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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2)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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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2)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이미지 1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2)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이미지 2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2)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이미지 3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2)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이미지 4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2)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이미지 5
제17회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 (2)
–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9월 중순에 다시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 개천정사를 찾았다. 이번에는 장성군청의 강대익 계장, 향토사학자 공영갑님, 그리고 하곡 정운룡 문중 분 2명과 함께 답사를 하였다.

비가 부슬거리는 날에 장성군 북일면 월계리 오정(鰲亭)마을의 개천정사에서 들판을 보니 푸근하다. 이윽고 개천정사 방에 걸려 있는 여러 편액들을 하나하나씩 자세히 살펴본다.

거기에는 <하곡초당기>, <개천정사 중건기> 그리고 정운룡이 쓴 시, 제봉 고경명 ․ 월사 이정구의 7언 율시, 사암 박순의 시, 그리고 오봉 김제민의 시가 적힌 편액이 있다. 또한 경호 조집, 명래 조정재, 장성현감 이의록, 정읍군수 이양신의 시가 적힌 편액도 있다.

<하곡초당기>를 읽어보니 ‘8월 5일 장성 정참봉 운룡이 찾아와서 하루 밤 자면서 정군이 승지를 얻었다 하는데 운운’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보니 이 기(記)는 우계 성혼이 1581년 8월 5일 일기에 적었다는 장성 몽계폭포 근처의 하곡서실에 대한 설명이다.

<개천정사 중건기>는 개천정사를 다시 지었다는 글인데 이 글의 원문은 공영갑님이 가져온 <하곡집>과 <개천정사지>에 실려 있다. 그러면 먼저 하곡 정운룡이 지었다는 시부터 감상하자.

밝게 빛나는 달은 천지에 가득한데
인간의 밤은 아직도 중간이네.
일어나서 송죽의 그림자를 바라보니
푸르고 푸른 빛이 연못에 가득하네.

皓月盈天地(호월영천지)
人間夜未央(인간야미앙)
起看松竹影(기간송죽영)
蒼翠滿池塘(창취만지당)

마치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시중유화(詩中有畵)!

<하곡집>에는 이 시의 제목이 ‘모양(牟陽) 청절당(淸節堂) 牟陽高敞別號也 淸節堂卽先生所庭也 모양은 고창의 별호이고 청절당은 선생의 뜰이다.)’으로 되어 있다. 모양성(牟陽城)은 고창읍성의 옛 이름이다. 정운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창현감에 재임 중이었다. 그는 고창읍성 안 동헌 청절당에서 지내면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하곡집>에는 하곡 정운룡이 지은 시가 단 2수만 실려 있다. 정운룡도 여러 수의 시를 썼을 것인데, 시가 두 수만 남이 있는 것은 정유재란 등 난리를 겪으면서 글들이 유실되었으리라. 하기야 조선 중기 명문장가 월사 이정구(1564~1635)도 임진왜란 때 지은 시는 한 수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의 행장에 적혀있다.

이어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지은 7언 율시를 감상한다. 시의 제목은 개천초당(介川草堂)이다.

초복이 그대가 초당 지을 뜻을 알고
풀 띠 집을 폭포 서쪽 머리에 자리 잡았네.
연이어 푸른 경치 문호에 비춰 개이니
향기로운 풀 소매에 가득 담고 석양 물가로 모으네.

初腹知君着意修(초복지군착의수)
林屋爲卜瀼西頭(임옥위복양서두)
連空紫翠晴當戶(연공자취청당호)
滿袖蘭荃夕攬洲(만유란전석남주)

여기에서 초복(初服)은 임금이 처음 정치를 잡고 교화를 베푸는 것을 의미하고, 난전(蘭荃)은 향기로운 풀이다.

자기 스스로 청빈을 지켜 소박함 지키기에 편안하고
다시 차마(車馬) 없어 청류(淸遊)에 흔들리네.
수신하여 분잡스런 일에 시달리지 않고
비자나무 책상에 훈기드니 일마다 그윽하구나.

自有簞瓢安素分(자유단표안소분)
更無車馬撓淸逰(경무차마뇨청유)
脩然不受紛華戰(수연불수분화전)
榧几燻爐事事幽(비궤훈로사사유)

여기에서 단표(簞瓢)는 도시락과 표주박 즉 소박한 도시락 밥과 표주박 물을 의미하는 청빈한 살림을 말하고, 분화(紛華)는 번성하고 화려함을 의미한다.

의병장 고경명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명문장가이고 당대 최고의 시인이다. 식영정, 소쇄원, 면앙정 등에는 그의 시가 걸려 있다. 고경명은 1563년부터 1581년까지 19년간 광주에서 살면서 여러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리고 ‘유서석록’ 등 많은 글과 시를 지었다. 개천정사에 걸린 이 시도 아마 이 시기에 지어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고경명의 시는 또 한 수가 <하곡집>과 <개천정사지>에 실려 있다. 이왕이면 이 시도 함께 음미하여 보자.

초선생의 청수(淸修) 함을 사모하여 따르니
집이 비좁아 쓸쓸하고 머리가 부딪치네.
어찌 이 사람이 이 골짜기에서 끝이리오.
장차 우리 도를 고을에 이름 내리리라.

焦先生活慕淸修(초선생활모청수)
蝸屋蕭蕭欲打頭(와옥소소욕다두)
豈有斯人終谷口(개유사인종곡구)
且將吾道付滄洲(차장오도부창주)

진실의 근본이 괴롭고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극한 즐거움이 어찌 한가하고 막연히 노는데 있으리오.
병이 많아 홀로 승지를 밟을 수 없지만
어느 날 도포에 복건을 갖추고 그윽한 바위 골짜기를 찾으리.

眞源不在艱深地(진원부재간심지)
地絡寧隨汗漫逰(지락영수한만유)
多病自憐孤勝踐(다병자련고승천)
幅巾何日訪巖幽(폭건하일방암유)

이 시를 읽어보면 제봉은 당시에 아파서 이곳을 가보지 않고 시를 지은 것 같다.

다음은 월사 이정구의 개천초당 시를 감상하자. 월사는 하곡과 친교한 장성현감 이계의 아들인데, 그는 대제학을 지낸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광해군을 수행하면서 군민을 독려하였다.

마음속에 둔 고요한 곳에 초당 지으니
혹 귀인이 머리를 돌리지 않으랴.
때로는 청하동 석실을 찾아서
백오주의 물결 대하기를 좋아하네.

心上唐虞靜裏修(심상당노정리수)
倘來軒冕不回頭(당래헌면불회두)
時尋石室靑霞洞(시심석실청하동)
好對滄波白鷺洲(호대창파백로주)

하늘이 어찌 끝까지 준걸을 궁하게 하는고
본심은 원래 태평하고 한가로움을 즐기도다.
대밭에 때로는 술 가지고 온 손님 있으니
한가한 사람이 와서 한나절 그윽함을 깨우누나.

天意豈終窮俊傑(천의개종궁준걸)
素心元是樂優逰(소심원시낙우유)
竹林有客時携酒(죽림유객시휴주)
來破聞人半日幽(내파문인반일유)

그리고 보니 제봉의 7언 율시 두 수와 월사의 7언 율시 한 수는 운이 같다. 7언 율시 1수의 운은 1구의 수(修) 2구의 두(頭) 4구의 주(洲)이고, 2수는 2구의 유(逰)와 4구의 유(幽) 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원운이 있다는 말인데 제봉의 시가 원운이고 월사의 시가 차운인지, 아니면 어느 누구가 원운 시를 지었고 다시 제봉과 월사가 차운 시를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편 장성 남문창의 의병장 오봉 김제민(1527~1599)의 시도 눈에 띈다. 시를 감상하여 보자.

서로 다정한 눈빛으로 사귀는 하곡이 기특하여
늦은 가을 어느 때에 산길 따라 깊은 곳을 찾아갔노라.
푸른 이끼 낀 돌 위에서 서로 정담 나누고
붉은 나뭇가지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네.

靑眼交捷霞谷奇(청안교첩하곡기)
來尋山路暮秋時(래심산로모추시)
蒼苔石上開情話(창태석상개정화)
紅樹技邊倒酒危(홍수기변도주위)

속세 떠난 선계에서 변변치 못한 글 솜씨라 사양말소
천신은 응당 때 묻은 시는 없으리.
서로가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니 미인과의 이별 같구려.
머리를 돌려 말채찍을 늦추니 가는 길이 더디구나.

仙界莫辭留俗筆(선계막사유속필)
天神應爲洗塵詩(천신응위세진시)
依依若與佳人別(의의약여가인별)
回首忘鞭去路遲(회수망편거로지)

<국역 남문창의록 ․ 오산사지>에는 정운룡이 장성과 정읍 사이 노령산 중턱에 노산초당(蘆山草堂)을 마련하고 서실에 앉아 조용히 학문에 몰두하니 오봉 김제민이 찾아왔다가 시를 읊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걸려있는 시는 노산초당에서 지은 시 같다.

한편 장성현감 이의록과 정읍군수 이양신의 시도 걸려 있다. <하곡집>에는 하곡유허(霞谷遺墟)라고 제목이 적혀 있다. 먼저 장성현감 이의록의 시를 읽어보자.

신선이 된 소식이 이미 아득한데
두 늙은이(기고봉 · 정하곡을 말함)의 은거에 묻노니 몇 해인가?
위태로운 벽 지금도 학이 집짓던 나무가 머물고
깊은 골짜기에는 응당 용이 살던 못이 있네.

金丹消息己茫然(금단소식기망연)
二老幽捷問幾年(이로유첩문기년)
危壁尙有巢鶴樹(위벽상유소학수)
遂嵌應有養龍淵(수감응유양용연)

석문에 옛 글자 이끼 흔적이 아직도 있고
소중한 책상에 남은 경전공부 자취가 가득하네.
지금 산 밖은 어떠한 세상인가.
돌이켜 그 때를 생각하니 이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자 하네.

石門古字苔痕在(석문고자태흔재)
王笈遺經具業傳(왕급유경구업전)
山外卽今何世界(산외즉금하세계)
回思當日絶塵緣(회사당일절진연)

이어서 정읍군수 이양신의 시도 읽는다.

몽계의 그 분이 가신 후 하곡에는 네가 먼저
묵은 주춧돌 그윽한 자취 내가 찾아왔네.
석문에 그려진 글자 골짜기에 새긴 자취가 완연하나
골짜기가 좁아 구름 가는 길이 열릴지 의심이 나네.

濛溪人去後霞谷(몽계인거후하곡)
我來先蕪礎尋幽(아래선무초심유)
躅石門完舊鐫峽(탁석문완구전협)
東疑雲逕山開豁(동의운경산개활)

이 두 시를 음미하면 이 시들 역시 하곡초당 유허를 보면서 읊은 시이다. 이 당시에는 아마도 하곡서실은 없었던 것 같다.

아쉬운 것은 장성현감과 정읍군수가 누구인지, 그들이 언제 이곳을 찾았는지 알 수 없는 점이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한편 조명래와 조경호의 시도 걸려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 두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들도 하곡유허를 보고 시를 지었다. 시에 비탈진 암벽과 소나무들이 나온다.
먼저 명래 조정재의 시이다.

산에 들면 고요한 흥취가 더욱 그윽하니
찾아온 고적은 이미 백년이 되네.
그릇 씻던 맑은 샘 옛 곳 남아 있고
낚시 드리던 낡은 돌 깊은 못이 완연하네.

검푸른 솔 회나무에는 정신이 배어있고
공손히 손 모아 읍하는 봉우리 여러 현상으로 절을 하네
해질 무렵 솟아오른 높은 산처럼 오래 사모하니
왕래하며 사모함이 또한 좋은 인연이로다.

다음은 경호 조집(趙緝)의 시 감상이다.

경치 좋은 곳 구경을 늙다하여 어찌 꺼리리오.
이름 난 곳이 본래 밟아 오르기가 위태하네.
그늘진 비탈에 돌이 깨져서 용이 굴을 옮기고
비탈진 바위벽에 꽃이 피니 손님들이 넘어질까 위험하네.

勝賞何須憚老衰(승상하수탄노쇠)
名區本自躡傾危(명구본자섭경위)
陰崖石裂龍移窟(음애석렬용이굴)
昃壁花開客倒危(경벽화개객도위)

검은 못에 천둥 비올까 근심되고
깊숙이 고요한 곳을 귀신이 알까 두렵네.
고매하신 분이 여기에서 이전에 잠깐 쉬었다 하니
사모하고 우러르는 마음으로 지금 옛터를 방문하네.

渾墨己愁雷雨至 혼묵기수뇌우지
境幽還恐鬼神知 경유환공귀신지
高人此地曾捷息 고인차지증첩식
景仰如今訪舊基 경앙여금방구기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개천정사에 있는 편액들

주1) 하곡 정운룡의 시 두 수와 제봉 고경명과 월사 이정구의 시는 장성군청 강대익 계장의 도움을 받아 장성향교 이상용 전교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주2) <하곡집>에 실려 있는 하곡 정운룡의 두 수 중 다른 하나는 전별시이다. 시의 제목은 “奉別汝晦瑞石之行 여회가 서석(광주)으로 행함을 전별하며”이다.

의리는 한이 없으나 구하기 쉽지 않고
공을 들여서 경솔하고 침착성이 없음을 경계하라.
몸과 마음을 체험하여 끝까지 게으르지 말고
모름지기 칼놀림을 잘하여도 소 전체를 보지 못할 것이다.

義理無窮未易求(의리무궁미역구)
用功沈着戒輕浮(용공심착계경부)
體驗身心終不怠(체험신심종불태)
須要遊刃目無牛(수요유인목무우)

目無牛(목무우)는 目無全牛에서 나온 말이다. 능숙한 백정은 칼이 가는 곳만 보지 소 전체를 보지 않는다. <장자>의 “양생주(養生主)”편 ‘명포정(名庖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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