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조회수 : 1938
제목 남문창의 격문에서 역사를 배우다.(3)
작성자 관리자
내용
남문창의 격문에서 역사를 배우다.(3) 이미지 1
제8회 남문창의격문에서 역사를 배우다.(3)

격문을 해석하면 할수록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격문 초안을 누가 잡았을까 하는 점이다. 김경수․기효간․윤진이 공동으로 격문을 지었다 하나, 어느 누구가 초안을 먼저 지었을 것이다.

필자는 오천 김경수가 그리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남문창의를 먼저 주도한 사람이 김경수란 점이다. 둘째 김경수가 예조좌랑을 제수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예조란 교육과 문화 그리고 외교를 담당하는 부서이다. 그러니 그곳에 근무하려면 문장이 수려해야 한다.

그러면 계속하여 격문을 읽어보자

"삼군이 눈물을 뿌리며 용감하게 죽으려는 정성을 힘내어 발휘하고, 천리 밖 행조에서는 와서 구해달라는 소망이 간절합니다."
三軍雪涕激勵敢死之忱千里行朝丁寧來救之望

여기에서 행조(行朝)는 임시로 설치된 조정을 말한다. 선조는 의주에 행조를 차렸다. 이와는 별도로 광해군은 분조를 운영하였다.

"슬프다! 우리 호남 50주군에 의기(義氣) 있는 일개 남아도 없단 말입니까? 노를 치며 강에서 맹세하는 것은 바야흐로 사아(士雅)의 정성이 간절하고, 칼을 들고 죽음을 다투는 것은 어찌 기산의 백성이 왕은에 보답한 일을 본받음이 아니겠는가."
嗟我湖南五十州郡豈無義氣一箇男兒擊楫誓江方切士雅之輸悃推鋒爭死盍効岐民之報恩不佞齒

여기에서 관심있게 볼 것은 “사아(士雅)의 격즙서강(擊楫誓江 사아가 노를 치며 강에서 맹세하다)”이다. 사아(士雅)는 중국 동진(東晉) 초기의 무장인 조적(祖逖 ? ~321)의 자(字)이다. 동진은 317년에 사마예(司馬睿)가 난징(南京)에 세운 나라이다.

조적은 후조(後趙)의 임금인 석륵(石勒 274~333)을 진압하기 위하여 장강(양자강)을 건너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맹세하고 강을 건넜다.

319년에 후조를 세운 석륵은 막강하여 청주(靑州 산둥성 동부), 연주(兗州 산둥성 서부) 등을 점령하였다. 회수(淮水) 이북을 모두 지배하였고 남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조적은 석륵을 무찌르고자 군사를 이끌고 장강(양자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함선이 장강 중류에 이르자 조적은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중원의 적을 없애고 강산을 수복하지 못하면 이 조적은 흐르는 강물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하고 맹세했다.

이리하여 조적은 수차례 싸움에서 적들을 물리치고 많은 땅을 수복하였다. 조적은 병법을 잘 운용하였고 상벌에 몹시 엄격하였다. 그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거두고 제를 지냈으며 투항한 적들은 용서했다. 이에 군심과 민심이 그에게 모아졌다. 조적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면 백성들은 돼지를 잡고 술을 올리며 그들의 승리를 경축했다.

그리하여 중류격즙(中流擊楫)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진서(晉書)> 조적열전(祖逖列傳)에 나온다.

한편 중류격즙의 고사를 읽고 나니 1932년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한 윤봉길(1908~1932) 의사(義士)의 맹세가 생각난다.

1930년에 그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중봉 조헌이 1591년 3월에 선조에게 올린 지부상소에도 조적과 석륵의 일화가 나온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1일자 참조)

"석늑(石勒)은 강포하여 스스로 약한 진(晉)나라를 능가(凌駕)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진나라에서 한번 서폐(書幣)를 불태우자 조적(祖逖)이 없었어도 감히 강회(江淮)를 한 번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말이 정직하고 의리가 확고하면 사리에 어긋나는 기운은 저절로 꺾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조헌은 일본을 경계하여야 한다는 이 상소에서 훌륭한 장수가 없어도 명분에 의거 강력하게 대처하면 적이 함부로 침범해 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격문을 읽어보자.

"이 못난 사람이 비록 늙었으나 적개심은 간절하여 말에 오르는 용기를 보이니 복파(伏波)의 마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매를 날리는 위엄을 기르니 태공의 기운이 아직도 장합니다."
雖臨衰志切敵愾示上馬之勇伏波之心益堅畜揚鷹之威太公之氣猶壯

복파는 중국 한 무제 때 수군 장수이다. 복파의 위력이 “바다의 물결을 잠재웠다.”다 하여 복파장군이라 칭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고을의 부로(父老)와 호걸들을 초청하니, 본 현(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모입시다. 자제들을 보내어 토벌하면 깃발 그림자가 뒤를 잇고, 군량을 모으면 곡식이 말로 섬으로 많이 모아질 것입니다. 장사가 눈물 흘리는 것은 마땅히 즉묵(卽墨)의 정성에 감동함이요, 10월의 출병은 반드시 경양(涇陽)의 승전을 알릴 것입니다."
是以招諸州父老豪傑會本縣南門義廳 送子弟替討竿旗影從聚糗粮助供斗栗箕斂 壯士揮淚宜感卽墨之忱十月出車必報涇陽之捿

즉묵은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읍의 지명이다. 중국 산동성 동부에 있다. 경양은 중국 섬서성 장안현의 지명이다 이 두 곳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곳이다. 이 격문에는 전라도 장성을 중국의 즉묵과 경양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면 즉묵의 승리에 대하여 살펴보자.

BC 284년 진·위·한·연·조의 5국 연합군은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의 지휘 아래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는 제나라의 70여 성읍(城邑)을 함락시키고 수도 임치(臨淄)까지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즉묵(卽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점령당해 거의 망국이나 다름없었다.

악의는 제나라를 없애고자 군대를 이끌고 즉묵을 공격했다. 그러나 즉묵의 백성들은 연나라의 강한 군대 앞에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즉묵 태수 전단(田單)을 중심으로 뭉쳤다. 태수 전단은 보통 전술로는 연나라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비책을 강구했다.

먼저 그는 민심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담을 쌓는 널과 성벽을 쌓는 데 쓰는 가래를 손수 들고 병사들과 함께 일했다. 또한 그의 처첩들을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전투에 참가시켰다.

이렇게 민심을 얻게 되자 전단은 다음 계책을 세웠다. 성안에 있는 천여 마리의 소에 오색의 용을 그린 붉은 비단을 입히고 쇠뿔에는 칼을 단단히 매었다. 또한 꼬리에는 기름에 잰 갈대풀을 매달아 불을 지폈다.

어두운 밤을 틈타 전단은 성벽에 미리 뚫어놓은 수십 개의 구멍을 열어 그 구멍으로 소들을 내몰아 달려 나가게 하고 그 뒤에는 용맹한 군사들을 따르게 했다.

소는 궁둥이가 뜨거워지자 미친 듯이 날뛰며 연나라 군대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군영은 대 혼란이었다. 병사들은 소에 걸려 죽거나 다치고 말았다. 이윽고 즉묵의 군사들은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연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연나라 군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마침내 제나라는 빼앗긴 70개 성을 되찾았고 피신한 제나라 양왕은 다시 수도 임치로 돌아왔다. 큰 공을 세운 전단은 귀족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제 격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창해에 칼을 씻고 장안을 수복한다면 호부용절(虎符龍節)이 장차 충성을 포상하는 영광이 있을 것이며, 금권단서(金券丹書)에 마땅히 책훈되는 은총을 입을 것이니 마음과 힘을 합하면 능히 공을 이룰 것입니다."1592년 7월 20일
洗劒滄海旋軫長安虎符龍節將有褒忠之榮金券丹書應被策勳之寵一乃心力其克有功 一五九二年 七月 二十日

장안은 중국 당나라의 수도 지금의 중국 서안이다. 여기서는 한양을 지칭한다. 다음은 호부용절의 의미이다. 호부는 군사를 징발하는 병부이고 용절은 사신이 지니는 부절이다. 금권 단서는 역사책이다. 즉 장성 남문 창의한 내역이 역사책에 기록되어 공훈도 받고 후대에 남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진 윤봉길 의사의 맹세 글씨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