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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남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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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호남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다.

고경명이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도 백성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모두 다 원통하게 여겼다. 특히 호남의 선비들은 고경명의 순절 소식에 장성의 오천 김경수처럼 분노하였고,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으로 참여한 바 있는 우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은 <은봉전서> “연평부원군 이귀에게 1632년(인조 10년) 11월에 보내는 편지”에서 고경명의 순절이 호남을 살렸다고 적고 있다.

이귀(李貴 1557~1633)는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1593년에 장성현감을 한 바 있다.

아!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은 호남이 보전된 데 연유하고, 호남이 보전된 것은 여러 의병이 봉기한데 연유하고, 여러 의병이 봉기한 것은 제봉 고경명이 앞장서 일을 추진한데서 연유합니다.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고 7도가 어육이 되었는데도 성문을 지키던 여러 장수들은 쥐처럼 숨어버렸으며, 각 고을의 수령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가 궤멸되었습니다. 국가의 형세를 결코 수습할 수 없게 되자 제봉 고경명 3부자가 홀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고경명은 수천명을 이끌고 근왕 길에 올랐습니다.

충청도의 왜적이 전라도로 넘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국가의 뿌리가 되는 곳을 먼저 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곧 금산으로 의병을 되돌려 여러 날 힘껏 싸웠습니다. 고경명은 비록 중과부적으로 순절하였지만, 왜적의 형세가 위축되어 호남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의병장 고경명이 죽자 그의 아들 임피현령 고종후가 복수장으로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오유가 부장이 되었고, 진사 문홍헌이 능성(능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담양부사 최경회를 추대하였으며, 소생의 스승(죽천 박광전을 말함)이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병(病)으로 군대를 이끌 수 없게 되자 진보현감 임계영을 대장으로 삼고 전 만호 장윤을 부장으로 삼았으며, 참봉 변사정이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잠을 부장으로 삼았으며, 강희열이 광양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강희보가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 외에 정충훈 ․ 민여운 ․ 이계련 등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안방준 저 ․ 안동교 역주, 국역 은봉전서 p123-124에서 인용)

사실 그랬다. 호남의 선비들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장성 남문에서 김경수가 창의하였듯이, 보성의 박광전과 임계영이 그러하고 화순의 최경회가 그랬다.

박광전과 임계영은 7월 20일에 보성관아에서 전라좌의병을 결성하였다. 보성관아에 모인 700명의 의병들은 장흥․낙안․순천에 이른 뒤에 순천에서 장윤이 이끄는 의병 3백 명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8월 9일에 남원에 들어간다.

한편 화순의 최경회도 7월 26일에 문홍헌 등과 함께 거의하여 화순 지역 의병과 함께 고경명 휘하의 흩어진 의병 8백 명을 흡수한다. 장수현감, 담양부사를 한 최경회의 전라우의병은 8월초에 담양․순창을 지나 남원에 도착하여 고득뢰의 군사 6~7백 명과 합류한다.

이리하여 이들 전라 좌․우의병은 영남에서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목 베고 왜적이 감히 호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편 의병장 고경명의 체백(體魄)은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왜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얻어냈다.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는데, 무더위와 장맛비를 많이 겪었지만 신색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아서 보는 이가 이상하게 여겼다.

고경명의 시신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 지나는 곳 마다 백성들이 탄식하고 슬퍼했으며, 혹은 찾아와서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10월에 고경명은 화순현 흑토평(黑土坪) 벌에 안장되었는데 장사를 치른 그 이튿날에 풍설이 몰아치고, 무지개가 묘의 왼편에서 일어나 수 십리를 뻗치어 광채가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충분(忠憤)의 감동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고경명은 묘 자리가 마땅치 않아 장성현 오동리로 이장을 하였다. 지금의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 제봉산 아래이다. 장성은 부인인 울산김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고경명의 부인은 홍문관 부제학 김백균의 딸이다.

고경명 묘소 들어가는 입구에는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명은 해평부원군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지었다. 비문은 1608년에 지었는데 비문에는 고경명의 여섯 째 아들 고용후가 윤근수에게 부탁하여 비문을 지었다고 적혀 있고, 여기에는 고경명이 금산전투를 치른 내용과 그가 순절한 후에 호남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일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도비문의 맨 마지막 부분인 명문(銘文)을 읽어 보자. 문장이 심금을 울린다.

장원급제하여 순절한 분은 옛날의 문산(문천상 文天祥)인데
우리 님이 또 나시어 그와 함께 참으로 백중(伯仲)일세(엇비슷하네).
壯元死國 古有文山 장원사국 고유문산
惟公代興 寔伯仲間 유공대흥 식백중간

여기에서 문산(文山)은 중국 남송(南宋 1127년에 개국하여 1278년에 멸망)말기의 재상으로서 중국에서 대표적인 충신으로 일컫는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진사시에 장원하였는데 벼슬살이 동안 내내 원(元)나라에 대항하였다. 스스로 재산을 털어 의병 1만 명을 모집하여 싸웠고 여러 해 동안 항몽운동을 하였다. 남송이 멸망한 후 익왕(益王)을 도와 남송 회복에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되었다. 그는 3년 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두 눈이 멀었고,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가 그에게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였지만 끝내 거절하고 처형되었다.

문천상이 처형 직전에 읊은 정기가(正氣歌)는 너무나 유명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의 위엄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정기(正氣)를 지녔기 때문이다."

고경명의 문집 <정기록(正氣錄)>의 책 제목도 문천상의 정기가(正氣歌)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헛된 과명(科名 과거 급제자) 아니로세.
문장은 인재를 넘나들고 절의는 삶을 잊었네.
人亦有云 不愧科名 인역유운 불괴과명
文冠多士 節則忘生 문관다사 절칙망생

국난에 눈물짓고 고군(孤軍)으로 굳세게 항쟁
부자 함께 목숨 바쳐 천리(天理)를 보전했도다.
灑泣國難 孤軍抗勁 쇄읍국난 고군항경
毁魄全天 父子倂命 훼백전천 부자병명

죽었지만 죽지 않아 그 정신(精神) 열렬하여
눈을 어찌 감으리오. 적의 멸망 보고야 말지
死而不死 其神烈烈 사이불사 기신열열
目不可瞑 誓見賊滅 목불가명 서견적멸

충성 보답 벼슬 내려 유혼(遺魂)을 위로하니
우리 님 지하(구원)에서 나라 은혜 감사하리.
㫌忠錫秩 以慰遺魂 정충석질 이위유혼
公在九原 再拜湛恩 공재구원 재배담은

구원(九原)은 중국 진(晋)나라 귀족들의 묘지가 구원산(九原山)에 많이 있었는데, 후세에 묘지를 구원이라 불렀다 한다.

님 또한 시(詩) 잘 지어 빛나 빛나 천편이라.
문단을 주름잡아 모든 작가 앞을 이루었네.
公深於詩 炳烺千編 공심어시 병랑천편
悼鞅詞林 作者推先 도앙사림 작자추선

문장이랑 충의를 한 몸에 갖추기란
옛날에도 드물거늘 님에게서 보겠구려
文苑忠義 合爲一傳 문원충의 합위일전
在古鮮覯 於公乃見 재고선구 어공내견

신천(新阡)이 울창하여 상현(象賢)을 비호하니
천년이 지나도록 정광(精光)이 뻗치리라.
新阡欎然 大庇象賢 신천울연 대비상현
有來千年 精光燭天 유래천년 정광촉천

여기에서 상현(象賢)은 자손이 선왕의 현명을 본 딴 것을 말한다.

한편 1592년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고경명의 충의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임금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선조가 면유(面諭)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명(命)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하였다.

경명의 자는 이순, 호는 제봉이다. 풍류와 문채는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바였으며 중년에는 벼슬길이 막혔으나 조용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리에 임해서 절개를 드러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일찍 기용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의 시는 대가로 불리워졌으며 유고가 세상에 전한다.
의병장 고경명! 그는 그의 좌우명처럼 세독충정(世篤忠貞 인간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을 몸소 실천한 구국(救國)의 의사(義士)이다.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세독충정 글씨
2. 고경명 묘소
3. 고경명 신도비
4. <정기록>의 고경명 신도비명(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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