 그 서찰을 보이니, 운룡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학식이 넓고 이발 형제가 자주 칭찬하였기 때문에 한두 차례 만났다. 요즘 듣건대 가정생활의 처사가 흉악하고 간사한 정상이 많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서찰을 보니 더욱 증험이 된다. 이 사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후일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찰을 보내어 이발도 함께 끊어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그가 절교한 서찰을 수색해 보고 나서 하교하여 칭찬하고 특별히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하였다.

다음은 1589년 12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이다.

오희길을 참봉에 제수하다. 이조에 전교하기를, “고창에 거주하는 충의위(忠義衛) 오희길이 1587년 정해년 무렵에 간당(奸黨)이 우글거리고 사설(邪說)이 난무하여 이이와 성혼이 그들의 배척을 당할 적에 조정에서도 이이와 성혼을 구제하고 정여립을 배척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오희길이 이때에 역괴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이와 성혼을 추존(推尊)하고 역적의 심술을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에 참봉을 제수하였다.

희길이 소장을 올려 ‘자신이 역당(逆黨)에 물들었으므로 감히 사적(仕籍)에 들어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답하기를, “역적이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도둑질할 적에 누구인들 추허(推許)하지 않았겠는가. 그대가 그의 문하에 출입한 것은 또한 괴이한 것이 아니다. 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도 빌붙지 아니하고 홀로 시비(是非)의 정도를 지켜 궤특(詭慝)한 정상을 바로 지척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그대의 허물을 특별히 용서하고 그대의 마음을 깊이 사게 된 까닭이다. 옛 사람이 선비를 취하는 방도는 하나뿐이 아니었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다하도록 하라.”하였다.

【당시 희길이 이미 역적의 문인이 되었으나 절교한 서찰 때문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도 다행이었기 때문에 희길이 사직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기축년의 사류가 패배하여 물러가게 되어서는 희길을 그때의 인물이라 하여 폐기하고 수용하지 않았다.】

진사 정운룡은 장성 사람으로 향리에서 조행이 있었다. 이때 현감 이계가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가르쳤는데 운룡을 초빙하여 사장(師長)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립이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어 제수(祭需)를 요구하였는데 열읍에 두루 미쳤다. 이계가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과는 하루의 교분도 없는데 어찌하여 서찰을 보내어 요구하면서 수량을 정하여 징수하기를 마치 상사(上司)가 호령하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호기를 부려 사람을 능멸함이 이와 같으니 필시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답하지 아니하였다.

운룡이 여립과 서로 알고 있음을 알고 그 서찰을 보이니, 운룡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학식이 넓고 이발 형제가 자주 칭찬하므로 한두 차례 만났다. 요즘 듣건대, 가정 생활의 처사가 흉악하고 궤사(詭詐)한 정상이 많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서찰을 보니 더욱 증험이 된다. 이 사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후일의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찰을 보내어 이발도 함께 끊어버렸다.

얼마 못가서 운룡이, 정여립이 대중을 모으는 형편을 탐지해 알고 그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으로 여기고는 자신의 가족은 이계에게 위탁하고 자신은 경기로 돌아와서 피하였다. 이에 이르러 상이 그가 절교한 서찰을 수색해 보고 나서 하교하여 포장(褒奬)하고 특별히 왕자사부에 임명하였다.

이계 또한 학식이 넓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였다. 벼슬은 삼등 현령(三登 縣令 평안도 고을)에 그쳤다. 아들 이정구는 명신이 되었다.

(선수 23권, 22년(1589) 12월 1일 14번째 기사)

이 두 기록을 보면 오희길은 정운룡과 함께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 모반 사건과 관련하여 선조로부터 벼슬을 받은 것이다.

한편 오희길은 1589년에 후릉 참봉이 되었다가 1591년에 전주 경기전 참봉이 제수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외한 일곱 개 도를 초토화 시키고, 6월에는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2만 여명의 일본군 제6군이 전라도를 공략한다. 금산에 진을 친 왜군들은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웅치를 넘어서 전주성 밖까지 진출한다.

다행히도 전 전적(典籍) 이정란의 기지로 전주성이 사수되었지만 전주는 한 때 왜적의 손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였다.

이렇게 전주가 위급하여지자 오희길은 태조의 어진과 실록의 피신 대책을 세운다. 당초에 그는 실록을 땅에 묻으려 하였으나 금산에서 잡힌 왜적에게서 성주사고에서 약탈한 실록 두 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초 계획을 취소하고 산중 깊은 곳에 숨기기로 한다. 그가 생각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바로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이었다.

이 때 마침 전라도 태인에 사는 지방 유생 안의(安義 1529~1596)와 손홍록(孫弘祿 1537~1610) 일행이 오희길에게 달려왔다. 특히 손홍록은 30명의 집안 가솔도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일재 이항의 제자들이었다.

오희길과 안의, 손홍록 등은 서둘러 어진과 실록을 옮기는 작업을 한다. 태조에서부터 명종까지의 180년 동안의 실록을 47상자에 담고, 고려사 등 다른 서책도 15개 상자에 담았다. 궤짝으로 따지면 약 60여 궤, 책 수로 따지면 실록이 830책, 고려사 등 기타 전적이 538책 분량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분량의 실록과 태조 이성계 초상화 그리고 제기를 수십 마리의 말에 실었다. 수행한 인원도 100여명이 되었다. 호남절의록에는 삼례찰방인 무안 출신 윤길, 도사 최철견, 참봉 유인과 구정려, 무사 김홍무 등도 오희길 등과 함께 실록을 옮긴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오희길 일행은 전주를 떠난 지 7일이 되는 6월 22일에 정읍 내장산 은봉암에 도착한다. 이튿날에는 태조 어진과 제기들을 내장산의 용굴암으로 옮긴다. 그런데 은봉암도 안심이 되지 않아 7월 14일에는 실록을 내장산의 더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옮긴다. 깊은 산중에 있는 비래암으로 실록을 옮길 때에는 사람들이 책을 한 권 한 권 지게에 담아 어깨에 지고 비탈길을 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야 했다.

이렇게 내장산 깊숙한 곳에 어진과 실록을 옮긴 안의와 손홍록은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단 하루도 자리를 뜨지 않고 실록과 어진을 지켰다. 물론 이들 두 사람만 태조 어진과 실록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영은사(靈隱寺 지금의 내장사)의 의승장 희묵 스님과 의승들, 손홍록의 가솔 30여명, 무사 김홍무, 산골에서 약초, 인삼을 캐는 심마니들과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100여명이 실록을 지키었다. 이들은 돌을 주워 모아 요새를 만들어 수비태세를 갖추고 무기를 지니고 숙직을 섰다.

한편 전라관찰사는 태조 어진과 실록이 잘 보존되고 있음을 평안도 의주로 피난 가 있는 선조에게 알린다. 이에 선조는 매우 기뻐하며 1592년 11월에 병조좌랑 신흠을 내장산에 파견하여 어진과 실록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오희길이 내장산에서 오희길이 장성을 찾아온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은 서울 춘추관, 충주·전주·성주사고 등 네 곳에 모시어져 있었다. 그런데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은 임진왜란 초기에 모두 불타 버렸다.

다행히도 전주사고에 있는 실록은 오희길 등의 노력에 의하여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오희길. 그는 왜적 수 천 명을 죽인 장수보다 더 큰 일을 한 선비이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전주 경기전
2. 태조 이성계 진영
3. 경기전 전주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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