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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조를 만난 양산숙, 팔로의거(八路義擧) 소식을 전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1회 선조를 만난 양산숙, 팔로의거(八路義擧) 소식을 전하다.

<남문일기>를 계속하여 읽어보자.

8월 23일에 금구의 송정춘이 군량 10섬과 정예병 35인과 함께 와서 합세하니 세력이 점점 커갔다.

송정춘은 김제시 금구면 출신이다. 장성 의병청에 이렇게 많은 정예병을 데리고 오다니 정말 의롭다.

8월 24일에 병력과 군량을 점검하니 병사가 239명이고 군량은 190섬 2말이 됐다.

8월 10일에 병사가 174인이고 곡식이 72섬 7말이었으니, 14일 동안에 의병은 65명, 곡식은 117섬 5말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병사 239명으로 왜군과 전투하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이다.

8월 26일에 양산숙이 와서 팔로의거(八路義擧) 소식을 전했다.

양산숙(梁山璹 1561~1593)은 의병장 김천일의 참모이다. 팔로의거 소식이란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충청도․함경도 등 전국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난 일을 말한다. 양산숙은 의주까지 가서 선조에게 의병의 일을 아뢰고 선조의 교서도 가져와서 전쟁 동향에 밝았다.

양산숙은 기묘사화로 희생된 개혁사림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손자이고, 대사성 송천 양응정(1519~1581)의 아들이다. 양응정은 말년에 나주에 살면서 아들들에게 머지않아 환난이 닥칠 것이니 병법 공부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 양산숙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세상이 평탄하지 못한 것을 보고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나주 삼향리에서 살았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숙은 형 산룡, 아우 산축과 함께 통곡하면서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나라가 이렇게 위태로우니 이제 저희 형제들은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합니다.”하였다.

이 때 어머니 박씨 부인은 “우리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 온 가문이다. 나라를 구하려다 죽으면, 죽을 자리에서 죽는 것이니 너희는 있는 힘을 다하라”하였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이다.

양산숙은 형 산룡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모집하여 나주의 김천일을 맹주로 모시고 거병하여 양산숙은 부장이 되고 양산룡은 운량장이 되었다.

1592년 6월 하순에 의병장 김천일은 경기도 수원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수원부사를 하였기에 의병이 많이 모이었고, 독성산성에서 기거하면서 전라병사 최원과 함께 금령(金嶺) 전투에서 왜적 15명을 베고 병기와 군마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부장 양산숙으로 하여금 의주로 가서 선조에게 의병활동을 전하도록 하였다. 양산숙은 곽현과 함께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길을 달려서 7월 중순에야 압록강근처 의주에 이르렀다. 드디어 양산숙 등은 선조를 알현한다.

양산숙은 엎드려서 통곡을 하고 왜적의 형세와 전라도와 경상도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 아뢰었다. 7월 24일자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양산숙과 곽현을 알현한 내용이 나와 있다.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를 가져온 곽현 등을 인견하여 전라도 의병 상황을 묻다.

창의사 김천일이 그의 막하 군사 양산숙․곽현 등에게 장계를 주어 행재소로 보내었다. 상이 곽현․양산숙 등을 인견하였다.

(도승지 유근, 가주서 강욱, 봉교 기자헌)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어느 곳으로 왔는가?” 하니,

곽현이 아뢰기를, “풍천(豊川)에서 삼화(三和) 큰 나루를 건너서 왔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험한 도로를 애써서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하니,

곽현 등이 울면서 아뢰기를, “소신들이 어려서부터 문(文)을 업으로 삼았으나 어느 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하여 평소에는 용안(龍顔)을 뵙지 못하였는데, 이제 난리 가운데에서 모시게 되었으니 신들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의병이 1천 명이라 하니 어찌 그렇게 적은가?”하니,

현이 아뢰기를, “신들이 여기에 온 뒤에 반드시 많은 군사가 모였을 것입니다. 또 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肪將) 등 정령(政令)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 까닭에 수령들이 따를 바를 모르고 있고, 장수된 자는 재물을 빼앗고 못살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기 때문에 군정(軍情)이 이반되어 있습니다. 이광(李洸)은 죽어도 남은 죄가 있고, 권율은 수령의 재주는 있으나 방백(方伯)의 지략은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까닭에 임명한 것이다.”하고, 또 이르기를, “왜적이 전라도는 침범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인가?” 하니,

곽현이 아뢰기를, “이는 천행입니다. 그러나 왜적이 힘을 합하여 공격할까 두렵습니다. 또 곽재우는 사인(士人)으로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근왕하려는 뜻은 있으나 반드시 공(功)을 바란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감히 오지 않는 것입니다. 곽재우의 공이 적지 않으니 글을 내려 권장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장수에게 말하여 경성을 수복하고 나를 맞이하여 돌아가도록 하게 하라.”하니,

곽현 등이 그칠 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상이 술을 내리고 또 약봉(藥封)도 하사하였다.

(선조실록 1592년 7월 24일)

<연려실기술>에도 양산숙과 곽현이 선조를 만난 기록이 적혀 있다.

유생(儒生) 곽현ㆍ양산숙을 보내어 바닷길로 가서 평안도에 들어가 글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쪽의 소식을 물었다. 양산숙 등이 김천일이 최원 등과 군사를 합쳐서 수원에 이르렀으며 고경명과 조헌도 또한 군사를 일으켰고, 영남에서도 또한 김면ㆍ정인홍ㆍ박성ㆍ곽재우가 있다는 것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변변치 못한 까닭으로 너희들이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적의 속으로 모험해 왔구나.” 하였다. 양산숙이 아뢰기를, “천일의 군사들 중에는 정예하고 용감한 자가 많기는 하나 태반은 유생들인데 다만 충성과 의리만을 의지하고 일어선 것이니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울며 이르기를, “충의가 격동하는 곳에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하였다.

곽현이 아뢰기를, “신이 평소에 조헌과 교분이 두터운데, 신의 거사할 무렵에 조헌이 말하기를, ‘요사이 천문(天文)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에 멸망할 운수가 없으니, 적도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조헌은 기축년(1589년) 역적의 변이 있을 줄을 알았으며, 신묘년(1591년)에는 나라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 일이 있으니 천문을 관찰한 것이 들어맞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잘 맞는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곽현과 양산숙 두 사람에게 상으로 벼슬을 주고 인하여 김천일ㆍ고경명ㆍ박광옥 등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등급을 따라 벼슬을 주고, 양산숙 등에게는 공조좌랑을 임명하였다.

양산숙의 이야기를 들은 선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남쪽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지금 너를 보고서야 옛 강산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을 알았구나.”하였다. 그러면서 선조 임금은 양산숙 등에게 술과 약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이어서 선조는 양산숙에게 공조좌랑 벼슬을 내리고 곽현에게는 사축서 사축(司畜署 司畜) 벼슬을 제수하였다. 의병장 김천일에게 창의사, 고경명에게 초토사를 각각 임명하고 곽재우 등에게도 벼슬을 내리면서 전라도와 경상도에 내리는 교서도 주었다.

임금의 환대를 받은 양산숙은 눈물을 흘리고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감격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천리 먼 길, 임을 뵙고 이내 속 모두 다 여쭙고
나직이 전하시는 임의 말씀도 내 들었네.
뼈에 사무친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목숨 바쳐 임의 은혜 갚을 때가 바로 지금이리.

양산숙은 다시 김천일의 진중으로 돌아와서 임금의 교서를 읽었다. 그 당시 김천일은 강화도에 머물고 있었다. 양산숙의 교서를 들은 의병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 그리고 죽기로 싸워서 왜적을 무찌르리라 다짐하였다.

양산숙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고경명과 박광옥에게 의주 행재소 소식을 전하였다. 이 때 고경명은 이미 금산전투에서 죽은 몸이었다. 선조가 고경명에게 내리는 벼슬을 받든 큰 아들 고종후를 비롯한 의병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랴.

이어서 양산숙은 장성에 와서 팔로의거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나는 것이 있다.

선조의 교서를 받아온 양산숙은 8월 26일에 장성의병청에 와서 왜 선조의 교서를 전달 안하였는지 하는 점이다. <남문일기>에는 김경수․김신남 등 장성의병들은 양산숙을 만난 지 15일 이후인 9월 11일에 선조의 교서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8월 29일에 김경수가 제공에게 이르기를 “외로운 군사로 적과 마주치는 것은 약한 고기를 호랑이에게 던져 주는 격이니 각자 고을에 돌아가서 널리 의사와 의곡을 모집하여 수만 인, 수만 섬이 되거든 그런 후에 적과 싸우는 것이 좋겠소.”하니, 제공이 그렇게 하기로 하고 각기 파하고 돌아갔다.

김경수는 8월 24일 현재 모인 병사가 239명이고 군량은 190섬 정도이니 이런 숫자로는 왜적과 싸우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어서 9월 10일에 김경수는 각 읍에 편지를 띄워 모집한 병사와 곡식이 얼마나 되는가 알아보았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