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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문창의 격문에서 역사를 배우다.(2)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7회 남문창의 격문에서 역사를 배우다.(2)

남문창의격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글자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있음을 느낀다. 문불여장성이란 말이 빈말이 아님을 새삼 실감한다.

그러면 다음 격문을 읽어 보자.

"북군이 강을 건너온다는 말은 불행히도 가깝고, 남조에 사람 없다고 흉보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北軍渡江之語不幸近之南朝無人之譏誠可痛矣肆我

북군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말하며, 남조는 송나라를 말한다. 북군이 강을 건너온다는 것은 금나라가 황하를 건너서 송나라를 침략한다는 의미이고, 남조에 사람 없다는 것은 송나라에는 금나라와 싸울 장수가 없다는 뜻이다.

1127년에 송나라는 금나라에 의해 망하였다. 그러면 송나라의 멸망과정을 알아보자. 만주에는 농업과 유목생활을 병행하는 여진족이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발해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말갈족이 세운 요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송화강 근처에서 살고 있던 완안부 추장 아골타는 요나라에 반기를 들고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다. 금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하여 요의 군대를 송화강변에서 무참히 격파시키었고, 요동․요서로 남하하여 종횡무진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렇게 요나라가 흔들리자 송나라는 1120년에 요나라를 없애버리고자 금나라에게 제의를 한다. 즉 금나라와 송나라가 요나라를 협공하고, 송나라는 지금까지 요에 보냈던 세금을 금나라에게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금나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요나라를 공격하여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송나라 군대의 전과는 미미하였다. 더구나 송나라 내부에서 방랍의 난이 일어나 이를 토벌하느라 적극적인 공격을 펼 치지 못하였다. 반란군 10만을 제압하기 위해 15만의 병력을 동원 했던 것이다.

이 무렵 송나라는 당쟁이 격화되어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제8대 황제 휘종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군주로서, 그의 회화는 북송시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으나 정치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채경(蔡京) 같은 처세술에 능한 관료와 환관 동관(童貫) 등이 결탁하여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더욱이나 휘종은 쑤저우의 태호석 등을 개봉까지 운반하는 데 수십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였고, 너무 피폐해진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방랍의 난이다.

이에 반하여 금나라는 요나라의 공략에 박차를 가하여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금나라가 건국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송나라는 요나라의 패잔군과 몰래 금을 공격하기로 획책했다. 이 음모는 금나라에 발각되어 회군하였던 금나라 군대는 송나라 서울 개봉을 향해 진격하였다. 당황한 휘종은 수도를 떠나 박주로 도망을 가면서 퇴위함으로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휘종의 장남인 황태자 조황이 흠종으로 즉위한다.

흠종은 수도를 포위한 금나라와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주전파는 그 강화에 반발하였고 끝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금나라는 다시 총공격을 하였고, 1127년에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만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하는데 북송은 멸망한다.

금나라는 흠종과 휘종 이하 왕족과 관료 수천명을 포로로 잡아 만주로 연행했다. 금나라는 송나라 임금이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하고 정신이 혼미했다는 의미로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한편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가 남쪽으로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1127년에 송나라를 세웠다. 이를 남송이라고 한다.

오천 김경수 등은 이 격문을 쓰면서 중국 송나라의 비참한 말로를 생각하였으리라. 그리고 조선도 망하지 않으려면 지조있는 선비들이 나서야 한다고 다짐하였으리라.

이어서 다음 격문을 읽어보자.

"마침내 우리 임금께서 태왕이 가만히 빈을 떠나듯, 명황이 잠시 촉으로 피난하듯 서울 도성을 버리고 몽진하였습니다."
聖上竊爲太王之去邠暫勞明皇之幸蜀

선조임금이 한양에서 서쪽으로 피신한 것을 중국 주나라 태왕이 서융의 침략을 받아 본거지인 빈을 떠나 기산으로 옮긴 일과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촉으로 몽진한 일에 비유하고 있다.

주나라는 요순시대 농업담당 장관인 후직이 세운 나라이다. 후직의 11대 째인 태왕 고공단보 시절에 주왕은 서융의 침략을 피하여 본거지인 빈을 떠나 기산으로 옮기었다. 이후 주나라는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태왕의 후손이 문왕․무왕 그리고 주공이다. 이들이 바로 공자가 늘 흠모하는 주나라의 성군들이다.

다음에는 명황이 잠시 촉으로 피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알아보자.

명황은 당(唐)나라의 제6대 황제 현종(685~762, 재위기간 712~756)의 시호인데, 당 현종은 756년에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와 함께 촉으로 피난을 갔다.

현종은 712년에 집권한 이후 25년간은 훌륭한 정치를 펴서 당나라 최대의 번영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태종의 정관의 치(治)에 버금가는 개원(開元)의 치(治)를 이루었다.

현종은 즉위 초기에는 선정을 펴고 사치스런 물건을 모아 궁전 앞에서 불 태워버릴 만큼 백성들에게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였지만, 재위 기간이 길어지자 차츰 안일하여 지고 쾌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736년에 현종은 사랑하는 무혜비를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궁전에는 미녀가 3천명이나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럴 즈음 현종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열여덟째 아들 이모(李瑁)의 부인이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이었다.

현종은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그녀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현종은 그녀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미모가 빼어날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으로 음악․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다름 아닌 양옥환(楊玉環) 나중의 양귀비(楊貴妃 719~756)이었다.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 막이 오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아들인 이모에게는 위씨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현종과 태진은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현종은 모든 정무를 재상 이임보(李林甫)와 환관 고력사에게 맡기고 오로지 양귀비에게만 정신이 빼앗겨 홍경궁․화청지 등에서 쾌락에 빠졌다.

이 시기에 중국 최고의 시인 이백(701~762)은 양귀비가 모란꽃 보다 더 아름답고 농염하다는 노래 <청평조사(淸平調詞)>를 현종과 양귀비에게 바치었다.

구름 같은 치마에 꽃다운 얼굴
살랑이는 봄바람 스치고 이슬 맺힌 꽃은 농염하여라.
군옥산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필시 달 밝은 요대에서 만났을 선녀여!

현종은 양옥환과 만난 지 6년이 되는 745년에 그녀를 귀비로 책봉한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것이다.

한편 당나라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변경 지방의 절도사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함에도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녀의 친인척들을 무더기로 요직에 등용시켰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楊釗)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양국충(楊國忠)은 급부상하여 재상인 이임보와 겨룰 정도가 되었고, 752년 이임보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돌궐족 출신의 젊은 장군 안녹산(安祿山, 703년?~757년)도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렸다. 그녀는 그를 양자로 맞아들였는데 실제로는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처럼 든든한 배경을 지닌 안녹산은 20만 대군의 통수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양국충의 권세를 질투하여 황제를 배반하고 755년 말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안녹산은 15만의 병력을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동북의 여러 성(省)들을 점령했고 756년 여름에는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현종은 몇 명의 대신과 환관, 양국충과 양귀비, 그리고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양국충 가문의 세력 기반인 사천(四川)으로 피난을 떠났다.

현종의 피난 일행이 마외(馬嵬)에 도착하자 수행하던 군사들이 불만을 폭발시켰다. 병사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재상 양국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양국충의 목을 베었다. 이어서 성난 병사들은 현종에게 ‘도적의 근본’인 양귀비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현종은 "양귀비는 심궁에 있었고, 양국충의 모반과는 관계가 없다."고 감쌌지만 병사들의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현종은 눈물을 삼키며 양귀비에게 자살하라고 명하였다. 양귀비는 목매달아 죽었다.

양귀비가 죽은 지 10여일 후에 장안이 함락되었다. 현종은 계속 촉나라 땅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곳곳에서 현종의 피난길을 막고 싸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종은 황태자에게 백성을 달래라고 한 뒤 피난을 계속하였다. 태자는 현종에게 백성들의 뜻을 받아들이자고 간언하였다. 이에 현종은 양위를 선포하였다. 황태자 이형은 계속 사양하다가 결국 받아들여 756년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숙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도 1592년 한 해 동안에 5번이나 양위를 하였다. 그러나 세자를 비롯하여 신하들이 모두 양위를 말리자 선조는 못이긴 채 하고 임금을 계속하였다. 선조는 비겁하고 교활하다. 충성 서약을 확인하기 위하여 양위 소동을 벌이었고 서자인 광해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편 757년에 장안으로 다시 돌아온 현종은 양귀비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눈물로 날들을 지새웠다고 한다. 현종은 슬픔과 통한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762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나중에 시인 백거이(772~846)는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노래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장한가는 끝없는 한의 노래이다. 슬픈 사랑의 노래이다. 장한가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자.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고
높은 하늘도 드넓은 땅도 다할 때가 있으련만
이 슬픈 사랑의 한은 끊길 때가 없으리.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중국 전설의 새이다. 연리지(連理枝) 또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인 나무로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한편 이 시기에 살았던 시성(詩聖) 두보(712~770)도 안녹산의 난리에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에 끌려갔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그는 피폐된 장안성을 바라보며 나라와 가족걱정을 하면서 춘망(春望) 시를 짓는다. 가히 시사(詩史)이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변치 않았는데
장안에도 봄이 와서 초목이 무성하네.
시절이 비감하여 꽃을 보아도 눈물 흘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마음이 놀라네.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