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조회수 : 2467
제목 영광 · 무장 · 나주 · 광주 등에서 의사(義士)들이 모여들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영광 · 무장 · 나주 · 광주 등에서 의사(義士)들이 모여들다.  이미지 1
제11회 영광․무장․나주․광주 등에서 의사(義士)들이 모여들다.

<남문일기> 를 계속하여 읽어보자.

"8월 3일에는 무장현의 김성진 ․ 김란 등이 오고 고을 원님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였다."

무장현은 지금의 고창군 무장면 일대인데, 청백리 아곡 박수량(1491~1554)이 12살 때 백일장에서 읍취루(挹翠樓)부를 지어 장원한 곳이기도 하다.

국재(菊齋) 김성진(金聲振 1564~1597)은 어려서부터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다. 효행도 남달라서 부친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렸고, 엉덩이 살을 베어 국을 끓여 올리었다. 부친상을 당하여는 극진하게 시묘살이를 하였다.

임진왜란 때 28세였던 그는 삼종형 되는 김홍우로부터 장성남문 창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임금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며 말하기를 “난리를 당하여 임금이 피난길을 떠났으니 신하로서 어찌 한가로이 위급함을 보고 있을 것인가”하였다.

그의 아우 성철 역시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 김성진은 동생에게 “나는 이미 죽기를 결심하였다. 너마저 떠난다면 누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실 것이냐”하고 부인 유씨에게 집안일을 부탁하였다.

연파(烟波) 김란(金蘭 1531~1606)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는 6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과 군량 및 화살을 가지고 장성 남문의병청으로 들어갔다.

한편 장성현감 백승종은 이 날도 지극정성이다. 사람을 보내어 의병청에 문안을 올리었다. 벌써 세 번째 격려이다.

"8월 4일에 영광 이응종이 두 아들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제공(諸公)의 의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희일비(一喜一悲)를 느낄 수 없게 한다.”고 하였다."

영광의 큰 선비 사매당(四梅堂) 이응종(李應鍾 1522~1605). 그는 70세의 몸으로 아들 극부․극양과 함께 장성 의병청으로 달려왔다. 이응종은 개국공신이고 종친인 완산부원군 이천우의 6대 손이다. 그는 일찍이 외삼촌 윤구(尹衢 1495-1549)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귤정 윤구는 해남윤씨 종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로서 15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사로 일하다가 1520년에 훈구파들에게 핍박 당하여 해남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해남에서 18년간 유배를 살다가 1538년에 다시 복직하여 전라도사와 홍문관 부교리를 하였다. 해남 녹우당 주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그의 증손이다.

이응종은 155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 초기에 어진 선비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파당의 조짐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후에 동서분당이 일어났다. 이후 그는 벼슬을 사절하고 줄곧 고향에서 지냈다.

또한 그는 고을에 예절을 갖춘 풍속이 없음을 걱정하며 죽곡(竹谷) 이장영(李長榮)과 같이 향음례(鄕飮禮)와 향사례(鄕射禮)를 강론하며 실천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우인 찰방 이홍종과 아들 이극부 그리고 제공들과 같이 의병, 군량, 무기 등을 모아 광주의 고경명 의병소에 보냈다. 그런데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자 그는 다시 두 아들 극부․극양과 함께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한 것이다.

이극부(李克扶 1555~1623)는 이응종의 큰 아들인데 영특한 자품으로 문학이 뛰어나 158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극양(李克揚 1557~1598)은 이증종의 둘째 아들로서 그 역시 참여하였다.
이응종은 다음날인 8월 5일에 병이 나서 영광 집으로 돌아간다. 70세의 나이에 나들이가 다소 무리였나보다. 그런데 10월 2일에 영광군수 남궁현이 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영광군에 수령이 없자 백성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고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러자 영광의 지도층들이 자발적으로 향토방위에 나선다.

10월 18일에 55명의 선비들이 오성관에서 모인다. 그들은 “영광은 호남의 요충지이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군사의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끊어지고 만다. 죽음으로 우리 성을 지켜내자”고 결의한다. 그리고 삽혈동맹, 즉 산 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나눠 마시며 맹세하기를, “무릇 우리 동맹한 사람들은 맹세한 뒤에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임에서 사매당 이응종은 수성도별장으로 추대되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이응종의 아우 이홍종, 두 아들 이극부와 이극양 그리고 조카 이극수가 참여하였고, 조선 세종 때 명신 강희맹 집안은 강태와 강극효, 강극효의 아들 강락 그리고 조카 강항과 강윤이 동참하였다. 정희맹과 동생 정희열과 정희맹의 두 아들 정경과 정건, 그리고 류익겸과 아들 류집, 조카 류영해도 참여하였다.

이외에 청백리 송흠의 4대손 송약선, 사육신 박팽년의 매제인 봉여해의 4대손 봉단의, 신장길, 이용중, 이굉중, 이헌, 이안현, 이옥, 노석령, 김재택, 임수춘, 김태복, 이분, 오귀영, 김남수, 정여기, 김경, 김구용, 정응벽, 오윤, 정구, 이효안, 김대성, 이거, 최희윤, 한여경, 이유인, 김광선, 김정식 등 다수이다.

영광 의병들은 자체적으로 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수칙인 수성법도 만들었다. 여기에는 “수성군이 먼저 공격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적이 성 밑까지 육박해 온다 할지라도 그들이 공격을 하지 않는 한 침묵을 지키다가 적이 공격을 할 때 대응을 한다.”는 기본원칙 아래, “적이 와서 성을 핍박하더라도 조용하게 말없이 기다릴 것이요, 함부로 나서서 막을 것이 아니며 적의 실수를 기다렸다가 꾀로서 격파하여야 한다.”고 구체적인 전술까지 언급하고 있다.

10월 18일부터 향토방위에 들어간 영광의병들은 밤낮으로 성을 지켰다. 그리하여 10월 하순 경에는 민심이 다시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8월 6일에 햇무리가 생기니 보는 사람마다 곧 천둥 비가 오겠다고 걱정했다. 8월 8일에 날이 개고 나주의 전서와 광주의 이근이 왔다."

나주의 전서(全瑞 1567~1597)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갔다는 말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장성남문 의병청에 도착하였다.

23세의 광주출신 이근(李根 1569~1656)도 참여하였다. 고경명과 기효증은 그가 크게 될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는데, 그는 힘이 장사이고 경학과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겸비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안의 김억일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이르기를 “밤낮으로 원수 갚을 생각으로 고심하고 있소.”하였다."

부안의 만휴당(晩休堂) 김억일(金億鎰 1544~1604)은 효심이 유달랐다. 부친에게 혀가 꾸부러진 병이 생기자 약재에 제비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 구할 길이 없어 하늘을 바라보고 울며 애원하니 제비가 스스로 날아와서 제비를 구할 수 있었다.

1586년에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1587년에 그는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에 제수되었다. 그는 이 때 소를 올려 “기강을 확립할 것, 과거시험 규칙을 엄격히 할 것, 착한 사람을 포상하고, 죄인은 엄히 다스리고, 공업을 진흥할 것, 청렴하게 살고 사치하는 것을 금하고, 도학을 숭상하고 농사를 권장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을 것과, 어진 관리는 승진시키고 어질지 못한 관리는 몰아낼 것 등 십수조목(十數條目)을 진술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겼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그는 힘을 모아 거의할 뜻을 담은 편지를 고경명에게 쓴다. 그는 이 편지를 아우 구일(九鎰)과 아들 극온(克溫)을 통해 고경명에게 보냈는데 동생과 아들이 노령에서 정탐중인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마침내 김경수 등이 장성 남문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국가의 적이요 개인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이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 보자.

"8월 10일에 모아진 병사와 곡식을 점검해 보니 병사가 174명이고 곡식이 72섬 7말이었다."

7월 20일부터 8월 10일까지 20일 동안에 모아진 병사 172명은 너무 적다. 왜적과 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군사이다.

"8월 11일 김경수가 병사를 이끌고 활쏘기 연습을 하니 고을 원님이 또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참관했다."

김경수는 병사들과 함께 전투에 대비한 실전 연습을 하였다. 이 날 백수종 현감이 또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참관하였다. 거의한지 20일 동안에 벌써 네 번째 격려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왜 <오산남문창의비>에 장성현감 백수종 이름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후임 장성현감 이귀는 창의비 맨 앞에 이름이 있는데 왜 백수종 이름은 없는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서 ‘백수종’을 검색하다가 그 의문이 풀렸다. 바로 윤리(倫理), 효(孝)의 문제였다. 백수종이 장성군수 재임 중에 상을 당하였는데 상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영광군수 남궁현처럼 친상을 당하면 전쟁 중이라도 사직을 하고 상례를 따랐어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아니하여 1596년에 파직 당하고 이후 벼슬도 못하게 된다.

1596년 12월 11일의 선조실록을 읽어 보자.

선조 29년(1596년) 12월 11일 1번 째 기사

"양천현령 백수종의 파직을 사간원이 건의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변란이 있은 후에 상기(喪紀)가 무너져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양천현령(陽川縣令) 백수종(白守宗)은 일찍이 장성군수(長城郡守)로 있을 때에 어버이 상을 듣고서도 즉시 분상(奔喪)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사대부에 끼여 있으므로 여론이 모두 놀라고 분개해 합니다. 이와 같은 자는 드러나는 대로 죄를 다스려 윤기를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으니 파직하고 다시는 서용하지 마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고도 임진왜란이란 국가 존망위기에 장성현감 직을 성실히 수행한 백수종. 지금 같으면 그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사진 : 영광 임진 수성사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