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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효증, 의곡장이 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기효증, 의곡장이 되다. 이미지 1기효증, 의곡장이 되다. 이미지 2
제13회 기효증, 의곡장이 되다.

계속하여 <남문일기>를 읽는다.

"8월 18일에 전주의 이정란이 함께 힘을 합하여 근왕하기를 청하였다. 김경수는 곧 답장을 써서 건장한 종 애금을 시켜 보냈다."

이정란(李廷鸞 1529~1600)은 전주성을 기지로 구한 선비이다. 그는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 해미현감 · 개성부도사를 하다가 사임하고 향리 전주에 머물렀다.

1592년 4월 30일에 선조가 한양을 떠나 피난을 가자 왜군은 5월 3일 한양에 무혈 입성한다. 5월 8일에 왜군은 전군 지휘관 회의를 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조선 팔도를 나누어 통치하기로 하고 평안도는 소서행장, 함경도는 가등청정, 전라도는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제6군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5월 13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장들에게 조선 8도를 각각 점령하도록 하고 군량을 할당하는 문서를 보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징수하여야 할 군량은 총 227만석으로 경상도의 289만석 다음인 두 번째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는 조선 8도 중에 왜군에게 침략당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었고 곡창지대였다. 또한 전라도 의병들이 왜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따라서 왜군 입장에서는 전라도 점령이 무엇보다도 절실하였다.

소조천융경의 군대 1만 6천 명은 당장에 전주 점령 계획을 세운다.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군은 진안의 웅치를 넘고 북군은 금산의 이치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한편 조선군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웅치를 지키고 있었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은 이치를 사수하고 있었다.

7월 7일에 왜군 남군 3천 명이 웅치를 넘었다. 조선군은 3중으로 방어진을 쳤다. 제1진은 황박, 제2진은 이복남, 제3진은 정담이 맡았다. 수 천 명의 왜군이 조총과 칼을 휘두르면서 공격해 오자 조선군은 화살을 날려 적의 선봉을 잘 막아냈다.

다음날인 7월 8일에 왜군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조총을 쏘며 진격하였다. 제1진 의병장 황박의 군사 2백 명은 필사적으로 저지하였으나 밀려났고, 제2진 이복남 군도 밀리자 왜적은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제3진 정담 부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장수를 죽이는 등 분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역부족이었다.

7월 9일에 왜군이 웅치를 넘어서 전주성 밖까지 진출하자 전라관찰사 이광은 겁이나 도망쳐 버렸다. 그런데 왜군은 이광이 도망친 것을 그들의 배후를 공격하여 올 것으로 생각하여 감히 덤비지 못하였다.

진주성 안에서는 전 전적(前 典籍) 이정란이 백성들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는 낮에는 전주성에 깃발을 잔뜩 세우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 왜군은 전주성 방위가 튼튼한 줄로 알고 감히 전주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정란의 기지가 호남을 살린 것이다.(1592년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참조)

한편 이정란의 편지를 읽은 김경수는 즉시 답장을 써서 건장한 종 애금에게 전주의 이정란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경수의 답장 편지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남문일기를 계속 읽어보자.

8월 18일에 순창의 홍계훈이 남문의병청에 합류하였다.

8월 19일에는 광주의 기효증이 박경과 함께 와서 의곡을 거두고 운반하는 일에 관한 일을 상의하니 제공(諸公)이 그 말을 가상히 여겨 기효증을 의곡장으로 위촉했다.

함재 기효증(奇孝曾 1550~1616). 그는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고, 조선 성리학의 큰 별 고봉 기대승(1527~1572)의 큰 아들이다.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 8년간 사단칠정논변을 한 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효증은 부친에게서 공부를 배웠는데 1572년에 기대승이 별세하자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마을 백우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후 그는 벼슬에는 큰 뜻이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다.

1592년 5월에 선조가 서쪽으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크게 실의한다. 기효증은 6월 10일에 의곡을 모으자는 통문을 도내에 보낸다. 그런데 당시 전라도 사람들은 수차례의 의병 모집과 양곡 송출에 매우 지쳐있었다. 따라서 기효증의 격문도 처음에는 큰 호응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기효증은 박경과 함께 장성 남문 의병청에서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기효증은 의곡장으로 임명되고, 박경은 기효증의 종사관이 된다.

8월 21일에는 남평 서정후가 김천일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해 말하기를 “나라 위해 깃발을 들었으니 도내 동지들은 각기 병사와 군량을 모아 조금이라도 도와주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서정후는 나주 사람으로 창의사 김천일의 종사관이다. 이 당시에 김천일이 강화도에 있으면서 한양의 왜적을 칠 준비를 하자 서정후는 김천일의 친서를 장성의병청에 전달하고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선조는 7월 19일에 김천일에게 창의사(倡義使)로 호칭하고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 관직을 제수하였고, 광해군도 그에게 친서를 보내는 등 큰 기대를 걸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김천일은 전라병사 최원과 함께 한양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8월 중순에 그들은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단에서 왜군과 싸웠는데 왜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다시 <남문일기>로 돌아가자.

8월 21일에 태인의 김후진 · 김대립 등이 집안의 종(家僮) 10여명을 데리고 와서 병기 마련하는 일에 관해 논의하였다.

김후진(金後進 1540~1620)은 호가 원모당(遠慕堂)인데 일재 이항의 문인으로 학문이 독실하고 남에게 많이 베풀었다. 해마다 흉년이 들면 들밭에 부엌을 만들어 날마다 굶주린 사람들을 먹였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 밭을 부전(釜田)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들 김지백과 친척 김복억 · 김경억, 조카 김대립 등과 함께 장성 의병청에 달려왔다.

월봉(月峯) 김대립(金大立 1550~1609)은 “학문과 선행이 있다.”하여 조정에 천거되어 사포서(司圃暑 궁중의 채소밭 · 과수원을 관장하는 부서) 별제(別提 종6품)를 제수 받았다. 그는 일재 이항의 문인으로 호호정(浩浩亭)을 짓고 도학을 닦았다.

김대립은 임진왜란 때 군속을 모아 고종후, 최경회, 민여운 등의 의병청에 보냈고 재종숙되는 김복억 · 김후진 등과 함께 장성 남문의병청으로 달려왔다.

8월 22일에는 장인(匠人) 10여인을 모아 창검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경수 · 기효간 · 윤진 등은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였다. 왜군과 싸우기 위하여 창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1 광산구 광산동 월봉서원 뒷편 기효증 묘소
사진2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의 칠송정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