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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운룡, 전라관찰사 이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리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5회 정운룡, 전라관찰사 이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리다.

정운룡이 전라관찰사 이광을 탄핵하는 상소문은 이어진다.

무릇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어서 창고가 가득 차 있고 사졸들도 정예하여 조정이 의지하는 곳이 그곳이고 적들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곳이 바로 호남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패하여 무너져 버리고 말았으니 이제 국가가 의지할 곳이 어디이고 적들도 무엇을 두려워하고 꺼리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사방 십리 밖에 안 되는 땅으로도 하(夏)나라는 흥복시킬 수 있었는데 더구나 1천 리나 되는 호남 땅을 가지고서 국토수복을 왜 못하겠습니까.

신들이 생각건대, 전라도가 비록 병화를 면하기는 했으나 근래에도 부역이 너무 무겁고 징발을 자주 하여 원근이 시끌시끌하고 인심이 흩어져 가고 있습니다. 두 번씩이나 대군을 징발하는 바람에 길가의 사람들도 수송에 시달려 죽고 식량과 기계들도 난리를 겪기 전에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산 속으로 도망갔던 관군들도 죄가 무서워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고 결국에는 도둑으로 변할 염려마저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만약 그들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다독거려 진정시키지 아니하면 무너지고 갈라질 염려가 생깁니다. 거기에다 대 병력이 패배하고 말았으니 왜적을 섬멸할 기약이 없어 그것이 신들에게는 큰 걱정거리인 것입니다.

이제 도내의 사대부와 유생들은 자기 힘을 헤아리지 않고 서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모의한 끝에 위로는 병사(兵使)와 도사(都事)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도내에 통고문을 내어 응모해 오는 자가 있을 경우 그가 비록 도망갔던 병졸이라도 민심을 격려하는 뜻에서 그에게 자신의 길을 터주고 서로 단결하고 있습니다.

전(前) 부사 김천일은 이 달 6월 3일에 나주에서 수 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미 출발하였고 행부호군 고경명 및 박광옥은 고을의 뜻있는 유생들과 더불어 광주에서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는데 원근에서 소식을 듣고 지원해오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고경명은 이 달 11일에 병력을 거느리고 북상하였고, 박광옥은 본도에 머물면서 다시 향병을 모집하고 군량과 무기도 모아 근본을 보전하고 성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 그의 상소문은 6월 11일 이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이를 계기로 관군의 형세가 조성되고 간사한 무리들을 진압할 수 있는 힘이 생겨 조정의 지휘계통이 다시 서게 된다면, 이는 실로 옛사람이 강회(江淮)를 막아 회복하려 했던 그러한 책략이 아니겠습니까.

강회(江淮)는 중국의 양자강과 회수(淮水)를 말한다. ‘강회를 막아 회복하려 했던 책략’이란 목숨을 바쳐 요새지를 지킴으로서 적의 진격을 저지한다는 말인데,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충신 장순과 허원이 강회지역의 요새인 수양성을 사수하여 역적의 무리가 낙양으로 곧바로 진격할 수 없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고사이다.

그렇기는 하나 이 일은 너무 큰일이어서 조정의 명령과 대신 · 장수들의 협조 없이는 아무래도 차질이 생겨 잘 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도의 순찰사나 방어사는 이미 패전한 장수로서 한 도를 호령할 만한 자격이 없으니, 전하께서 문무대신들 중에서 임명하여 그들을 빨리 내려 보내주시어 불안 속에 떨고 있는 남쪽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그리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소집하여 다시 근왕의 군대를 조직한다면 흩어졌던 병졸들도 모두 한번 싸우기를 원할 것이어서 머잖은 장래에 왜적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 가까이 있는 신하를 순안어사로 보내 백성들의 고생함을 묻고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산과 들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계신 곳을 분명히 알게 하고, 또 전하께서 백성들을 그만큼 감싸고 돌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옵소서. 그렇게 하면 머나먼 바닷가 백성들도 모두 왕화(王化)에 젖어 윗사람을 받들고 목숨을 바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러면 본도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고 국가 만년 대계도 그것이 발판이 되어 영원히 유지가 될 것입니다.

아, 아! 신들이 지난 역사를 보아 왔지만 적군이 국경을 쳐들어 온 지 열흘도 못가서 서울이 그리 쉽게 함락되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국가가 근래 인화(人和)를 잃었고 관리들이 적을 적으로 대하는 뜻이 없었으며 간교한 백성들이 도리어 적의 향도 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 대항하는 자 없어 한 번 패하자 여지없이 밀려 막아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왕업의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백성들 마음을 한 데 모으는 것을 천명을 이어가는 근본으로 삼으시고, 덕 있는 이를 존경하는 것을 백성들 마음 모으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문장이 정말 호소력이 있다.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야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 민심이 천심이다.

그리하여 근본을 바르게 백성들과 다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음과 양이 소장하는 이치와 현(賢)과 사(邪)가 진퇴하는 동기를 살피시고 나가서 싸운 신하를 신임하며 훌륭한 인재를 잘 선발하여 각 지방을 맡기신다면 주자가 말한 “참으로 국가 회복에 뜻을 둔 사람은 칼자루를 쥐고 손뼉 치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니, 이 말이 어찌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수레가 서쪽을 향하여 떠나고 부터는 조정 소식이 통하지 않아 의지할 곳을 잃은 백성들이 위태로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견마 같은 신들의 임 그리워하는 마음은 사실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천성이기에 감히 멀리 북쪽을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이 소장을 올리는 것입니다. 행여 남쪽 소식이 전하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슬픔이 너무 앞서 무엇이라 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무한한 감격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렇게 매우 긴 상소문을 정운룡은 1592년 6월 중순에 진사 박종정(朴宗挺), 생원 유사경(柳思敬)과 연명(連名)하여 선조에게 올리었다.

이 상소문은 무인(武人) 박희수(朴希壽)가 의주 행재소로 가지고 갔다. 상소문을 읽은 선조는 이광을 백의종군시키고 그 대신 권율을 전라관찰사로 임명하였다. 또한 선조는 정운룡을 고창현감으로 임명하였다.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의 ‘제현사실(諸賢事實)’ 정운룡 편을 읽어보면 정운룡 등이 상소를 올린 이유가 적혀 있다.

김천일과 고경명 의병이 서울로 출발 한 이후에 전라감사 이광은 태인에서 각 고을 수령을 소집하였다. 사람들은 이광이 전략을 논의하려는 것으로 알고 상당히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전라도 의병들이 목숨을 바쳐 왜적들과 싸우고자 곳곳에서 모여들자 이광이 자신의 비겁한 행위를 감추려고 의병들의 출전을 막아야 하니 의병들의 처와 자식들을 빠짐없이 잡아 가두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 정운룡은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박종정, 유사경 등과 함께 이광의 죄상을 낱낱이 알리는 상소문을 의주 행재소로 보냈다.

한편 선조는 예전부터 정운룡을 알고 있었다. 선조는 1589년에 정여립사건과 관련하여 정운룡이 정여립에게 보낸 절교 편지를 경연에서 읽은 적이 있었고, 정운룡이 광해군의 왕자사부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 상소문을 읽고 1592년 7월 13일에 나주목사가 된 권율을 7월 22일에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巡察使)로 임명한다. 전라감사 이광을 파직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시킨다.

(1592년 7월 22일 선조실록, 1592년 8월 1일 선조수정실록 참조)

또한 선조는 정운룡 등에게 관직을 제수한다. 1592년 7월 19일자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이조가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모은 유사경 등의 논상을 아뢰다.

이조가 아뢰기를, “김천일 · 고경명 · 정운룡(鄭雲龍) · 박희수(朴希壽) · 곽현 · 양산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데 대해서는 하교(下敎)를 받았고, 이미 승전(承傳)을 받들었습니다.

즉시 정운룡의 상소를 상고하니, 생원 유사경과 진사 박종정은 정운룡과 연명(連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급제 박광옥은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초모(招募)하여 그대로 본도에 머물고 있으며, 또 앞으로 향병(鄕兵)을 규합하려 한다 합니다. 이 세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세 사람은 다른 예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라고 답하였다.

이어서 1592년 7월 19일자 선조실록 4번째 기사에는 정운룡 ․ 박광옥 ․ 박희수 등이 관직을 제수 받은 것이 적혀 있다.

고경명을 통정대부 공조 참의 지제교(知製敎)에, 김천일을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에, 박광옥을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에, 이호민을 홍문관 응교에, 정운룡을 장원서 장원(掌苑署 掌苑)에, 박희수를 한성부 참군에, 문신기를 사섬시 참봉에 제수하였다.

이를 보면 정운룡은 장원서 장원에 임명되었다가 7월 19일 이후에 다시 고창현감으로 발령이 났다.

정운룡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린 이야기는 안방준의 <은봉전서> 그리고 <호남절의록>에도 나온다. 안방준의 <은봉전서> ‘임진기사’를 읽어보자.

이때 장성에 사는 전(前) 왕자사부 정운룡, 광주에 사는 진사 박종정, 생원 유사경 등은 이광이 머뭇거리며 싸움을 피한 사실을 아뢰는 소장(疏章)을 지어서 무인 박희수로 하여금 의주의 행재소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해원부원군 윤두수가 좌의정이 되었는데, 그는 바로 박종정의 처종형(妻從兄)이었다. 박종정이 윤두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본도의 감사가 만일 행조(行朝)로부터 임명을 받고 부임해 온다면 한 달 안에 도착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도내의 수령 중에 오직 광주목사 권율만이 담력과 지략이 있고 이밖에는 견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

이어서 <호남절의록>의 정운룡과 박종정 사실(事實)을 살펴본다.

o 정운룡은 임진왜란 때 본 도 감사 이광이 의병을 훼방하면서 근왕에는 뜻이 없는지라 박종정․유사경과 함께 앞장서서 이광의 죄목을 밝히는 소를 지어 박희수에게 부쳐 용만의 행재(行在)로 보내었다. 조정이 이로 인해 이광의 죄를 다스리고 그를 고창현감으로 제수하였다.

o 박종정은 임진왜란 때 임금께서 피난을 떠나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음에 공은 형님인 진사 박천정과 함께 떨쳐 일어나 제봉 고경명․건재 김천일을 따라 양식을 모으고 의병을 규합해 힘을 다해 근왕을 하였다. 이 때에 본도의 감사 이광이 금강에서 군사를 돌이킨 후로 인심이 산산히 무너져 흩어지며 또 의병을 막고 방해하니 공은 분통함을 이기기 못하였다. 정운룡․유사경 등과 함께 이광의 불충한 죄상들을 조목조목 짚은 소를 만들어 박희수로 하여금 용만에 올리도록 하니 호남의 소식이 처음으로 행재에 전해졌다. 또 편지를 윤두수에게 보내어 말하길, “호남의 병권은 모두 이광이 장악하고 있는데 자못 불충한 신하의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다. 만약 본도의 감사를 행재에서 임명하여 보낸다면 한 달여가 되어도 쉽게 내려오기 어렵다. 도내 수령들은 오로지 광주목사 권율이 담략이 있는데 그에 버금할 자는 없다고들 한다.”라 하니 조정에서 즉시 허락하여 곧바로 이광의 죄를 다스리고 권율을 승진시켜 본도 감사를 대신하게 하고 공은 장원서 별제를 삼았다.

하곡 정운룡, 그는 나라를 위하여 전라도 관찰사 이광의 무능을 탄핵한 용기 있는 선비이다.

<참고문헌>
o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 조선왕조실록
o 김동수 교감․역주,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o 오산창의사,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호남문화사, 1997
o 안방준 저 ․ 안동교 역주, 국역 은봉전서, 신조사, 2002
o 동양학 연구원, 국역 회재집, 호남문화사, 1994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장성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성 사람들, (주)제이애드, 2013
o 하곡위운룡행장․하곡위운룡임진소문, 하동정씨장령공파보 상권
o 조원래,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2001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 부록 : 1592년 7월 22일 선조실록, 1592년 8월 1일 선조수정실록

○ 선조실록 25년(1592년) 7월 22일

비변사가 위급할 때 물러난 전 감사 이광을 백의종군시킬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前) 감사 이광(李洸)은 낭관(郞官)의 관직에서 5~6년이 되지 않아 정경(正卿)의 반열에 뛰어올랐는데도 털끝만큼도 은혜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만을 상책으로 삼습니다. 이는 국가의 위급을 강 건너 남의 일 보듯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도내 의사(義士)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부득이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되어 먼저 스스로 무너져 퇴각하였습니다. 이를 치죄(治罪)하지 않으면 국가의 형정(刑政)이 크게 무너져서 끝내 유지할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선조수정실록 25년(1592년) 8월 1일

용인에서 패배한 죄를 물어 이광 · 윤국형을 삭탈 관직하다.

용인(龍仁)에서 우리 군사가 패한 죄를 논하여 이광(李洸) · 윤국형(尹國馨)은 관작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나주목사 권율(權慄)로 이광을 대신하게 하였으며, 공주목사 허욱(許頊)으로 윤국형을 대신하게 하였다.〔김수(金睟)가 일을 가장 많이 그르쳤는데, 오랜 명망과 은총이 있어서 조정에 돌아가 전과 같이 명위(名位)를 누렸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