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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라도 사민(士民)을 유시하는 선조의 교서가 행재소로부터 내려오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2회 전라도 사민(士民)을 유시하는 선조의 교서가 행재소로부터 내려오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9월 11일 전라도 사민(士民)을 유시하는 교서가 행재소로부터 내려왔다. 김경수, 김신남, 김중기, 박안동 등이 겨우 몇 줄을 읽고 울음소리와 눈물이 저절로 나와 차마 다시 읽지를 못했다.

이 교서는 선조가 7월 24일에 양산숙․곽현을 만난 후에 이들 편에 전라도와 경상도 사민에게 내린 글이다. 그런데 장성 의병들은 선조의 교서(敎書)를 교서가 내려진지 한 달 반 이후에야 읽은 것이다.

1592년 8월 1일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상이 유생 양산숙을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 2통을 내리다.

창의사 김천일 등이 유생 곽현․양산숙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인견(引見)하여 위유하며 공조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으로 그 대략에, “이광의 군사가 용인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과 함께 수원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나에게 이토록 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중략)” 하였다.

다른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으로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는데 끝부분에 이르기를, “(중략) 정인홍․김면․박성·곽율·조종도·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중략)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김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 등과 수원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중략)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군수로, 박성을 공조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하였다.【교서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면 선조가 전라도 사민에게 보낸 교서를 읽어 보자.

임금은 이렇게 말하노라.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존하여 살도록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는 인화(人和)를 잃고 한편으로는 왜적을 막는 일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와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신하와 백성(生靈)은 어육이 되었다. 아득한 저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서쪽과 남쪽이 멀리 떨어져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가, 이광의 군사가 용인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는 남쪽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곽현 등이 수륙을 거쳐 행재소에 와서 들으니 고경명ㆍ김천일등이 의병 수천명을 모집하여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함께 수원에 진주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나에게 어떻게 이와 같이 죽을 힘을 내는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조종(祖宗) 200년의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더욱 지극했기 때문이로다. 내 몹시 기뻐하여 즉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 군사와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노니, 너희들 갸륵한 군민(軍民)들은 내 말하는 뜻을 널리 알아주기 바라노라.

선조는 김천일이 보낸 양산숙과 곽현을 만나고 나서 무척 고무적인 모습이다. 남쪽에서 의병이 자진하여 일어났다 하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선조의 교서는 계속된다.

내가 즉위한 지 이제 25년이 되었다. 비록 어진 마음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통하지 못하였고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여 정사에 조치를 잘못함이 많았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일찍이 백성을 사랑하고 물정을 알려는 데에 뜻을 두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근년(近年)에 변방에 허술함이 많고 군정(軍政)이 해이했지만, 오직 성이 높고 못은 깊으며 갑옷이 견고하고 칼날이 예리하면 왜적을 막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여 안팎에 신칙(申勅)하여 엄하게 방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이 더욱 높을수록 나라 힘은 더욱 약해지고 못을 더욱 깊게 더욱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날로 깊어지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잎이 떨어지고 기왓장은 깨져서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도다. 더구나 궁중의 사람들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세세한 이익까지 탐하고 형옥이 중립을 잃어서 원망하는 기운이 화기(和氣)를 손상하였다.

형옥이 중립을 잃었다는 부분을 접하니 다시 기축옥사가 생각난다. 1589년부터 1591년 3년간의 정여립 역모사건의 후폭풍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당쟁과 향전(鄕戰)에 휩싸여 천 여 명이 화를 당하였다.

왕자(王子)들이 산택(山澤)의 이권을 독점하여 가난한 백성(小民)들이 생업을 잃어 원망하였다.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겠다. 이러한 일들을 내가 어찌 역시 다 알았으리요.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 역시 나의 죄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비록 뉘우친들 어떻게 하리오. 차라리 스스로 희생이 되어 천지, 종묘사직, 백신(百神)의 영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 생각이 이와 같으니, 바라건대 너희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도록 허락하기 바란다.

나의 잘못(失德)은 대략 이미 말했거니와 지금 당한 이 재난은 실로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미련한 저 오랑캐가 감히 하늘을 거역할 꾀를 내어 우리더러 반역에 편당(黨逆)이 되기를 요구하고, 우리더러 길을 빌려 달라고(假途) 요구해 왔지만, 나는 대의에 바탕을 두고 이를 배척하고 거절하였더니, 저들은 나의 큰 덕을 잊고 작은 원한을 나에게 풀려고 하였다. 나는 종묘사직이 망하고 신민(臣民)을 잠시 버리더라도 군신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보시고 있으니,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억울한 심정을 해와 별 앞에 내보여 위아래 신령들에게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고자 할 뿐이다.

이제 곤궁과 위축을 당하면서 명나라 조정에 달려가 호소하였더니 황제가 성스럽고 밝아서 나의 이 지극한 뜻을 살피고, 요동 총병관 조승훈을 보내어 유격장군(遊擊將軍) 등 병마 1만을 거느리고 평양까지 진격을 허락하여 기필코 경성까지 나아가 왜적을 소탕하기를 기약하니 명나라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사민들은 마땅히 분발해야 마땅하다. 나의 행전(行殿)이 비록 한구석에 궁박하게 있으나, 명나라에서는 또 호남과 절강 지방에서 왜적과 싸운 경험이 있는 6천명을 징발하여 금시에 압록강을 건널 것이며, 본도(평안도)의 병마도 또한 수만이니 다시 실패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너희 고경명 등이 이미 경기도에 이르렀으니 부디 기회를 보아 서로 힘을 합하여 경성을 수복하라. 금성(金城)과 평양을 점령하였던 적들도 이미 기세가 꺾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이 두 곳의 적들만 없앤다면 나머지 무리들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각 도가 모두 왜적의 노략질을 당하였으나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온전하니, 너희가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또 누구를 믿으랴. 군량이 모자라거든 경기와 호남의 창고에 있는 것은 너희 맘대로 가져다 먹고, 군기(軍器)를 다 썼거든 너희 맘대로 넉넉히 써서 각기 힘쓰도록 하라.

이제 고경명을 공조함의에 제수하여 초토사를 겸하고, 김천일을 장예원 판결사로 승진시켜 창의사를 겸하며, 박광옥 등 이하 사람들에게도 각각 차등있게 벼슬을 주노라.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는 벼슬이나 상을 바라지는 않겠지만, 내가 은혜를 베푸는 일은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마땅히 이를 받고 더욱 힘을 다하라.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을 보내어 충청ㆍ전라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나의 뜻을 선유(宣諭)하고 군무(軍務)를 총 감독하게 하노니, 너희들은 그의 절제(節制)를 받아서 각기 용감하게 싸우도록 하라.

나라의 운명이 험난하여 내가 이제 올 때 까지 다 왔으니 용만(龍灣) 한구석에서 내는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인가. 사람의 일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 데 국경(邊城)은 벌써 추워지는구나.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나의 일념이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노라. 이 교서가 이르거든 각기 신민들은 나의 뜻의 슬픔을 불쌍히 여김이 있으리라.

아!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도성을 수복하도록 기대하고, 날마다 장소(張所 : 주1)가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기를 바라노라. 가뭄에 비구름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서리와 이슬을 맞고 있는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모두 알도록 하라.

교서가 구구절절이 선조의 불쌍한 처지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의주의 한 모퉁이에서 벌써 가을 추위를 느끼는 선조의 심사가 참담하다. 언제 나라가 수복되어 선조는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려나.

이 교서는 오봉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 지은 것이다. 이호민은 고봉 기대승의 문인으로 문장이 뛰어나 왕명으로 각종 교서를 많이 지었다. 그의 문장은 기대승의 문장을 많이 본받은 것 같다.

김경수, 김신남, 김중기, 박안동 등은 선조가 내린 교서를 겨우 몇 줄 읽고서 울음소리와 눈물이 저절로 나와 차마 다시 읽지를 못했다. <난중잡록>에도 선조의 애통교서를 읽고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 멀리 서쪽 국경에 파천하시어 임금께서 몽진하시었는데 남방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는 이 몸이 이제 애통교서를 보니 어찌 슬픈 회포가 없으랴. “죄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것은 성덕의 겸손함이 지극하심이고, “다시는 남으로 바랄 수 없으니, 신정(新亭)에서 서로 만나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라.”는 말씀은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며,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그 말씀을 듣고 통곡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난중잡록에서>

주1) 선조의 교서 중 장소(張所)는 중국 송나라 고종(高宗) 때의 인물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그런데 <오산창의사 남문창의록>의 교서(p48)에는 당나라 때 장군인 장순(張巡)으로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부록 1) 선조수정실록 25년(1592년) 8월 1일 7번째 기사

상이 유생 양산숙을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 2통을 내리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인견(引見)하여 위유하며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으로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역시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아무리 뉘우친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하고,

또 이르기를, “나라의 운명이 험난하여 내가 이제 올 데까지 다 왔으니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는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734) 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735)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으로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는데 끝부분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左監司)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晋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 당했으므로 박진(朴晋)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양사준과 변응성은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본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晉州)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736) 이나 1여(旅)737) 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박성(朴惺)․곽율․조종도(趙宗道)․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무슨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

【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註] 이성(李晟) :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
[註] 장소(張所) :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
[註] 1성(成) : 사방 10리의 땅
[註] 1여(旅) : 5백 명의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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