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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문창의 격문에서 역사를 배우다.(1)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6회 남문창의 격문에서 역사를 배우다.(1)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장성남문창의 격문은 의역(意譯)이다. 원문이 일반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워 의역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문창의격문 원문을 제대로 해석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야 장성남문 의병 창의 배경과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먼저 원문부터 읽어보자.

鳴呼衰老不侫之人謹告同盟有志之士 依藜筇於斗極莫非祖宗遺民沐華髮於恩波盡是聖朝仁化序毛 周社擊壞堯衢盖二百年之隆雖千萬世可忘何圖 國運中替島夷外狺蠢彼侵阮徂共之師敢爲滅虢取虞之計 北軍渡江之語不幸近之南朝無人之譏誠可痛矣肆我 聖上竊爲太王之去邠暫勞明皇之幸蜀 三軍雪涕激勵敢死之忱千里行朝丁寧來救之望 嗟我湖南五十州郡豈無義氣一箇男兒擊楫誓江方切士雅之輸悃推鋒爭死盍効岐民之報恩不佞齒 雖臨衰志切敵愾示上馬之勇伏波之心益堅畜揚鷹之威太公之氣猶壯 是以招諸州父老豪傑會本縣南門義廳 送子弟替討竿旗影從聚糗粮助供斗栗箕斂 壯士揮淚宜感卽墨之忱十月出車必報涇陽之捿 洗劒滄海旋軫長安虎符龍節將有褒忠之榮金券丹書應被策勳之寵一乃心力其克有功
一五九二年 七月 二十日

원문을 단숨에 번역하고 해설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와 <장성남문의병과 오산창의사>책의 도움을 받아 한 부분씩 번역하고 해설하여 본다.

아아 노쇠하고 못난 사람이 삼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에게 고합니다. 청려장을 짚고 북극의 별을 바라보며 생각하니, 신민 누구나 조종의 유민으로 성은을 입지 않은 자가 없으니 이는 모두 우리 성조(聖朝)의 인화(仁化)라 아니랄 수 없습니다.

鳴呼衰老不侫之人謹告同盟有志之士 依藜筇於斗極莫非祖宗遺民沐華髮於恩波盡是聖朝仁化序毛

여기에서 청려장이란 명아주대로 만든 지팡이인데 주로 은둔하는 선비가 짚고 다닌 것으로 은사(隱士)를 상징한다. 성조(聖朝)는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는 조정을 뜻한다.

다음을 읽어보자.

주나라처럼 예악이 갖추어져 나라가 안정되고 요임금 때처럼 거리에 격양가와 강구가 소리 높은 태평성대가 대개 200년 동안 융성했으니, 비록 천만세가 지난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周社擊壞堯衢盖二百年之隆雖千萬世可忘何圖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조선은 큰 외침(外侵)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태평시대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격양(擊壞)과 요구(堯衢)라는 단어이다.

먼저 요(堯)이다. 요는 중국 당(唐)나라를 다스린 신화(BC 2천년 이전) 속 군주인 요(堯)임금을 말한다. 그는 다음 대인 우(虞)나라 순(舜)임금과 함께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중국 문화권에서는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 요순임금이라 하고, 백성을 가장 편안하게 한 태평성대를 일컬어 요순시대(堯舜時代)라 부른다.

다음은 격양(擊壞)과 구(衢)의 의미이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과연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평민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요임금이 넓고 번화한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이 노래 부르며 놀고 있어 그 노랫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우리 백성들을 살게 하는 것은(立我烝民), 그대의 지극함 아닌 것이 없다(莫匪爾極),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不識不知), 임금의 법에 따르고 있다.(順帝之則)”

그 뜻은 임금님이 인간의 본성에 따라 백성을 인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법이니 정치니 하는 것을 염두에 두거나 배워 알게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임금님의 가르침에 따르게 된다는 것으로, 이 노래가 바로 강구가(康衢歌)이다.

요임금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쉬고(日入而息), 우물 파서 마시고(鑿井而飮), 밭을 갈아 먹으니(耕田而食),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帝力于我何有哉)”

이 의미는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낄 필요조차 없는 정치가 진실로 좋은 정치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격양가(擊壞歌)라 한다.

이런 노래를 들은 요임금은 크게 만족하여 “과연 태평세월이로고” 하였다 한다.

격양가 스토리를 알고 나니 문득 노자의 정치철학이 생각난다. 통치자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다스리는 정치, 무위(無爲)의 정치 말이다.

이어서 다음 부분을 읽는다.

그런데 무슨 일로 국운이 중간에 쇠퇴하고, 섬 오랑캐가 밖에서 으르렁거리며 꿈틀거려 완나라를 침략하고자 공나라로 가는 군사가, 감히 괵을 멸하고 우를 취하려는 계책을 옮기고 있습니다.

國運中替島夷外狺蠢彼侵阮徂共之師敢爲滅虢取虞之計

완․공․괵․우는 중국 춘추시대(BC 770~403)의 나라이름이다.

‘괵을 멸하고 우를 취하려는 계책(멸괵취우지계 滅虢取虞之計)’이란 우나라의 길을 빌려서 괵나라를 멸한 후 다시 우나라를 취하는 계책을 말한다. 소위 가도멸괵(假途滅虢)이란 고사(古事)인데 천자문에도 나온다. 이 가도멸괵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와 일맥상통한다.

춘추시대 중엽(BC 655년)에 진(晋)나라의 헌공(獻公)이 괵(虢)나라를 칠 생각으로 책사(策士) 순식에게 물었다. 내용인즉 괵나라로 가는 중간쯤에 우(虞)나라가 있어서 반드시 그곳을 지나가야 했는데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헌공의 물음에 순식이 답하였다.

“우나라의 왕은 욕심이 매우 많으므로 왕께서 좋은 구슬과 명마(名馬)를 보내면서 길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면 가능할 것입니다.”

헌공은 순식의 말대로 선물들을 보내니 우나라 왕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지만 우왕도 돌다리도 두드린다는 심정으로 현인 궁지기(宮之寄)와 의논을 한다.

진헌공의 속셈을 알고 있는 궁지기는 우왕에게 간언한다.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필히 위험해 질것입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고 했습니다. 우나라와 괵나라는 마치 이(齒)와 입술(脣)과 같은 관계입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명품 보석과 명마에 눈이 어두워진 우왕은 “진과 우리는 동종(同宗)의 나라인데 어찌 우리를 해칠 리가 있겠소?”라며 듣지 않았다. 궁지기는 “우리나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우나라를 떠났다.

아닌 게 아니라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군 중에 다시 우나라를 함락시켜 버렸다. 궁지기의 충언을 무시한 우나라 왕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는 말은 우와 괵나라를 두고 나온 것이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에 요구한 것이 바로 정명가도(征明假道)이다.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요구를 들어 줄 리 없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일본의 정명론(征明論)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미 조선 조정에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1590년 4월에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한다. 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이었다. 이들은 11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1591년 1월에 귀국한다. 이 때 조선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조에게 보낸 답서를 가지고 귀국한다. 답서의 요지를 읽어보자.(1591년 3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참조)

왜인의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사람의 한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으로 가서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황제의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를 억만년토록 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귀국이 먼저 달려와 입조(入朝)하기 바랍니다. 원대한 계획이 있으면 가까운 근심은 없어질 것입니다.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국에 들어가는 날 귀국의 장수가 사졸을 거느리고 나의 군영(軍營)에 이르게 한다면 이웃 간의 동맹이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

이런 답서를 가지고 온 황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보고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후 조선통신사는 선조를 만난다. 이 자리에서 황윤길은 지난날의 보고내용과 같은 의견을 선조에게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라고 아뢰었다.

선조가 묻기를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략과 지략이 있는 듯 하였습니다.”하였다.

반면에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라고 엇갈린 답변을 하였다.

김성일이 어전을 나오자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김성일은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당시에 조정은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선조는 서인의 황윤길 보다 동인의 김성일 말을 더 믿었다. 선조는 김성일이 통신사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고 당상관으로 승진시켜주고, 나라를 방비하는 모든 일들을 그만두어 버렸다.(안방준, 임진기사, <국역 은봉전서> P 302)

1591년 3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을 읽어 보면 너무나 어이없는 일들이 여러 가지이다.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이 ‘내년에 길을 빌어 명나라를 침범할 것이다.’고 확언하는 왜나라 사신 현소의 말을 듣고서 조정에 즉시 심각성을 보고하여도 오히려 오억령을 체직시키고 응교 심희수로 대신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조헌이 화의를 공격하는 소장(疏章)을 올렸으나 아예 답이 없고, 이 일에 대해서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케 하는 것이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한마디로 선조 임금과 조정의 집권세력은 귀를 막았다. 전쟁은 아예 없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경시, 잘못된 정세 판단. 그리고 선조와 집권층의 무사안일로 조선은 아무런 준비 없이 임진왜란을 맞았다.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예외였지만.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