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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5) 서능 정려비와 모암서원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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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 (5)
–서능 정려비와 모암서원

몽계폭포에 있다는 하곡서실을 찾아 나선다. 몽계폭포는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정자동(鄭子洞) 마을 위에 있다. 정자동 마을 입구에 정자동이라고 새겨진 돌을 보았다. 뒤 부분을 보니 한학자 변시연 씨가 쓴 정자동 유래가 적혀 있다. 정자동은 하곡 정운룡이 강학한 곳이란다.

몽계폭포는 남창계곡의 입암산성 가는 곳에 있다. 폭포 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비가 와서 길도 미끄럽다. 폭포에서 하곡서실 흔적은 찾지 못하고 내려 왔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북일면 박산리에 있는 서능(徐稜) 정려비이다. 정운룡은 서능의 외손으로 그는 사암 박순에게 부탁하여 정려비문을 받았다. 절효공 서능은 고려 고종 때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로서 그의 효행은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 작동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학문에도 뛰어나 문하시중(門下侍中)이란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는 고향에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셨다.

먼저 서능 정려비 안내문을 읽어본다. 이 비는 1578년에 세워졌고, 1694년에 변휴 등이 중심이 되어 비각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윽고 정려비를 구경한다. 비각 들어가는 입구 위에 “고려시중절효서선생지비각(高麗侍中節孝徐先生之碑閣)”이라고 글씨가 써져 있다.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1636~1672)이 썼다.

비는 비각 안에 있는데 비문이 마모되어 글씨를 거의 읽을 수가 없다. 다시 비각 입구로 돌아와서 정려비문이 새겨진 비를 살펴본다. 여기에는 고려시중 절효선생 서공비명이 한자로 적혀있고 명문(銘文)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정려비는 1578년 5월에 세웠고 비문은 박순, 글씨는 백광훈이 썼다고 적혀있다.

박순은 대제학을 한 명재상이다. 1572년에 우의정에 올랐고, 1573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1579년에 영의정이 되어 1586년에 물러났다. 그리고 보니 정려비문은 정운룡의 부탁으로 그가 좌의정 시절에 지은 글이다.

비문 글씨를 쓴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이달, 최경창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알려진 인물로 호는 옥봉(玉峯)이고 장흥 출신이다. 그는 박순의 문인으로 양응정․노수신에게서도 수학하였다. 1572년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1577년에 선릉참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예빈시․소격서 참봉을 지냈다. 백광훈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서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그러면 박순이 지은 비명(碑銘)의 맨 마지막 부분인 명(銘)을 읽어보자.

오! 선생님.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 받드시니
유순하신 천성에 진실하신 그 모습 뵙는 듯하옵네.
어머니 병환에 약을 못 구해 하늘을 우러러 울고 계실 때
눈서리 흩날리니 온갖 벌레 땅 속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있었네.
지극하신 정성에 감동이 일어 하늘이 소원을 들어 주시니
비단 겉옷 불룩한 배 묘한 약제 참으로 신통하였네.
건강하게 장수하시며 기뻐하시는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가득하시니
하늘의 조화란 은미한 모양을 그 누가 눈치들 챘겠는가.
변치않은 오직 한마음 하늘이 또한 어김이 없었으니
아름답다 그 지순, 그 행적 너무나 우뚝하셨도다.
옛 모습 그대로의 온화한 마을 우뚝한 뒷산 질펀한 강물과 함께
훌륭하신 그 명예 영원히 떨치며 만고에 빛나리.

그런데 비문 전체를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씨 문중분으로부터 비문의 번역 글을 얻었다. 그 글을 여기에 옮긴다.

고려시중 절효선생 서공비명

효도란 인간으로써 가야할 큰 근본의 길이니 먼 옛날 융성했던 때 이래 공자가 바르게 사는 길을 정리한 때까지의 기록을 모두 훑어 보아도 효도로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서경(書經)에 나오는 군진(君陳)과 시경(詩經)의 장중(張仲) 단 두 사람 뿐 그 이후에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본받을 사람 찾기가 어려웠다.

마침 이 나라에 그런 분이 계시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 추앙하는 참다운 나라의 선사(善士)인 오성(鰲城) 서공(徐公) 바로 그 분이시다.

공의 휘는 능이요. 자는 대방이다. 약관에 대과에 등과하고 고려(高宗朝 安孝王) 때 벼슬하여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천성과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을 내놓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 모시기에만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는 어진 선비의 바른길을 위해 한가함을 택한 것이다.

어느 겨울날 어머니 목에 종창이 나서 의원(醫員)을 청해 보이니 의원의 말이 산개구리를 구하지 못하면 고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공이 이 한겨울에 어떻게 산개구리를 얻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목을 놓아 슬피우니 의원이 비록 산개구리를 구하지 못하지만 내가 다른 약재로 합제(合劑)하여 주겠으니 시험에 보자고 말하면서 다른 약을 지어 주었다.

이 약을 나무 아래에서 볶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물체가 나무 위에서 떨어져 약을 볶는 솥 안으로 들어갔다. 살펴보니 그것은 산개구리였다. 의원은 놀라「아들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이를 내렸으니 어머니 병은 반드시 나으실 것이다」고 말하면서 산개구리로 다시 약을 지어 환부에 붙이니 어머니 병환은 곧 나았다.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이곳에 정려를 세운지 수 백 년이 되건만 지금까지 원 모습대로 서 있어 이를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여 흐느껴 울며 어버이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여야 하는 도리를 일깨우니 이로 인해 백성의 뜻을 바로 세우며 인간의 도리를 바르게 가르침이 크도다.

아! 하늘의 일이란 소리도 냄새도 없으나 마음을 다하면 감응이 소리울림과 같이 조화를 굴리고 천기를 돌림에 이르게 되니 이런 조화를 우리 절효공 선생에게서 볼 수 있구나.

공께서는 거가십훈(居家十訓)을 지었는데 실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글을 더 보완하고 있으니 배우는 바가 바르고 크도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단지 그 효행만 기록하고 미쳐 학문을 기록하지 못했으니 그의 참모습이 감추어진 아쉬움이 남으나 오직 후덕에 힘쓸 뿐 세상의 속됨을 초월하심이 아니겠는가.

공의 15세손 전(荃)이 말하기를 정의를 지키고 효도를 생각하여 가풍을 바꾸지 아니하였으나 세월이 더 가면 휼륭하신 말씀이 혹시 인멸될까 걱정이라면서 돌을 깎아 말씀을 새겨 이를 옛 마을에 세워 무궁토록 보존키를 원하여 내개 비명을 부탁하니 나는 이미 서공의 덕을 경모하였고 또한 전(荃)의 선조를 모시는 정성이 아름답기에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이 글을 지으며 이렇게 새기노라.

대광보국숭록대부영중추부사겸경연사 박순 지음
종사랑 정릉참봉 백광훈 글씨 씀

다음으로 가는 곳은 모암서원이다. 모암서원은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에 있다. 지금은 모암서원은 없고 칠현 유적지만 남아 있다. 절효공 서능을 비롯한 조영규․조정로 부자, 최학령․정운룡․김우급․박수량 등 칠현의 비만 있다. 원래 모암서원은 서능이 공부를 가르치던 강학소로서 모암정사(慕巖精舍)라고 불렀다.

이 정사가 서원이 된 것은 1587년에 장성현감 이계와 하곡 정운룡 등 지방 유림들이 절효공의 효행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삼면 모암리에 사당과 강당을 건립한데서 비롯된다.

유적지에는 모암서원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2006년에 서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거기에 소개된 정운룡의 행적을 보면, “정운룡은 하동정씨로 초년에 역적 정여립과 서로 알고 지내다가 그 흉악함을 지켜보시고 절교하자는 글을 지어 보내고 절교하였다. 후에 특별히 왕자사부에 발탁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정운룡은 1593년 5월에 고창현감으로 근무하다가 순직한다. 전쟁이 한창인 때라서 너무 과로하였을까. 정운룡은 전 부인 이씨에게서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죽고, 두 딸은 군수 장홍록, 선비 김극순에게 출가를 하였다. 김극순은 오천 김경수의 차남이다. 그리고 보니 정운룡과 김경수는 사돈 간이다.

1610년에 광해군은 그의 사부인 정운룡을 추증하고 치제문을 지어 보내었다. 광해군 일기에는 정운룡에 대한 증직 기록이 있다.

잠저시의 사부 하락, 박광전 등에게 증직하고 삼가 현감 윤영현은 승진토록 하다.

전교하였다. “내가 잠저 시의 사부 중에 고인이 된 하락(河洛)․박광전(朴光前)․성호(成浩)․민응기(閔應麒)․정운룡(鄭雲龍)․권우(權宇) 등에게 각기 원래에 받은 직책 위에 당상의 실직을 제수하고, 이곽에게는 찬성을 추증하되, 각기 교서를 만들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라. 삼가현감 윤영현은 승진시켜 서용하도록 하라.”

(광해 2년(1610년) 5월 19일 3번째 기사)

그러면 광해군이 정운룡을 기리는 치제문을 읽어보자.

왕이 이르기를, 아! 학문은 반드시 어진 사부가 있어야 하고 덕이 성취되려면 잘 이끌어주는 이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진 사부, 잘 이끌어주신 이의 은혜를 어찌 감히 사생을 달리하였다 하여 잊을 수 있으랴. 덕을 숭상하고 공을 보답하는 은전을 오늘 와서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다. 영령께서는 남쪽 지방에서 털고 일어나 강연(講筵)에서 교류했는데 학문에 연원이 있었고 도는 정주(程朱)를 숭상하였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 어리석음을 깨우쳐준 많은 힘을 입고 결국 성취의 효과를 보았으니 그 모두가 인도해준 공로가 아니던가. 내가 즉위했을 때는 그대 이미 멀리 가버려 가신 어진 스승 뒤 쫒아 못가고 옛날 배우던 곳에 사람이 없네. 덕을 숭배하고 공로를 보답하려 해도 내 어디에다 베풀 것인가. 유명(幽明)이 비록 다르다지만 영령이야 계실 것이기에 벼슬을 올려 추증하고 이어 제례를 행하게 했다오.

아! 종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정을 표하는 것 그게 바로 현자를 사모하는 정성이며, 관원을 보내 관작을 추증하는 것은 영원히 스승을 존경하는 뜻이 담긴 은전이외다. 영령이여! 계신다면 당연히 이 자리에 와주리라고 생각합니다.

1689년에 정운룡 행장을 지은 기정익은 행장 말미에 하곡 정운룡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아! 세상이 말세라서 비록 아름다운 바탕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라도 학문에 뜻을 둔 자는 어쩐지 적고 또 비록 학문을 한다고 해도 그 힘을 얻은 이는 더욱 드문데, 선생 같은 이는 말 많은 계모 오만한 아우에게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교제하는 상대의 귀천에 관계없이 자기 할 도리를 지켰으며 선견지명으로 세상을 속여 온 역적과 절교를 했고 우국충절로 국가를 저버린 간교한 자를 배척했으니 이러한 분이라면 그는 들으면 들은 대로 금방 행동으로 옮겼다고 한 자로(子路) 같은 분이라고 하겠다.

이제 하곡 정운룡에 대한 답사를 마친다. 장성의 큰 선비 정운룡을 알게 된 것은 필자에게는 큰 행운이다.

<참고문헌>
o 정운룡, <하곡집>, <개천정사지>
o 장성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성사람들, 2013
o 김세곤, 청백리 박수량, 온새미로, 2012

김세곤 (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하곡 서실도
2. 서능 정려비각
3. 박순의 서능 정려비문

(부록 1) 절효공 서능 정려비문

高麗侍中節孝先生徐公碑銘
孝者人道之大經自隆古以來見於孔子刪正之書以爲法者兩人在書曰 君陳在詩曰 張仲降及後世鳴呼歁矣今有人焉一國之人皆稱之爲孝子則固一國之善士若 鰲城徐公殆其人歟 公諱稜 字大方 弱冠擢大科仕 高麗安孝王之朝 官至侍中 天性至孝 解官歸家專心奉母是猶安仁賦閒居之意也 母發項疽迎醫視之醫曰 若不得生蛙不可治公曰 當此沍寒豈得生蛙母疾殆不可爲己號泣不己醫曰 雖無生蛙可姑合藥而 試之遂煞藥于樹下忽有物從 樹上墮鼎中視之乃生蛙也 醫警曰 子之誠孝格天天卽賜之母疾必瘳於是更爲劑合貼患處立愈事間旋閭 迄今數百載猶不廢見之者莫不咨嗟感涕知事親之必盡誠其激立民志裨補風敎亦 如何哉鳴呼上天之載 本無聲臭之可求玆心能一則感應如響至於斡造化而回天機吾於 節孝公見之公著居家十訓實羽翼乎 呂氏鄕約之書其所學之正又如此然國史所傳只記其孝而不及於 學豈非韜眞悔光惟務自厚而流俗不知之故歟公十五世孫曰 荃服義思孝無替家風懼 歲月滋久德音或湮願斲堅石假辭紀美建諸 舊閭之上以圖不朽於無窮屬余銘之余旣慕 徐公之德且嘉荃之眷懇不以鄙絀辭遂爲之 銘曰
於休先生 盡孝承親 非性之揉 實出愈眞 母疾無藥 號天而泣 霜雪旣降 坏戶咸蟄 有誠必感 天貺斯申 錦襖皤腹 妙劑通神 壽康而悅 慈顔復春 玄造冥冥 孰識其機 秉心無二 天亦不違 懿乎其純 卓乎所履 故里不改 山崔水瀰 今聞永振 吁 嗟曷己
萬曆 六年 五月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使兼領經筵事 朴淳 撰
從仕郞 靖陵參奉 白光勳 書

(부록 2) <신증동국여지승람>
장성현 편에 나와 있는 서능의 효행 기록
【효자】고려 서능(徐稜), 고려 때 사람인데, 벼슬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목에 종기가 나서, 서능이 의원을 청하자 와서 보고 “살아있는 개구리를 얻지 못하면 목숨을 건질 수 없다.” 하였다. 서능이, “때가 섣달이니, 어떻게 살아있는 개구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병환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슬피 울었다. 얼마 후에 의원이, “산 개구리가 없더라도 약을 만들어 보자.” 하여, 나무 아래에서 약을 달이는데, 갑자기 약탕관 안으로 떨어지는 물건이 있어서 보니, 곧 살아있는 개구리였다. 의원이 놀라서, “아들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바로 내려준 것이니, 어머니의 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다.” 하고, 약에 합하여 종기가 난 곳에 붙이니 곧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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