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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천 김경수, 기효간 · 윤진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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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김경수, 기효간 · 윤진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다. 이미지 1
제5회 오천 김경수, 기효간․윤진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다.

1592년 7월 18일에 전 예조좌랑 김경수(1543~1621)는 사촌동생 전 판관 김신남 및 두 아들 극후, 극순을 이끌고 곧장 장성현 남문에 나가 장차 의병청을 설치코자 편지로 기효간, 윤진 등을 불렀다.

50세의 김경수는 장성현 오산리 죽남마을에 살고 있었다. 성안에 서 남문까지는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는 사촌 동생 김신남 (1552~1598)을 부른다. 김신남은 김경수의 셋째 큰 아버지 김응삼의 아들인데, 이 때 그는 40세로서 김경수의 핵심 참모역할을 하였다.

김경수의 큰아들 김극후(1562~1593)는 31세이고, 둘째 아들 김극순(1567~1593)은 26세로서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7월 19일에 김경수는 또 남문에 이르러 기효간과 윤진을 기다렸다. 이윽고 기효간과 윤진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왔다.

두 사람을 보자 김경수는 그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라가 어렵고 위태롭기 지극한데 제공(諸公)은 어떻게 국은에 작은 보답이라도 하기 위해 힘쓰겠소.”

기효간이 말하였다. “동래의 변(變)을 들은 후부터 발을 디뎌도 땅이 밟히지 않고, 무엇을 먹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으나, 혼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소.”

여기에서 동래의 변이란 넓게 해석하면 임진왜란, 좁게 해석하면 동래성이 함락된 것을 말한다. 동래성 전투에서 장성 사람인 양산군수 조영규가 전사한 것은 동향(同鄕)인 기효간에게는 충격이었으리라.

김경수가 다시 말하였다. “내가 일을 추려 보기 오래였소. 수 백 년 사기를 배양한 것은 과연 오늘을 기다림이 아닙니까. 우리들은 어찌 한번 죽음을 마다하리오.”

기효간이 답하였다. “우리들의 뜻도 역시 다름이 없소. 그대가 차례대로 일을 진행하면 우리들 또한 마땅히 뜻을 모아 거의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소.”

다시 김경수가 말하기를 “먼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낸 뒤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으는 것이 좋겠소.”하였다.

그러자 기효간과 윤진이 동시에 “좋소.”하였다.

김경수와 기효간은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 하서 김인후에게서 같이 공부를 배웠고, 당시에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정윤룡, 변이중과 더불어 오산 4강단(鰲山 四講壇)이라 하였다.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 1530~1593)은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다. 세조실록 6년(1460년) 12월 29일자에는 기건의 졸기가 적혀 있다.

중추원사 기건의 졸기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奇虔)이 졸(卒)하였다. 기건은 기현(奇顯)의 후손인데,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郡民)들이 붕어[鯽魚]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鰒魚]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두어 도의 관찰사와 대사헌을 역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기씨 가문은 본관이 행주이고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는데 1519년 기묘사화로 귀양 간 기묘명현 복재 기준(고봉 기대승의 작은 아버지)이 1521년 신사무옥 때 목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지자, 이에 상심한 기준의 둘째 형 기원은 장성으로, 바로 위 형 기진은 광주로 이사를 내려온다.

기효간은 장성에 정착한 기원의 후손으로 아곡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외모는 엄격하였다. 이는 소학의 법도를 널리 익혔기 때문이다. 그는 효성도 지극했다. 부친 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며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산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 하였다 한다.

기효간은 하서 김인후(1510~1560)에게 배웠는데 하서는 내 정통을 이을 사람은 오직 그대라 하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공자의 참된 기운 주자에게 전하여졌네.
학문에 잠긴 마음 의혹하지 말고
병들어 쇠약한 이내 몸 위로하게.

한번은 노년에 접어든 하서는 그를 찾아 온 제자 기효간에게 이런 시를 지어준다.

푸른 산 아래 내 집이 있다오.
푸른 바다 윗머리 그대가 사오.
지는 햇빛, 가을이 깊은 줄 이제 알겠구려.
이 시름 차마 누를 길 없소.

기효간은 시간이 있는 대로 종숙(從叔)되는 고봉 기대승(1527~1572)에게 찾아가 학문의 의문점을 토의하였다. 기효간은 한 평생 조용히 살았다. 이는 아마 증조인 복재 기준의 기묘사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진(尹軫 1548~1597)은 호가 율정(栗亭)으로 장성 출신이다. 그는 양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성삼문․박팽년과 친하였는데 단종 폐위와 관련하여 장성으로 은거하였다. 윤진은 아버지 윤강원의 유배지 양구에서 태어났다. 판교 윤강원은 1545년에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인 정순명․이기의 기분을 거슬렸다 하여 곤장을 맞고 양구에 유배되었다.

윤진은 어려서부터 근엄하고 성인다운 기상이 있어 하서 김인후가 보고 칭찬하여 앞으로 큰 재목이 되리라 하였다. 그는 원대한 꿈을 안고 성장하면서부터 학문에 전력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친 후 참봉(參奉)에 임명되고 뒤에 봉사(奉事)로 전보하였다. 1590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치고 왜적이 국경을 침범하자 가족과 같이 장성으로 돌아왔다.

한편 김경수, 기효간, 윤진이 서로 회합을 하고 있을 때 장성 현감 백수종이 남문에 왔다. 그는 “힘쓰고 힘써 중흥을 도모합시다.”라고 하였다. 관민이 합심하여 국난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장성현감 백수종은 중도에서 군사를 되돌린 전라관찰사 이광(李洸에게 전열을 정비하여 왜군과 싸울 것을 건의한 사람이다.

1592년 5월초에 전라관찰사 이광은 전라도 군사 8천명을 이끌고 북상한다. 그런데 충청도 공주에 이르러서 선조임금이 평안도로 피신을 하고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을 자진 해산시키고 전주로 돌아온다. 아울러 군사를 이끌고 금강 방면에 나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조방장 이유의에게 소환령을 내려 후퇴시킨다.

이럴 즈음에 장성현감 백수종, 광주목사 권율, 전 첨사 백광언, 고산현감 신경희 등이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싸울 것을 전라관찰사 이광에게 건의하였으나 이광은 듣지 아니하였다.

이광, 참으로 비겁하고 무능하다. 아니 반역행위를 하였다. 그래서 그는 7월 22일에 백의종군하게 되고 귀양까지 간다. 심지어 1593년 10월 26일에는 선조가 이광을 처참하라고 까지 전교를 내린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광의 처벌과 관련된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선조 25년(1592년) 7월 22일 6번 째 기사

비변사가 위급할 때 물러난 전 감사 이광을 백의종군시킬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前) 감사 이광은 낭관(郞官)의 관직에서 5~6년이 되지 않아 정경(正卿)의 반열에 뛰어올랐는데도 털끝만큼도 은혜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만을 상책으로 삼습니다. 이는 국가의 위급을 강 건너 남의 일 보듯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도내 의사(義士)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부득이 근왕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되어 먼저 스스로 무너져 퇴각하였습니다. 이를 치죄(治罪)하지 않으면 국가의 형정(刑政)이 크게 무너져서 끝내 유지할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백의종군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따랐다.

선조 26년(1593년) 10월 26일 4번 째 기사

이광을 처참할 것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이광은 즉시 처참(處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다시 잡아다가 국문할 것으로 비변사에 이르라.”

이윽고 날이 저물어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은 모임을 끝내고 돌아갔다.

7월 20일에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은 함께 남문루에 도착하여 곧 격문을 작성하였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장성남문창의 격문비가 있다. 이 비는 1986년에 세워졌는데 여기에 적힌 격문을 읽어 보자.

아! 이 못난 늙은이가 삼가 뜻있는 선비들에게 고하노라. 지팡이를 의지하여 북녘하늘을 우러르니 슬프도다. 거리마다 격양가 드높은 태평성대를 200년이나 누렸음은 모두가 성조의 덕화일지니 천만세가 지난들 어찌 국운을 잊을쏜가.

불행히도 나라의 운수가 기울어 섬나라 오랑캐들이 조선을 침노하니 강산은 초토화되고 백성은 짓밟히고 있어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다.

삼군(三軍)은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충절을 다하고 있거니와 천리 밖 의주의 조정에서는 우리의 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도다.

아아, 호남의 오십 주군(州郡)에 어찌 의기 있는 남아가 없으리오? 지사(志士)들이여, 모두 일어나 의로운 칼을 들어 나라를 구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지어다. 내 비록 몸은 늙었으나 말에 오르니 힘이 솟고 분한 마음에 적개심이 불타오른다.

각 고을의 선비 호걸들이여,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모이시라. 우리와 우리 장정들이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진격하면 뒤따르는 자 구름같이 모일 것이요, 군량은 산더미처럼 거두어지리라.
우리 모두 통분의 눈물을 뿌리며 죽음으로서 나아갈진대 반드시 대첩을 거두리라. 왜적을 섬멸하여 창해에 칼을 씻고 한성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국은에 보답하고 청사에 길이 공훈을 새길진저!

선조 25년(1592년) 임진 7월 20일

장성 남문 의병청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장성 남문 창의 격문비(천안 독립기념관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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