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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각 읍의 선비들이 장성의병청에 병사와 의곡 모집상황을 알리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3회 각 읍의 선비들이 장성의병청에 병사와 의곡 모집상황을 알리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 보자.

9월 16일에 고창의 김홍우가 편지로 말하기를 “엎드려 왕의 교서를 읽어보니 나도 몰래 담이 떨어지고 가슴이 막힙니다. 우리 의거가 한번 모이기 어려운데 하물며 두 번 모이는데 어찌 걱정이 없겠습니까. 공들의 생각이 높고 밝으니 헤아림이 옳으리다. 모집한 병사와 곡식은 죽기로 작정한 자 50여인과 군량 20여 섬, 말 7마리, 소 3마리 뿐입니다.”하였다.

김홍우도 전라도 사민(士民)을 유시하는 선조의 교서를 읽고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런데 김홍우가 선조의 교서를 어디에서 입수하였는지가 궁금하다. 장성 의병청에서 선조의 교서를 각 읍에 보냈는지 아니면 조정에서 직접 각 읍에 보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필자의 생각은 장성 의병청에서 교서를 필사하여 각 읍에 보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 김홍우는 모집한 병사가 50명, 군량 20여섬, 말 7마리, 소 3마리라고 김경수에게 통지한다. 이는 9월 10일에 김경수가 각 열읍에 모집한 병사와 곡식이 얼마나 되는 지를 알려달라고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한 회신이었다.

김경수는 김홍우의 편지를 읽고 곧 답장을 보내 ”돌아보건대 지금 왜적들이 산야에 가득한데 누가 물러나 처자를 보전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니 한번 모이는 것이 비록 어렵지만 한번 흩어지기도 또한 어려우니 그 동지로 있어 누가 감히 약속을 어기겠는지요.”라고 하였다.

김경수는 김홍우에게 창의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9월 17일에 흥덕의 서연이 편지로 말하기를 “병사는 40여명을 모집하고 곡식 20여섬, 소 2마리, 말 5필을 모았고 탄알, 철령, 목령, 피령, 장편전 등은 30여개에 불과합니다.”하였다.

정읍의 류희진도 편지를 보내어 “옛 사람의 시에 만 가지 일을 충효를 떠나서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효는 한 가정의 일이지만 충이란 그 때를 만난 후에야 가히 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근래 우리나라 사태를 돌아보면 지금이 바로 충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탄알은 적고 병사는 50여명에 불과하며 곡식은 30여석 미만이니, 어떻게 널리 나머지를 찾아내어 만의 일이라도 보탤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9월 19일에는 영광의 이응종이 말 17마리, 소 4마리, 칼 4자루, 의병과 군량은 겨우 50여인과 40여 섬을 모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9월 20일에는 담양의 김언희가 편지로 말하기를 “중형(김언욱을 말함)이 이미 선조 임금을 모시고 떠나 외로이 남아 힘이 미약하여 뜻대로 잘 되지 않아 겨우 병사 70인과 쌀 21섬을 모았습니다.”하였다.

이어서 9월 21일 김성진이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병사 132인, 집안 하인 19명, 군량미 52섬, 콩 9섬, 창검 76자루를 모았습니다.”하였다. 김성진은 김홍우의 삼종 동생이다.

9월 23일에는 나주의 김부와 홍원 등이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집안 하인 17명, 의병 51인, 백미 32섬, 콩 7섬, 소 7마리, 말 4필, 창검 30여 자루를 모았습니다.”하였다.

9월 24일에는 무안의 윤황이 병사 72인, 곡식 25섬, 소 2마리, 말 9필 모았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9월 29일에 태인의 이수일도 편지를 보내어 “병사 52인, 군량미 22섬을 모았습니다. 의병과 군량미가 제공들의 큰 기대에 따르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이렇게 여러 읍에서 각 지역 책임자들이 의병과 곡식의 모집상황을 장성의병청에 알려 왔다.

9월 29일에 이응종은 영광 수성소에서 김경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병사는 얼마나 모았으며 군량은 얼마나 모았는지요. 그리고 반드시 이 병사들로 하여금 하나하나 조련하여 군오를 가다듬으시오.”하였다. 이응종, 과연 원로답다.

9월 30일에 김경수는 이응종의 건의에 따라 여러 고을에 서신을 보내 “모은 의병과 곡식은 항상 점검하고 조련하여 군오를 정비하시오.”하였다.

한편 10월 6일에 변이중이 소모어사로 남문에 전한 서신에 이르기를 “남문의 제군자들과 조동군이 서로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하였다.

변이중(1546~1611)은 임진왜란 중에 발명된 신무기 3가지 중 하나인 화차를 제작하여 1593년 2월 행주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546년에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菴)으로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문하에서 수업했다. 23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예조좌랑, 형조정랑, 함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변이중은 어천찰방으로 상소문을 올려 임금께서 조선에 머물며 국난을 극복할 것을 건의했다. 이후 변이중은 예조정랑․봉사시첨정으로 임명되었다가 10월에 윤두수의 추천에 의해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었다.

10월 6일은 변이중이 이제 막 소모사가 된 때였다. 당시에 전라도백성들은 극도로 피폐해 있어 전라도에서 군사와 양곡을 모으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변이중은 장성의병청이 의병 모집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관군을 모집하게 되니 서로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후 변이중은 장성 집에 들려 묵지도 않고 낮에는 군사병력을 점검하고 밤에는 길을 걸어 40여 일 동안 6천명에 달하는 군사를 모았다. 그리고 보면 관(官)의 힘은 참 대단하다.

10월 7일에 김홍우가 아우 김광우를 장성에 보내어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 편지에서 김홍우는 “남문에 모일 날짜를 미리 정하여 여러 고을에 두루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10월 8일에는 진눈개비 눈이 내렸고, 10월 10일에 눈이 비로소 개었다.

10월 12일에 김경수가 여러 고을에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이달 20일 도내 모든 부로(父老)들은 각기 모집한 의병과 모은 의곡을 인솔하여 남문 밖에 모여 왜적을 섬멸할 거사를 도모합시다.”하였다.

그러자 10월 14일에 이응종이 사람을 보내 서신을 전하였다. 이 서신에는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진퇴를 경솔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날짜를 조금 미루고 그 계획을 철저히 세워 추진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이응종은 영광군수 남궁현이 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자 영광수성에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수성 도별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이응종의 편지를 받은 김경수는 10월 16일에 다시 여러 고을에 서신을 보냈다. 이 편지에는 “남문에 모일 날짜를 11월 9일로 바꾸니 원컨대 여러 선비들은 이날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반하여 남문에 모여 그날 밤에 국가 중흥의 계책을 강구합시다.”하였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