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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창현감 정운룡, 군량과 병기를 지원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4회 고창현감 정운룡, 군량과 병기를 지원하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8월 23일에 정운룡이 군량 20섬과 병기 등을 김기수 편에 보내왔다."

정운룡(鄭雲龍 1542~1593)은 당시에 고창현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참봉 김기수(1542~1626)편에 군량과 병기 등을 장성의병청에 보냈다. 장성 출신 정운룡은 친구이자 사돈인 김경수(1543~1621)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과 병기를 보내 온 것이다.

김경수 · 기효간(1530-1593) · 정운룡 · 변이중(1546-1611)은 서로 상종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연구하매, 당시에 사람들은 이들을 오산( 鰲山) 4강단(四講壇)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운룡은 외삼촌 박광옥 등 선비들과 함께 군기와 군량 등을 마련하여 고경명의 담양 의병청에 보냈다.

6월 중순에 그는 진사 박종정, 생원 유사경과 연명(連名)하여 전라관찰사 이광을 탄핵하는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었다. 의주 행재소에서 상소문을 읽은 선조는 이광을 백의종군시키고 권율을 전라관찰사로 임명하였다. 또한 선조는 정운룡을 고창현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면 정운룡 등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읽어 보자. 이 상소문은 임진왜란 초기 호남의 상황과 관군과 의병활동을 아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국운이 불행하여 섬 오랑캐들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일천리 먼 길을 마치 무인지경처럼 승승장구로 쳐들어와 수 백 년 문물(文物)의 고장인 영남 일대가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그 방면을 담당할 대신들이나 각 진을 지키는 장수들 누구 한 사람도 북채를 잡고 군대를 인솔하여 전진하는 자는 없고, 풍문만 듣고도 도망가거나 머리를 싸매고 쥐구멍만 찾아 숨어버려 간악한 오랑캐들이 매우 험준한 조령(鳥領)을 마치 탄탄대로 걷듯이 넘어오게 만들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정말 그랬다. 1592년 10월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 장군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숨었다. 그 당시 그는 진주목사 다음 직책인 진주판관이었는데 진주목사를 따라 지리산에 숨은 것이다. 그러다가 경상초유사 김성일이 그를 불러내어 진주목사 직무대리를 시켰다. 김시민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다른 목사 · 군수 · 현감들은 어찌 하였을까. 더 말해야 무엇 하리오.

급기야 왜적의 칼날이 경기지역에 다가오고 서울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금이야말로 신(臣)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어야 할 때로서 무릇 혈기를 가진 자이면 누구나 모두 울분한 마음으로 떨치고 털고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후한 은총을 받아가며 깃발을 앞세우고 곤외(閫外)를 맡아 지키던 자들이라면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다가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곤(閫)은 대궐을 말한다. 곤내(閫內) 즉 대궐 안은 임금이 통솔하고 곤외(閫外) 즉 대궐 바깥은 장수 지휘 하에 군인들이 맡아 지킨다.

그런데 본도(전라도를 말함)의 순찰사 이광(李洸)은 원래가 겁쟁이로서, 백성을 이끌고 변란에 대응할 만한 지략도 없는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어쩌다가 발탁이 되어 호남의 병사와 백성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넣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이미 적의 형세를 헤아리고 우리 쪽 군마를 정돈하여 죽음으로 적을 대항할 계책을 세울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성상의 유지가 연거푸 내려오고 간곡하고도 절박한 유시가 전달된 뒤에야 비로소 병마를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조정의 명령이 아직 준엄하고 인심도 분개하고 있어서 원근의 군병들이 명령을 듣고는 즉시 응하여 한 사람도 뒤처지는 자 없이 너도나도 앞장서서 북으로 향했으므로 공주에 모인 군대가 7~8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 때 만약 발 빠른 군대를 동원하여 요충지를 점거하고 적의 세력을 꺾어 놓았더라면 한강을 지지선으로 하여 서울을 지킬 수가 있었을 것이고, 후퇴를 한다고 해도 경기지역 확보와 영남 수복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라관찰사 이광은 공주까지 와서는 무서워 더 전진을 못하고 그냥 눌러앉아 군정(軍情)이 점점 해이해지고 예기(銳氣)가 날로 수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가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광은 갑자기 군대를 해산하고 맨 먼저 필마단기로 전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대군이 뿔뿔이 흩어져 밤낮없이 남하를 하였으니 때는 5월 5일이었습니다.

전라관찰사 이광은 참으로 어이없는 지휘관이다. 7~8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근왕하러 공주까지 가서 싸움 한 번 안 하고 되돌아오다니.

계속하여 상소문을 읽어 보자.

그 당시 군대가 후퇴할 무렵 청암찰방 강홍수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광에게 말하기를 “일이 다급하게 되었으니 빨리 서둘러 진군해야 합니다.”하자, 이광이 대답하기를 “지금 군량미가 10일간 먹을 것 밖에 비축이 안 되어 있어 전진할 형편이 못되오.”하였습니다.

강홍수가 다시 말하기를 “군대란 정예가 문제이지, 많고 적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노약자들은 빼고 정예군만 추려 노약자의 몫을 정예부대에다 공급하면 군사가 더 강해지고 군량도 여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수원만 가면 창고에 군량이 가득하니 곧바로 수원으로 당도한다면 군량 1개월분 정도는 문제가 아닙니다.”하였습니다.

이러하자 이광은 다시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광은 금강까지 진출하여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조방장 이유의에게 다시 돌아오도록 소환령을 내렸고, 전 첨사 백광언과 고산현감 신경희가 싸움에 나가겠다고 자청하였는데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광주목사 권율과 장성현감 백수종도 번갈아 나서며 싸우겠다고 하였지만 역시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운룡의 상소문에도 장성현감 백수종의 애국 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백수종은 국난극복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런 현감이었기에 장성 남문 창의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 대중이 한 번 흩어지고 나자 인심이 와해 되어버리고, 간악한 무리들은 조정 명령이 다시 사방에 전달 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도둑떼들을 긁어모아 놀랍고 괴상한 짓들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두 차례나 징병을 실시했지만 모두가 앞날에 있었던 일을 원망하면서 명령을 내려도 응하지 아니하고 금방 모였다가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도내의 선비들이 의리를 앞세워 사람들을 격려하고 불러 모아 은근히 타일렀으며 게다가 나라가 몇 백 년 동안 길러준 은혜가 백성들 마음에 뿌리 박혀 있어 모두 분개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주장(主將)이 잘못하여 크게 인심을 거스리기는 했어도 싸움에 임한 군사들이 역시 몇 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한편 남쪽 백성들은 그 군대가 출전한 후로 밤낮없이 머리를 쳐들고 발을 곤두세우며 승전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렸는데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왜적을 눈앞에 두고 머뭇거리며 용안(龍安) 등으로 부터 우회하여 행군을 하고 제장(諸將)들과 약속을 하고서도 약속시간 뒤에 도착하였으며, 진위현에 왔을 때는 수원과의 거리가 40리 밖에 안 되므로 적을 덮쳐서 섬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었는데도 이광은 겁에 질려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있다가 사흘이 지나서야 추격하였는데 그 때는 이미 왜적이 도망친 뒤였습니다.

이 달(6월) 5일에는 용인에서 왜적을 만났는데 적이 수 백명 밖에 안 되었는데 서로 교전하는 동안 상당한 사상자가 생겼으나 승패가 판가름 나지 않아 군사는 앞 다투어 진격하였고, 백광언 · 이지시 등은 홀로 작은 병력으로 돌진했다가 응원부대가 오지 않아서 끝내 충의의 귀신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방어사 곽영은 날이 저물었다 하여 군대를 후퇴했는데 다음 날 아침 병사들이 식사를 마치고 출전을 하려는데 방어사가 먼저 도망가 버리고 없었으며, 삼도(전라․충청․경상도)의 순찰둔병은 15리 밖에다 병력을 집결시키고 정예부대로 자기만을 지키고 있다가 왜적이 움직이자 기와 북을 버리고 먼저 도망쳐 1백리나 멀리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대는 주장(主將)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일시에 흩어지고 말았고 삼도에서 징발한 군량과 무기들도 도리어 적을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臣) 등은 통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군대가 출동하던 날 호서와 경기의 백성들이 산골에서 피난하고 있다가 음식들을 가지고 나와 앞 다투어 반겨 맞으며 하늘의 태양을 다시 보게 되기를 바랐는데, 이제 이 꼴이 되자 너무 실망하여 길거리에서 울부짖으며 하는 말이 “적이 무서워하는 것은 남쪽 병력이었는데 지금 저렇게 흩어져 버리고 말았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다시 적의 와중에 빠질 수밖에 없고 앞으로 영남에서 보다 더 참혹한 살육의 화를 입게 되었다” 하였고,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6월 초의 용인전투는 전라관찰사 이광과 충청․경상관찰사가 이끄는 5만 명의 관군이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의 일본 수군에게 패전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 부록 :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삼도의 군사가 용인에서 패하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李洸)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 삼도의 여러 장수들이 이광을 맹주(盟主)로 삼고 진군하여 용인에 주둔한 적을 먼저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권율(權慄)이 이광에게 말하기를, “전로(前路)의 적진(賊陣)은 험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쳐다보며 공격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주공(主公)이 경내의 모든 병사를 징발해 들어와 구원하려고 하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는데 되도록이면 신중히 하여 만전을 도모해야 한다. 곧장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을 막는 것이 마땅하니, 그렇게 되면 서로(西路)가 자연히 견고해지고 식량을 운반하는 길도 트이게 될 것이니 사기를 축적하여 틈을 엿보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먼저 수원(水原)의 독산성(禿山城)에 웅거하여 적을 유인하여 싸운 뒤 승리할 때를 틈타 진격하는 것이 온당하다.”하였다.

그런데 이광은 당시 지체한다는 비방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진군을 재촉하며 말하기를, “곧바로 양천(陽川)의 북포(北浦)에 도착한 뒤 진퇴를 의논하겠다.”하였다.

그러나 세 장수는 실제로 권율의 계책을 따르려 하였으므로 연명(聯名)하여 장계하기를, “신들이 함께 군사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지금 수원 지역에 이르러 양천의 북포를 경유해서 군사를 도우려 하나 적이 경성에 있으니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을 듯싶습니다. 조정에서 속히 지휘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선천(宣川)에서 장계를 보았는데, 조신(朝臣)들은 이미 그들이 진취(進取)하는데 용맹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이광이 선봉장 이지시(李之詩)로 하여금 곽영(郭嶸)을 도와 접전(接戰)하게 하고 백광언(白光彦)과 군사 각 1천 명을 합해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게 하였다.

권율이 또 경계하기를, “신중하게 하여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우리 대군(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려 싸우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광언은 적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도전하였는데 적은 거짓으로 군사를 거두고 싸우지 않다가 아군의 주의가 해이해졌을 때 불의에 적병이 몰래 숲속에서 흩어져 기어나와 일시에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들어오니 광언과 지시가 먼저 탄환에 맞아 죽었다. 두 장수는 모두 용력(勇力)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그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든 군사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군중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충청병사 신익(申翌)이 앞에 있다가 그것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자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 이광 · 김수 · 윤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單騎)로 남쪽을 향하여 도망하니 적병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

군사가 처음 진격할 때에 경성에서 왜장 수십 대가 계속해서 성을 빠져 나갔는데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었다. 아군이 그 소식을 듣고는 우리 군사를 피하여 가는 줄로만 의심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왜장이 광주(廣州)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키고 아군이 강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따라 습격하여 모두 섬멸할 계획이었다고 하였다. 이광 등이 패배하자 상하가 실망하여 모두들 이광이 군율을 실수한 것을 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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