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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승려들도 남문창의에 참여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0회 승려들도 남문창의에 참여하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7월 24일에 도내 사찰에 패(牌)를 보내 전립(氈笠)을 거두어 들였다."

전립은 조선 시대 무관이 쓰는 벙거지 모자이다. 아마도 절에서 전립을 많이 가지고 있었나 보다.

"7월 25일에는 백암승(白岩僧) 처능(處能), 수도승 계묵(啓黙), 취서승 계한(戒閑), 하청승 덕인(德人) 등이 백지와 새끼줄 등 물건을 가지고 왔다."

이 일기를 보면 백암사․취서사․하청사․수도사의 승려들도 의병으로 참여한 것이다. 백암사는 지금의 백양사이다. 백양사 자료에 의하면, 노령산맥의 백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고찰로서 당시에 백암사로 불이었으며, 고려 덕종 3년(1034년) 에는 정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뒤에 조선 선조 7년에 백양사로 고쳐 불렀단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토사로, <남문일기>에는 백암사로 기록되어있다.

취서사(鷲棲寺)는 취령산(鷲嶺山)에 있는 절이고, 하청사(下淸寺)는 불대산(佛臺山)에 있는 절이다. 불대산에는 취봉사(鷲峯寺)ㆍ상청사(上淸寺)ㆍ하청사(下淸寺)ㆍ연화사(蓮花寺)등 절이 있었다.

불대산은 풍수쟁이들이 “산에 달리는 용의 형세가 있다“고 하여 절을 세우고 상하연(上下淵)이라 일컫고 산세를 다스렸다. 또 산의 동북에 큰 골짜기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신라 때에 3개의 절을 세워서 안룡(安龍)ㆍ정룡(定龍)ㆍ청룡(靑龍)이라 하였다.

그런데 수도사는 이디에 있는 절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나 수도승은 수도(修道)하는 승려란 의미는 아닐까.

임진왜란 때는 의승들도 많았다. 휴정․유정․처영․영규가 대표적인 승병장이다. 이순신을 도운 수군 의승들도 있었다.

"7월 26일에는 큰 비가 내렸고, 7월 27일 저녁에 비가 개었다."

날씨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정말 기록의 달인이었다.

"7월 28일에는 정읍 류희진, 태인의 이수일, 무안의 윤황, 나주의 김부·김명·김경남·홍원 등이 오니 따르는 의병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장성․고창․흥덕․담양에 이어서 이제는 정읍․태인․무안․나주의 선비들도 참여하였다. 전라도 각 지역에서 참여하고 있다.

정읍 류희진(柳希津 1558~1597)은 호가 신암(信巖)이다. 그는 장성 남문 창의 소식을 듣고 동참하겠다는 글을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옛 시에 만사가 충효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다” 하였으니, 효란 한 가정에 관한 일이지만 충이란 그 때를 만난 후라야 가히 충을 이루는 것이니, 우리나라의 형세를 볼 때 지금이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이윽고 그는 아우 희사(希泗 1561~1597)․희문(希汶 1564~1597)과 함께 의병청에 도착하였다.

태인의 이수일(李守一 1534~1616)은 호남의 큰 선비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의 둘째 아들이다. 이수일의 호는 은암(隱庵) 이고 태인현 서촌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문이 높고 효우(孝友) 또한 세상에 알려져 내자시 직장(內資寺 直長)과 경양도 찰방(景陽道 察訪)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범하자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장성현 남문 의병청으로 달려갔다.

일재 이항은 퇴계 이황이 호남 성리학의 종조라고 말할 정도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을 실천한 유학자였다. 힘써 공부하기를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도학자였다. 그리고 나랏일이 어찌 될지를 미리 예견하고 준비한 실천가였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 그는 호방하기도 하고 용력이 뛰어나 말 타기를 잘 하고, 활도 잘 쏘았다. 또한 난봉꾼 대장으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가 27세 되던 해, 큰 아버지 판서공이 그를 나무랐다. 사람 도리를 해야지 망나니처럼 살면 되냐는 꾸지람이었다. 그때서야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사서삼경 공부를 하였다. 바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오로지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정신집중 하였다.

한 번은 서울 도봉산의 망월암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과 같이 지냈는데 너무 더운 한 여름이라서 선승이 잠깐 졸았다. 그러나 이항은 어깨와 등을 꼿꼿이 하고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걸어가면서도 말을 타면서도 공부를 하였다. 항상 칼을 옆에 꽂아놓고 기를 한 곳에 모으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539년에 이항은 선친의 땅이 있는 전라도 태인현에 어머니와 함께 내려와 살았다. 칠보산 아래 보림사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집 한 채를 마련하고 호를 일재(一齋)라 지었다. 오로지 한 가지로 집중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일자(一字)를 도의 근본으로 삼았다.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에 근원하고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에서 나오는 까닭에 두 가지를 자세히 살피면 하나이니, 하나를 지키는 것이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일재는 두 아들 이름도 덕일(德一), 수일(守一)로 지었다. 뒤 글자에 일(一) 자를 붙였다. 두 아들 이름의 앞 글자를 합치면 덕수(德守)이다. 덕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일재는 하서 김인후(1510~1560)와도 잘 어울렸다. 하서는 가끔 일재를 찾아갔다. 일재는 하서가 찾아오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하서와 같이 술을 마시었다. 일재가 하서에게 시 한수를 읊었다.

쓸쓸하고 고요한 밤 산 속의 집에
벗이 멀리서 찾아 왔구나.
그대가 도를 전하려 한다면
내 술잔으로 같이 취해보세나.

하서도 정답게 화답하였다.

공경으로 서면 사특함이 사라지고
참을 알면 이치가 거기 있더이다.
책 한질로 마음 보존하고
석잔 술로 기운 기르니 참 좋구나.

이렇게 두 사람은 죽이 맞았다. 그리고 사돈을 맺었다. 하서의 큰 아들 김종룡과 일재의 큰 딸이 결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1560년에 하서가 별세한다. 일재는 슬픔에 젖어 만시(輓詩)를 지었다.

바로 높은 경지에 들어감은 선비가 바라는 바인데
궁구하고 다 생각하여 정밀함과 은미함을 극진히 탐구했네.
홀로 쓸쓸히 천년동안 끊어진 실마리를 찾았으니
비록 세상 떠났다 하나, 도가 저절로 빛나네.

정읍시 북면 칠보산 밑 보림사에는 일재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표시한 강마(講磨) 바위가 있다. 일재의 제자들은 김천일, 변사정, 김제민, 기효간, 김점, 소산복, 백광홍, 최경회, 황진, 고종후 등이다.

한번은 남쪽 지방에 왜구가 출몰한다는 나쁜 소식이 들리었다. 일재는 국난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준비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육도삼략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공부하고 있던 김천일, 김제민, 변사정 등과 같이 극기 훈련을 하였다. 5일씩이나 밥을 먹지 않고 견디는 훈련을 한 것이다. 이 극기 훈련에 일재 이항과 건재 김천일은 무난히 견디었으나 나머지 제자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항의 제자들은 김천일, 변사정, 최경회, 황진, 고종후 등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이 많았다.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다. 기효간․김제민․김후진․김대립․김부․이수일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항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거의 죽었기 때문에 일재의 학문이 후대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너무 아쉽다. 이항의 신위는 전북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있는 남고서원에 의병장 김천일, 고봉 기대승의 사돈인 김점 등과 함께 모시어져 있다.

한편 무안의 윤황(尹趪 1562~1597)은 호가 노파(老坡)로 무안 옥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하늘이 낸 효자로 재주 또한 총명하여 음사(蔭仕)로 사재감 정(司宰監 正)에 이르렀다. 윤황 역시 장성남문 창의에 참여하였다.

나주의 김부(金溥 1569~1597)는 호가 죽헌(竹軒)으로 나주 초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에 5언 율시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충효스러웠나 보다.

석양에 새들은 나무가지에 지저귀고
가을 안개는 먼 산봉우리에 둘렀구나,
지사(志士)도 간간히 태어났건만
충신도 가히 나라를 지킬 만하네.

만일 삼척검(三尺劍)을 가진다면
기필코 외적(九夷頑)을 진정시키리라.
자식을 어여삐 여기지 않는 어머니가 없는데
어버이께 효도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구나.

그는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주군 수점안산에 안장하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조정에 천거하려하니 그는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다. 김부는 일재 이항에게 학문을 닦아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김명(金溟 1571~1597), 외종사촌 윤황과 종친 김경남과 함께 인척인 김경수와 김홍우가 주도하는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김명은 호가 일심재(一心齋)이고 김부의 아우로서 학행이 있다하여 음사(蔭仕)로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매죽당(梅竹堂) 김경남(金景男 1542~1593)은 나주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기절이 있었으며 문장 또한 탁월하여 칭찬을 받았다. 부모님을 지극히 섬겼으며 부친께서 이질로 신음하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병세가 위독함에 내 몸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도록 3일 밤을 빌었다.

또한 아버지가 입안에 침이 마른다며 제철도 아닌데도 오이를 먹고 싶어 하여, 엄동설한에 밖에 나가 말라죽은 넝쿨에서 오이 하나를 찾아내어 아버지께 올리었다. 나중에 그는 효행으로 참봉에 추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동향사람 김부․김명․홍원 등과 같이 장성남문 의병청으로 달려갔다.

홍원(洪遠 1576~1603)은 호가 송암(松菴)이다. 나주 금안리에서 출생한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였다. 1592년에 김천일이 나주에서 의거할 때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동참하여 가동과 군량을 보내고 북상하였는데 중도에서 병을 얻어 다시 나주로 내려왔다. 그 후 김경수 등이 창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고향 동지인 김부, 김경남 등과 함께 장성에 온 것이다.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