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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3) 개천정사에서 정여립 역모사건을 생각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8회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3)
- 개천정사에서 정여립 역모사건을 생각하다.

개천정사에서 정운룡과 이계 그리고 정여립에 대하여 생각한다. 정운룡은 장성현감 이계와도 친분을 쌓았다. 이계는 정운룡을 훈장으로 삼아 개천정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587년 모암서원 건립도 지원하였다. 정운룡과 장성현감 이계와의 인연은 1589년 10월에 반역사건의 주동자인 정여립(鄭汝立 1546~1589)과도 관련이 있었다.

먼저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를 읽어 보자.

정운룡은 일찍부터 정여립과도 잘 아는 사이였으나 나중에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속임수가 많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는 정여립이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런데 정여립이 이발을 만나려고 개천을 지나면서 그를 찾았다. 그때 정운룡은 피해 버리고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정여립이 화를 내며 돌아가자 정운룡은 즉시 절교서(絶交書)를 정여립에게 보내 이르기를 “처음에는 학문이 깊다하여 사람들이 추앙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당신의 행실이 바르지 않다하니 영원히 절교한다.” 하였다.

장성현감 이계가 정운룡에게 묻기를 “나는 정여립을 모릅니다. 공이 서신을 보내 정여립의 못됨을 꾸짖었다고 하는데 정여립은 어떤 사람인지요?”하였다. 정운룡이 말하기를 “정여립이 앞으로 바르게 죽지 못할 터이니 내가 그 화를 피하고자 하나 마땅한 곳이 없으니 용인에 있는 현감의 별장을 빌려 달라.”하였다. 장성현감은 아들 월사 이정구와 논의하여 빌려주게 되었다.

그 후 정여립은 처벌되었으며 선조임금이 정여립의 서적을 검열하다가 정운룡이 쓴 절교서를 보고는 그의 선견지명을 가상히 여겨 왕자사부(王子師傅)로 특배하였다.

이를 보면 정여립이 이곳 개천정사를 찾아왔고 정운룡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으며 이후 절교서를 보낸 것이다.

또한 조선의 역대 임금들의 정치 활동 가운데서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뽑아 적은 편년체의 역사책인, <국조보감(國朝寶鑑)> 제30권 선조 22년(1589년) 11월의 기록에도 정운룡과 이계 그리고 정여립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진사 정운룡은 장성 사람인데 향리에서 조행이 있었다. 이때 현감 이계가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가르쳤는데 운룡을 초빙하여 선생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립이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어 제수(祭需)를 요구하였는데 열읍에 두루 미쳤다.

이계가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과는 하루의 교분도 없는데 어찌하여 서찰을 보내어 요구하면서 수량을 정하여 징수하기를 마치 상사(上司)가 호령하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답하지 아니하였다. 운룡이 여립과 서로 알고 있음을 알고 그 서찰을 보이니,

운룡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학식이 넓고 이발 형제가 자주 칭찬하였기 때문에 한두 차례 만났다. 요즘 듣건대, 가정생활의 처사가 흉악하고 간사한 정상이 많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서찰을 보니 더욱 증험이 된다. 이 사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후일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찰을 보내어 이발도 함께 끊어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그가 절교한 서찰을 수색해 보고 나서 하교하여 칭찬하고 특별히 왕자사부에 임명하였다.

국조보감의 이야기는 1589년 12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오희길을 참봉에 제수하다. 이조에 전교하기를,

“고창(高敞)에 거주하는 충의위(忠義衛) 오희길이 1587년 정해년 무렵에 간당(奸黨)이 우글거리고 사설(邪說)이 난무하여 이이와 성혼이 그들의 배척을 당할 적에 조정에서도 이이와 성혼을 구제하고 정여립을 배척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희길이 이때에 역괴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이와 성혼을 추존(推尊)하고 역적의 심술을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라.”하였다. 이에 참봉을 제수하였다.

희길이 소장을 올려 ‘자신이 역당(逆黨)에 물들었으므로 감히 사적(仕籍)에 들어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답하기를, “역적이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도둑질할 적에 누구인들 추허(推許)하지 않았겠는가. 그대가 그의 문하에 출입한 것은 또한 괴이한 것이 아니다. 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도 빌붙지 아니하고 홀로 시비(是非)의 정도를 지켜 궤특(詭慝)한 정상을 바로 지척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그대의 허물을 특별히 용서하고 그대의 마음을 깊이 사게 된 까닭이다. 옛 사람이 선비를 취하는 방도는 하나뿐이 아니었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다하도록 하라.”하였다.

【당시 희길이 이미 역적의 문인이 되었으나 절교한 서찰 때문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도 다행이었기 때문에 희길이 사직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기축년의 사류가 패배하여 물러가게 되어서는 희길을 그때의 인물이라 하여 폐기하고 수용(收用)하지 않았다.】

진사 정운룡은 장성(長城) 사람으로 향리에서 조행이 있었다. 이때 현감 이계(李溎)가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가르쳤는데 운룡을 초빙하여 사장(師長)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립이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어 제수(祭需)를 요구하였는데 열읍에 두루 미쳤다.
이계가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과는 하루의 교분도 없는데 어찌하여 서찰을 보내어 요구하면서 수량을 정하여 징수하기를 마치 상사(上司)가 호령하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호기를 부려 사람을 능멸함이 이와 같으니 필시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답하지 아니하였다.

운룡이 여립과 서로 알고 있음을 알고 그 서찰을 보이니, 운룡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학식이 넓고 이발 형제가 자주 칭찬하므로 한두 차례 만났다. 요즘 듣건대, 가정 생활의 처사가 흉악하고 궤사(詭詐)한 정상이 많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서찰을 보니 더욱 증험이 된다. 이 사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후일의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찰을 보내어 이발도 함께 끊어버렸다. 얼마 못가서 운룡이, 정여립이 대중을 모으는 형편을 탐지해 알고 그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으로 여기고는 자신의 가족은 이계에게 위탁하고 자신은 경기로 돌아와서 피하였다. 이에 이르러 상이 그가 절교한 서찰을 수색해 보고 나서 하교하여 포장(褒奬)하고 특별히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하였다.

이계 또한 학식이 넓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였다. 벼슬은 삼등 현령(三登縣令 평안도 고을)에 그쳤다. 아들 이정구(李廷龜)는 명신이 되었다.

(선수 23권, 22년(1589 기축 년) 12월 1일 14번 째 기사)

그러면 여기에서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하여 알아보자.

1589년(선조 22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연명으로 자기에게 보고한 역모사건을 선조에게 비밀 서장으로 올린다. 그 내용은, 수찬을 지낸 전주에 사는 정여립이 모반하였다는 것이다.

이 날 밤 선조는 삼정승과 육승지 등을 비상 대책회의를 연다. 즉시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급파하였다.

그런데 정여립은 이 사실을 미리 부하로부터 듣고 전라도 진안군 죽도(竹島)로 달아났다. 마침내 진안현감 민인백은 그를 체포하려하자 정여립은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을 때 그 소리가 마치 소 울음소리 같았다고 한다.

그러면 정여립은 누구인가? 정여립 역모사건에 관한 기록은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연려실기술>, <은봉전서> 등 여러 곳에 실려 있다.

정여립은 전주 출신으로 첨정을 지낸 정희증의 아들로 전주 남문에서 살았다. 처음 정여립을 잉태할 때에 정희증의 꿈에 고려의 역신 정중부(鄭仲夫)가 나타났는데, 출산하는 날 밤이 되자 또 정중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이 정희증에게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였으나 희증은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집안 식구들만은 그 뜻을 알았다.

정여립이 장성하게 되자 체구가 장중하고 얼굴빛이 청적색(靑赤色)이었다. 나이 7~8세에 여러 아이들과 장난하고 놀면서 칼로 까치 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도막내었다. 정희증이 누가 한 짓이냐고 꾸짖으며 묻자 그의 집 어린 여종이 여립을 가리켰는데 그날 밤 정여립이 그 아이의 부모가 이웃집에 간 틈을 타서 칼을 가지고 몰래 들어가 그 아이를 칼로 배를 갈라 죽였다.

그 부모가 돌아와서 보니 자리에 피가 가득하고 아이는 죽어 있었다.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니 온 마을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때 여립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나오면서 태연하게 “이 아이가 나를 일러 바쳤으므로 내가 죽였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어떤 사람은 “악장군(惡將軍)이 났다.”고 수군댔다.

정여립은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156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 등의 요직을 거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여기에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후원이 컸다.

그런데 막상 본격적인 관직활동을 하면서는 동인의 이발 등과 친하였다. 특히 율곡 이이가 1584년에 별세한 후에는 그는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 성혼, 박순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서인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비판하였다.

선조 임금은 이러한 정여립을 배은망덕자로 혹평하고 시골로 쫒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호남일대에 기반이 탄탄하였다.

정여립은 기백이 굉장하고 말솜씨가 좋아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말이 옳고 그른 것은 불문하고 좌석에 있는 이들이 칭찬하고 탄복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요.” 하고 또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기 아니한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에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柳下惠)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정여립은 학문을 강론한다고 핑계대고 무뢰한을 불러 모았는데 무사ㆍ승려들이 그 중에 섞여 있었다. 정여립은 잡술에도 밝아 풍수지리와 음양오행 등에 대한 서적을 중국에서 가져다가 무리들과 강론하였고, 장차 나라에 변이 일어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기회를 타서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진안의 죽도에서 서재를 짓고 강론을 하는 등 활동을 하면서 인근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대동계는 신분의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하여 전주ㆍ금구ㆍ태인 등 이웃 고을 무사들과 노비 등이 구름같이 모였다. 이들은 매월 보름마다 무술 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또 황해도는 예전에 임꺽정(林巨正)의 난도 있었으므로 그곳 안악사람 변숭복ㆍ박연령과 해주사람 지함두 등과 비밀히 사귀어 결탁하였고 대동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