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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4) 개천정사에서 정여립 역모사건을 생각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9회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 (4)
- 개천정사에서 정여립 역모사건을 생각하다.

정여립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은 1587년에 왜변이 일어날 때에 전주부윤 남언경의 부탁으로 손죽도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친 일이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에서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남언경이 미숙하여 조처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정여립에게 청하였더니, 정여립이 사양하지 않고 담당하여 한 번 호령을 내리자 많은 군사가 일시에 다 모여서 하루가 못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를 보면 정여립은 병법과 무예, 인원 동원 등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만큼 그는 학문과 무예 그리고 잡술에 능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 사건 이후 정여립은 더욱 권세가 치성해져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행여 뒤질세라 다투어 문하(門下)에 들어가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조정에서도 그를 찬양하였으므로 그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정여립은 남의 재물을 함부로 강탈하여 땅을 넓혔다. 고을 수령들에게도 재물을 요청하였다가 조금만 마음에 차지 않으면 곧 대관에게 부탁하여 공격하고 모함하니, 복종하는 사람들이 문을 메웠고 물자들이 수북이 쌓이었다. 정여립에게 밉보이어 불이익을 당한 경우가 태인의 무과 출신 백광언(白光彦)이다. 그는 용맹하고 과감하기로 소문이 났다. 여립이 곡진한 뜻으로 그와 사귀기를 원하였으나 광언이 사절하고 만나주지 않자 여립이 대관(臺官)에게 부탁하여 고성과 진해 두 고을의 수령 임명을 논핵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그리하여 전라도의 수령들은 정여립 눈치 보기에 급급하였다. 당시 장성현감 이계가 정운룡에게 정여립이 누구인지 물어 본 것도 이런 상황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정여립의 위세가 큼에도 불구하고 정여립과 교제를 끊은 사람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정란과 김대수․백광훈이 그들이다. 이는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전주에 사는 이정란은 여립과 선대부터 교분이 있고 재종형제간이었다. 두 사람은 이웃에서 살았으나 그는 지절(志節)이 있어 스스로 자립하여 여립에게 굽히지 않았으므로 여립이 그를 원수처럼 보았고 정란 또한 항상 그의 악을 면대하여 지척하였다. 여립이 몹시 미워하여 당로자(當路者)에게 그를 참소하여 탄핵이 서로 잇따라 작은 고을 말단 관직에도 오래 있지 못하였으나 정란은 개의하지 않았다.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오직 이정란 만은 옥에 들어갔다가 방면되었다. 나중에 이정란은 임진왜란 때 전주성을 지킨 의병장이었다.

또 장성 남문 창의에 참여한 태인의 김대립은 정여립의 처족인데 여립과 반나절 정도 걸리는 곳에 살았다. 김대립이 일찍이 시냇가에 조그만 정자 호호정(浩浩亭)을 지었는데, 여립이 그 정자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서원을 짓자 김대립이 곧 정자를 헐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립이 말하기를, “그 사람과 가까운 거리에서는 서로 사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대립의 조카 중에 송간(宋侃)이라는 무인이 있었는데, 여립이 만나기를 여러 번 청하므로 송간이 여립을 만났다. 그런데 정여립이 지함두 외에 승려 4, 5명과 함께 밤낮으로 같이 지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크게 놀라 돌아와서 은밀히 대립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저씨가 정자 허무는 것을 너무 과도한 일로 알았더니,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아저씨의 격식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하였다.

또 삼당시인인 옥봉 백광훈은 영암출신으로 그 아들 백진남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살았는데, 여립이 진남의 영특하고 준수함을 보고 자기 집에 머물러 글 배우기를 청하였더니, 광훈이 길이 멀다고 사양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광훈이 말하기를, “스승과 제자를 가리는데는 그 처음에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아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정은 군정이 문란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으며 흉년이 일어났고 도적들도 출몰했다. 이런 사회적 불안을 읽은 정여립은 황해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반란을 도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은밀하게 반란을 준비하던 정여립은 1589년에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서둘러 거사하기로 한다. 즉 겨울을 기하여서 서(황해도)ㆍ남(전라도) 지방에서 일제히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쳐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선조는 정여립 일당의 체포명령을 내렸고 결국 정여립은 자살하였다. 이후 그의 시체를 한양의 군기시 앞에서 다시 능지처참시키었다. 선조는 “반역자 정여립은 뱀과 살무사보다 더 독하다. 난적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랴마는 이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하면서 그의 아들과 관련자를 처형하고 집안을 멸문시킴으로서 이 사건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10월 28일에 호남 유생 양천회의 상소가 불을 다시 지피었다. 이제는 기축옥사라는 후폭풍이 일어난다. 양천회는 이발․이길․백유양․정언신․정언지 등이 정여립과 관련이 있으므로 죄주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동인으로서 특히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 사건을 수사를 맡은 책임자인 위관이었다.

선조는 11월 8일에 서인의 거두 정철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위관을 맡긴다. 정언신은 파직되고 이제 사건은 단순 역모사건에서 사림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번지고 서인은 정여립 사건을 이용하여 동인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동인측은 그 주동자가 바로 정철과 송익필이라고 강력 비판하고 있다.

12월 12일에 낙안향교 유생 선홍복은 초사에서 이발․이길․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관련되어 있다고 자백하였고, 12월 14일에 전라도 유생 정암수 등 50명은 광주향교에서 모여 소를 작성하여 한효순․정언신․유성룡․정개청 등 상당수의 인물들이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동인이었다. 선조는 이 상소를 보고 무척 화를 냈다. 그리하여 상소를 올린 주동자 10여명을 국문에 처하도록 엄명하였다.

“진사 정암수 등이 국가의 역변(逆變)을 이용하여 감히 무함하는 술책을 써서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고 사휼(邪譎)의 소(疏)를 올려 현상명경(賢相名卿)을 모조리 지척(指斥)하여 온 나라가 텅 빈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그 속셈을 따져 보면 장차 어찌하려는 것인가. 그 흉참(兇摻)한 양상이 더욱 해괴하다. 이는 반드시 간인(奸人)의 사주를 받은 것이 단연 의심이 없으니, 잡아들여 추국하고 율에 따라 죄를 적용하라.”

그런데 성균관 유생과 사간원․사헌부 양사가 처벌하지 말라고 소를 올리자 선조는 12월 27일에 이들을 풀어주었다.

한편 상소문에 기록된 이발․이길․정언신․백유양 등은 모두 국문을 받고 유배에 처해졌다. 이후 최영경이 길삼봉으로 누명이 씌워지고, 정개청과 조대중 등 전라도 선비들이 무참하게 처벌을 당한다. 이 당시 숙청된 인사는 천 여 명에 달하였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동인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고 해서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구선, 조선의 메멘토모리, p 77)

1591년 5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3년간 옥사가 계속되자 인심이 원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589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이발․이길․백유양․유덕수․조대중․유몽정․김빙은 장(杖)형으로 죽었고, 윤기신․정개청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길에서 죽었으며, 최영경은 옥사하였다.】연좌되어 유배된 자가 몇 백 명 이었는데 조신 가운데 귀양 간 자로는 정언신․김우옹․홍종록 등이었으며, 파출(罷黜)된 자도 수십 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옥사가 일어난 초기에 결정된 자들이다. 3년이 지나서야 옥사가 그쳤는데, 이 때문에 인심이 원망하였다.

한편 신병주 교수는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에서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을 반역자인가? 혁명아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개천정사에서 정여립 역모사건 즉 기축옥사를 살펴보면서 마음이 착잡하여 진다.

이제 개천정사를 뒤로 하고 정운룡 생가로 간다. 정운룡 생가는 북일면 오산리 바로 뒤편인 북일면 성덕리 사동마을이다. 지금은 망암 변이중 후손이 집 주인이다.

이어서 묘소로 간다. 묘소는 서삼면 모암리에 있다. 하곡의 묘소는 단촐하다. 묘비에는 “하곡 정선생 지묘, 숙부인 함평이씨 부좌”라고 적혀 있다.

하곡 정운룡. 그는 세상을 바르게 살고자 하는 곧은 선비였다.

<참고문헌>
o 신병주 지음,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o 정구선, 조선의 메멘토모리, 애플북스, 2010
o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 가람기획, 2000
o 이종범, 사림열전 1, 아침이슬, 2006
o 조선왕조실록
o 연려실기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D/B
o 오산창의사,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1997
o (재)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기축옥사 재조명, 2009
o 안방준 저 ․ 안동교 역주, 국역 은봉전서, 2001
o 정운룡, <하곡집> <개천정사지>

김세곤 (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부록 1> 정운룡 관련 조선왕조실록

1. 선수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萬曆) 17년) 10월 1일(을해) 5번째 기사

장성(長城) 사인(士人) 정운룡(鄭雲龍)이 처음에는 여립과 교유하였으나 그의 소위를 보고 깜짝 놀라 장성현감 이계(李啓)에게 말하여 상변(上變)하려 하였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여립에게 편지를 보내 다른 일을 의탁해서 그를 끊어버린 다음 경기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2. 선수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萬曆) 17년) 10월 1일(을해) 7번째 기사

정여립의 시체를 군기시 앞에서 추형케 하다.

호남의 풍속이 진취(進取)하기를 좋아하고 거취(去就)를 가볍게 여기므로 사자(士子)가 더러움에 오염되어 풍습이 크게 훼손되었다. 예컨대 오희길(吳希吉)․정운룡(鄭雲龍)은 처음에는 그와 사귀다가 뒤에 편지를 보내어 끊어버렸고, 그 나머지는 신중히 피했을 뿐이었다. 이때에 크게 연루되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오직 이정란(李廷鸞)만은 옥에 들어갔다가 방면되었다. 여립의 아내와 첩은 모두 고문받아 죽었으나 애복은 실정을 간절히 호소하니 상이 특별히 용서하였다.

<부록 2> 연려실 기술에 기록된 정운룡 관련 글

○ 장성(長城)에 사는 진사 정운룡은 그 고을에서 행실이 착하며 이름이 있었다. 장성 현감 이계가 선비들을 가르치려고 학교를 세우고 운룡을 청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립이 이계에게 편지로 자기 집에서 쓸 제수(祭需)물자를 요구하고, 또 다른 여러 고을에도 두루 이와 같이 요구하였다. 이에 이계가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과 단 하루도 사귀어 본 일이 없는 터인데 어찌 편지로 물품 수량까지 정해서 요구하는 것인가. 마치 상관이 하관에게 호령하듯이 하였다.” 하고, 회답도 하지 않고, 그 편지를 운룡에게 보이니, 운룡이 말하기를, “이발(李潑)의 형제가 이 사람이 학문이 넉넉하다고 칭찬하므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근간에 들으니 그가 집을 다스리고 처사함에 있어 흉하고 간사한 것이 많다고 하더니, 지금 이 편지로 더욱 잘 알겠다. 이런 사람을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뒤에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다.” 하고, 즉시 이발에게까지 아울러 교분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임금이 그 절교 편지를 보고 포장(褒獎)하는 말을 내리고, 특별히 왕자 사부(王子師傅)를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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