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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성 의병들, 세자 광해군의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2회 장성 의병들, 세자 광해군의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는다. 이 일기가 없었으면 남문창의 과정을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었으랴. 이것이 바로 기록의 힘이다.

"8월 14일에 왕세자가 의병장을 유시하는 글이 내려오자 제공(諸公)이 받들어 읽는데 절반도 못 읽고 목이 메어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여기에서 왕세자는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 1575~1641, 재위 1608~1623)을 말한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보름후인 4월 28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유시는 세자 광해군이 의병장 김천일에게 보낸 친필 편지였다. 그런데 김천일은 다시 바닷길을 통하여 광해군의 편지를 전라도에 전파한 것이다. 이 당시 김천일은 전라병사 최원과 함께 강화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먼저 왕세자 광해군의 유시를 읽어보자.

왕세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외람되이 임시 섭정의 어명을 받들어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는 계책을 도우려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재주와 덕이 부족하여 감당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전하(선조를 말함)께서는 지금 천리 밖 먼 곳에 떠나 가 계시니 다만 서쪽을 바라보면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오늘날 나라일(國事)은 이미 10에서 8, 9는 틀렸고 밤낮으로 오직 바라는 것은 근왕병이 일어나는 일인데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 근심과 걱정뿐 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여러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이미 서울 가까이 왔다 하니 이는 실로 역대 종묘사직의 영령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종묘사직의 존망이 오직 여러분들이 힘을 다해 싸워주는 결과에 달려 있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원하는 데 큰 공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자 광해군은 언제, 어디서 이 친필 편지를 썼을까? 그 근거가 1592년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실려 있다.

"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물렀다. 세자가 처음에는 강계(江界)로 향하려 하였는데, 유홍(兪泓)이 ‘강계는 오랑캐 지역과 가까운 변경인데다 또 내지(內地)를 제어하기 어렵다.’고 하자 여러 사람이 이에 따랐다.

세자가 도로 정주(定州)로 들어가 황해도의 협로(峽路)를 경유하여 강원도로 들어갔었는데 여러 번 적에게 핍박당하며 기구하고 험난한 길로 고생을 겪으면서 이천에 이르니 적이 주둔한 곳과는 조금 멀어졌으므로 드디어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여러 도의 관원과 의병에게 하서(下書)하여 근왕에 힘쓰도록 하였는데, 조정의 소식이 처음으로 동남쪽에 선포되었다."

이를 보면 왕세자 광해군은 7월에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이천군에서 친필 유시를 쓴 것이다.

(이천을 경기도 이천시로 착각하면 안 된다. 강원도 이천현은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종반정으로 인조때 현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한편 8월 4일자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세자 광해군의 유시가 실려 있고 남원부사 윤안성도 이 유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O 동궁(東宮)이 처음에 평양에서 대가(大駕)와 서로 이별하면서 통곡하고 각자 헤어져 영상 최흥원 등을 거느리고 영변으로 달아났다가 적병이 날로 가까워 오므로 또 정주(定州)로 달려갔다가, 정주로부터 비밀리 황해도를 지나 강원도로 향하였는데 낮에는 숨고 밤에 행진하여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천에 행차를 머물렀는데 전라도 의병들이 근왕하러 바로 올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손수 글을 써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전해 보내기를...(이하 생략)

O 남원부사 윤안성이 첨지 정염에게 통첩한 내용중에 “왕세자 전하께서 이천현(伊川縣)에 계시면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수서(手書)를 내리신 것을 보았는데, 절반도 다 읽지 못하여 슬픈 느낌이 먼저 생겨 눈물이 절로 나왔소.”(이하 생략)

여기에서 광해군에 대하여 알아보자. 광해군은 1575년에 선조 임금(1552~1608, 재위 1567~1608)과 공빈 김씨(1553~157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임해군(1572~1609)이 있었다. 광해군의 나이 세살 때에 모친 공빈 김씨를 여읜다. 어머니가 산후병으로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생모를 잃은 광해군은 나이 7세인 1581년에 박광전을 왕자사부로 모신다. 임진왜란 의병장을 한 보성 출신 죽천 박광전은 1583년 여름까지 만 2년 반 광해군을 가르친다.

1589년에는 장성출신 정운룡이 광해군의 왕자사부가 된다. 정운룡은 임진왜란 시 고창현감을 하였다.

해군은 즉위하자 자기를 가르친 사부에게 은전을 베풀고 증직한다. 이는 <광해군일기>에 나와 있다.

광해 즉위년(1608년) 11월 27일

하락 등의 집안에 후히 돌보아주는 은전을 시행할 것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옛날 내가 대군으로 있었을 때 사부였던 하락 · 박광전 · 민응기 · 정운룡 · 권우 등이 모두 지도의 수고가 있었는데,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세시(歲時)에는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그 집안을 찾아 위문하고 제물을 주어 후히 돌보아주는 은전을 시행하라고 경상도와 전라도 감사에게 글을 보내도록 하라.”

한편 1591년 윤 3월에 세자 책봉 관련 사건이 일어난다.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살에 이르자 좌의정 정철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나라가 어려울 때 빠른 시일 내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현명하다.”라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건의했다.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는 선조는 크게 노하였다. 선조는 정철을 파직시키고 강계로 유배를 보낸다. 그리고 많은 서인들이 쫓겨난다.

1592년 4월 28일에 한양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대신들이 입대(入對)하여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광해군의 나이 18세였다.

“중궁(中宮 선조를 말함)의 춘추가 많지 않기에 일부러 세자를 일찍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국가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효경(孝敬)하니 세자로 삼으라.”하니, 대신들이 절하며 하례하기를, “종묘사직과 생민들의 복입니다.”하였다.

이날 광해군이 대내(大內)에 들어가 명을 받고 백관이 진하(陳賀)하였으나 책봉하는 예절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 4. 14. 선조실록 1592. 4. 28. 참조)

5월 8일에 선조는 평양에서 정식으로 세자 책봉을 반포한다.
(1592년 5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참조)

6월 13일에 선조는 세자 광해군과 분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부터 세자를 호종하는 관사를 무군사(撫軍司)라 하고 세자는 편의(便宜)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참조)

6월 14일에 선조는 요동으로 건너가려고 하면서 신하에게 자원하여 신청을 받았다. 그런데 같이 요동을 건너겠다는 신하가 많지 않았다.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세자에게 종묘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밤에 종신(從臣)을 불러 의논하기를, “나는 내부(內附)를 청하겠다. 세자는 당연히 종묘사직을 받들고 감무(監撫)하면서 나라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누가 나를 따라 요동으로 건너가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은 부모가 돌아가셨으며 나이도 젊고 병이 없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어려움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나머지는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이 이항복으로 하여금 밖에 나가 따르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도록 하였는데, 오직 승지 홍진, 이조참의 이곽과 무신 한연 등 세 사람만이 응모하였다.

이항복이 상이 직접 호종하는 신하의 명부에 낙점(落點)하여 명령을 내릴 것을 주청하니 상이 재삼 망설이다가 마침내 수행할 제신(諸臣)을 지명하고 나머지는 세자를 따르도록 하였는데 최흥원 등 10여 인이 세자를 따르게 되었다. 그 중 유홍은 상의 행차를 따르게 되었는데 다시 상소하여 세자를 따라 사직의 회복을 도모할 것을 청하자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홍은 길가에서 배사하고 물러났다.

상이 이날 박천에 머물렀다. 이튿날 걸음을 재촉하여 밤 오고(五鼓)에 가산에 도착하였다. 이 날 밤에 비가 내리고 길은 어두운데 한 자루의 횃불도 없었으며 따르는 신하도 정철 등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항복과 박동량이 병조의 관원을 앞장 세워 길을 인도하게 했는데 온갖 어려움과 고통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 때 광해군은 신주를 모시고 영의정 최흥원, 우의정 유홍, 참판 윤자신 등과 함께 강계로 간다. 광해군은 강계로 가려다가 강원도 이천현에 머물렀다. 이 때 월사 이정구(1564~1635)가 시강원 설서로 광해군과 합류한다. 이정구는 장성현감을 한 이계의 아들이고 한때 광해군 사부를 한 적이 있었다.

이어서 <남문일기>를 읽어 보자.

8월 15일 함평의 정충량 · 정득량이 왔다.

정충량(1556~1614)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있어 일찍이 궁마(弓馬)를 단련하여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장성의 김경수가 의병청을 설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 온 것이다.

그 후에 정충량은 도원수 김명원을 찾아갔고 도원수는 그를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막하에 천거하였고, 그는 수군으로 각종 전투에 참여하였다.

정득량(1569~1598)도 종형 정충량과 같이 장성 의병청에 달려왔는데, 그 역시 정충량과 함께 전라우수영에서 활약하였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