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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창현감 김제민, 장성남문의병에 합류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4회 순창현감 김제민, 장성남문의병에 합류하다.

계속하여 1592년 11월 9일의 남문일기를 읽어본다. 남문일기는 장성 의병활동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순창현감 김제민이 두 아들 엽과 흔, 순창 관군 70명, 의사 120인, 의곡 70석, 장편전 37촉, 목령 14개, 철령 12개, 말 12필, 소 9마리, 새끼 160통 등을 장성의병청에 도착하였다.

김제민이 말하기를 “여러 의사들은 모두 내 약속을 들으시오. 나라가 있은 연후에 가정이 있는 것이요 임금이 있은 연후에 신하가 있는 것이니, 여러 의사들은 힘을 다 해 일을 도모하여 우리의 절실한 소원을 이룹시다.”하였다.

김경수 등은 크게 기뻐하며 “공이 왔으니 우리는 근심이 없소.”하였다.

순창현감 오봉(鰲峯) 김제민(金齊閔 1527~1599)이 장성의병에 합류한 것은 장성의병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김제민은 이미 의병을 일으키어 웅치에서 왜군과 싸운 경험이 있는 노장이었고, 함께 거느리고 온 병력도 200여명에 이르렀다.

김제민의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峯)으로 1527년에 정읍(옛 이름 고부 古阜)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인의 일재 이항을 찾아가 학문을 쌓았고 실천력과 경술(經術) 또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1558년에 사마시,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화순․순창․함양군수를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내직으로는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그는 천태산(天苔山)의 오봉(鰲峯) 아래 살면서 호를 오봉(鰲峯)이라 하였으며, 윤근수․고경명과도 친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제민은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있었는데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로 옷소매를 적시며 다음 시를 읊었다.

삼천리 밖의 한 외로운 신하가
관서를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로 소매 적시네.
역로(驛路)는 험하고 승냥이 같은 왜적들은 날뛰는데
그 누가 있어 용감하게 왕의 수레를 호위할 것인가
三千里外一孤臣 삼천리외일고신
悵望關西淚灑巾 창망관서누쇄건
驛路多憂豺虎亂 역로다우시호란
何人能扈屬車鹿 하인능호속차록

6월 27일에 김제민은 순창에서 세 아들 엽(曄), 흔(昕), 안(晏)과 함께 북향 사배하고 종일 통곡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창의격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지의 이치는 사람이 잘 살게 하는 것을 큰 덕으로 삼는데 살벌하는 자는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요, 백성들의 정기는 의를 세우는 것이니 대의에는 사람들이 반드시 따르리라.

근왕하는 비조(悲詔)를 봉독하고, 어찌 눈물을 흘린 문산(文山) 같은 충신이 없을 것이며, 의사를 모아 군용을 갖춘다면 반드시 적기를 빼앗아 올 무목(武穆) 같은 장군이 있을 것이다. 우리 성주(聖主)를 잊지 말고 다시 한양 땅의 중흥을 기하기 위하여 모두가 이 격문을 읽고 뒷날에 뉘우침이 없기를 바란다.

문산(文山)은 남송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자기 재산을 털어 의병 1만 명을 모집하여 몽고와 싸웠고 여러 해 동안 항몽운동을 하였다. 남송이 멸망한 후 익왕(益王)을 도와 남송 회복에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되었다. 그는 3년 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두 눈이 멀었고,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가 그에게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였지만 끝내 거절하고 처형되었다. 문천상이 처형 직전에 읊은 정기가(正氣歌)는 너무나 유명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의 위엄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정기(正氣)를 지녔기 때문이다."

무목(武穆)은 중국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 1103~1142)의 시호이다. 그는 여진족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간신 진회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악비는 명나라 이래로 한(漢)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한편 김제민의 격문을 보고 각 지역의 의병들이 삼례역(三禮驛)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김제민은 의병을 이끌고 고산현 대둔산 아래 진을 치고 아래 시를 지었다.

돌도 아닌 마음 굴러 보일 수도 없고
팔풍이 불어 올 줄 그 어찌 알았으리.
근왕하라는 종이 한 장 능히 마음 움직여
슬픈 눈물 흘리며 의기(義旗)를 드높이네.
非石貞心不可轉 비석정심불가전
八風吹勤豈曾知 팔풍취근개증지
勤王一紙能搖得 근왕일지능요득
悲泲雙垂擧義旗 비제쌍수거의기

한편 의병장 김제민은 왜적이 금산을 출발하여 전주로 향하여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축문을 지어 하늘에 제사하고 군사들과 함께 맹세하기를 ‘전주는 우리 조정의 근본이 되는 곳이요, 선왕의 초상이 모셔져 있는 곳인데 왜적에게 침범을 당할 수는 없다. 먼저 적을 토벌하여 근본을 완전하게 하리라“ 하였다.

이어서 김제민은 세 아들과 같이 의병을 거느리고 웅치로 달려가 김제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과 같이 좁은 골짜기에서 진을 치고 목책을 만들어 산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는 왜적 수만과 하루 종일 다섯 차례 전진 후퇴하며 싸운 끝에 많은 적의 정예병들을 사살하였다. 이 때 공의 아들 안(晏)이 말을 달려 적진을 돌격하다 김제군수 정담과 같이 죽었다. 적들은 그의 장한 기절에 감동하여 시신을 땅에 묻고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 朝鮮國 忠肝義膽)’이란 글을 써 표(標)를 세웠다.

적이 물러 간 후 적들이 표를 세운 곳을 파서 김안의 시신을 찾으니 몸에 탄환을 맞았으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김안의 행적은 <호남절의록>에 전한다.) 이후 왜적들은 호서 지방으로 달아나서 호남지방은 별 피해가 없게 되었다.

<호남절의록>에는 김제민을 삼운(三運) 의병장이라고 하였다. 이 책에는 “임진왜란 초기에 호남의 의병을 나누어서 3운이라 하였는데 창의사 김천일을 1운(運), 초토사 고경명을 2운 그리고 김제민을 3운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김제민이 웅치 전투에서 왜적을 격퇴한 기록은 <호남절의록>과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의 ‘제현사실(諸賢事實)’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7월 7일과 7월 8일의 웅치 전투에 대하여는 <호남절의록>등의 김제민이 웅치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기록은 조금 과장된 듯하다.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가 발간한 <칠백의총> 팜플렛 등 임진왜란 사료에는 웅치전투는 패배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료를 살펴보자.

6월에 왜군 제6군 고바야카와 군대 1만 6천명은 전주 점령 계획을 세운다.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승려 출신 왜장 안코쿠지의 남군은 진안의 웅치를 넘고, 고바야카와의 북군은 금산의 이치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7월 7일에 수천 명의 안코쿠지 군대가 웅치를 넘는다. 조선군은 3중으로 방어진을 쳤는데 제1진은 황박, 제2진은 이복남, 제3진은 정담이 맡았다. 이 날 조선군은 화살을 날려 적의 선봉을 잘 막아냈다.

다음날인 7월 8일 늦은 아침, 왜군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진격하였다. 깃발을 등에 지고 칼을 휘두르고 조총을 쏘며 쳐들어왔다. 제1진 의병장 황박의 군사 2백 명은 필사적으로 저지하였으나 밀려났다. 그러자 제2진 이복남 군이 나섰다. 그러나 왜적은 2진까지 밀고 올라와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제3진 정담 부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죽였으며, 적이 계속 밀어 붙이어도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얼마 뒤에 정담은 홀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였으나 정담은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동요하지 않고 적과 싸웠다. 안타깝게도 정담은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 참가했던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1557~1592)은 중상을 입고 겨우 살아났다. 후일 변응정은 8월 27일의 금산 황당촌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7월 9일에 왜군은 웅치를 넘어서 전주성 밖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전 전적(前 典籍) 이정란은 백성들과 함께 전주성을 사수할 것을 결심하고, 낮에는 전주성에 깃발을 잔뜩 세우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 왜적은 전주성 방위가 튼튼한 줄로 알고 감히 전주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정란의 기지가 호남을 살린 것이다.

그리고 보니 역사는 한 가지 기록에만 의존할 일이 아니다. 여러 기록들을 두루 살필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o 김동수 교감․역주, 호남 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 칠백의총 팜플렛,
o 김주백, 오봉 김제민 선생의 학문세계와 임란 창의,
퇴계학 부산소식, 사단법인 퇴계학 부산연구원, 1973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