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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창의 김홍우, 전라도 각지에 격문을 돌리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9회 고창의 김홍우, 전라도 각지에 격문을 돌리다.

7월 20일에 김경수는 기효간, 윤진과 함께 격문을 만들어서 하인들을 시켜 먼저 이웃 고을인 고창의 김홍우에게 일러 도내 모든 고을에 널리 전하도록 했다. 고창은 장성과 바로 인접한 지역이다. 장성현에서 고창현 경계까지는 15리에 지나지 않았다.

김홍우(金弘宇 1539~1598)는 격문을 전라도 각지에 보낸다. 그는 호가 백곡(白谷)으로 조부는 광릉참봉을 하였는데 학포 양팽손(1488~1545)․정암 조광조(1482~1519)와 같이 학문을 논하였다. 그런데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신진사림들이 박해를 받자, 그는 세상과 등지고 숨어 살았다.

김홍우의 아버지는 양팽손에게 수업하였다. 양팽손은 청백리 지지당 송흠(1459~1547)의 문인으로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수습한 절의의 선비였다. 송흠의 정자 관수정에는 양팽손의 시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김홍우 부친은 사마시와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간당들의 농간에 의해 급제자 명단에서 빠졌다. 이를 중종이 애석하게 여겨 비단으로 장식한 두보의 시 1질을 하사하였다.

김홍우는 1539년에 전북 고창군 고창읍 노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어른다운 기상이 있었고, 오음 윤두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575년에 부친상을 당하여는 예법에 따라 상례를 마치니 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583년 동서분당의 의논이 시작되자 송강 정철, 백사 이항복 등과 경사를 토론하며 교의를 두터이 하였다. 1587년에 정여립의 옳지 못한 행동을 보고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하였는데 1589년에 정여립이 역모하여 참살되자 사람들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였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 보자.

"7월 21일에 전 봉사 김중기, 김덕기 형제가 남문 의거 소식을 듣고 남문 도청에 달려와서 김경수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비로소 죽을 곳을 얻었소. 원컨대 공은 서둘러 도모하시오”하였다."

김중기(金重器 1566~1652)는 호가 현계(硯溪)로서 장성출신이다. 증조는 장성현령, 조부는 목사였고 부친은 부윤을 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높아 음사로 군자감 참봉과 제용감 봉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귀향하여 장성에 있었는데 남문창의에 참여한 것이다. 그의 아우 김덕기(1573~1647)도 같이 참여하였다.

"7월 23일에는 고창의 김홍우․김광우 형제와 서홍도, 그리고 흥덕(지금의 고창군 흥덕면)의 서연, 담양의 김언욱, 김언희 등이 각자 집안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장성 남문으로 달려왔다. 그들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랑캐(胡)를 막는 장성이 있었는데 이제는 왜(倭)를 치는 장성이 있소” 하였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김광우(金光宇 1546~1611)는 김홍우의 아우로서 형과 함께 장성 남문으로 달려왔다. 서홍도(徐弘渡 1543~1593)는 전북 고창군 양심리에서 출생하였는데 그는 국량이 크고 뜻한바 있어 강개하였다. 효성도 지극하여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을 마시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서연(徐渷 1547~1630)은 호가 붕래재(朋來齋)로 고창군 흥덕면 출신이다. 부친은 현릉참봉을 하였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1547년에 부친이 산수 좋은 곳을 가려 전북 흥덕에 새 터를 정하고 죽림정을 짓고 살면서 인재를 양성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김경수, 기효간 등이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 노복과 의병을 모아 종이, 세끼, 의곡, 무기 등을 가지고 장성 의병청에 도착하였다.

서석(瑞石) 김언욱(金彦勗 1545~1596)은 담양 대곡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기질과 뛰어난 총명으로 10세 때 문장이 수려하였고, 성장하여서는 공맹(孔孟)의 학문에 진력하였다.

그는 과거시험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독하여 말과 행동을 한결 같이 법도에 따랐다. 아우 언희와 우애하며 침식을 같이 하고, 친구와 믿음으로 교제하며 손님을 공손히 대우하였고, 은혜로써 노복들을 부리니 사람들이 참다운 선비라 칭송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 추천으로 경양찰방(景陽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우 언희와 같이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김언희(金彦希 1562~1593)는 김언욱의 아우로서 오천 김경수의 문인이다. 그는 순창 어은동(漁隱洞)으로 이거하여 날마다 낚시와 나물 캐는 것을 일삼았다. 어느 날 고창의 이홍업이 그를 찾아와 그의 취미를 물었다. 그가 답하기를 “산이 나의 나물 캐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니 내 취미는 이 새파란 산수에 있노라”고 하자 이홍업은 창정(蒼亭)이란 현판을 써주었다.

한편 이 날 김홍우․김광우 형제와 김언욱․김언희 형제 그리고 서연․서홍도는 남문 의병청에 모여서 담소하면서 파이팅을 외친다. 중국에는 흉노족 등의 북방 민족을 막기 위해 진시황제가 만든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는데(줄여서 長城이라 부른다), 조선에는 왜나라를 치는 장성(長城)이 있다고 넉살을 떤다. 그러면서 남문창의에 자부심을 보인다. 대단한 의기이다.

"이윽고 장성 현감 백수종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해 말하기를 “일찍이 호남은 충의의 고장이라 들었는데 지금 여러분을 보니 참으로 거짓말이 아님을 알았소.”하고 쌀 15섬과 관군 40명을 보내 의병을 도왔다."

장성현감 백수종은 남문창의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나라를 위하여 의병이 나서는 것을 무척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가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서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형세와는 너무나 다르다. 장성현감 백수종, 참으로 도량이 넓다.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