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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병장 고경명,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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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의병장 고경명,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다.

7월 하순(7. 21.~7. 27.) 1주일간 KBS 1 TV ‘한국의 유산’에서 의병장 고경명이 방영되었다. 의병장 고경명이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는 방송내용이 사뭇 감동적이다.

평생 글에 힘썼던 고경명은 두 아들과 함께 분연히 칼을 들었다.
임금과 고관대작들이 피난 가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비록 금산 전투에서 아들 고인후와 함께 순절하였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병장 고경명 ! 의(義)로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애국정신의 표상이다.

1592년 7월 10일에 있었던 금산 전투는 <선조수정실록>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경남의 <난중잡록>, 신경의 <재조번방지>, <국조보감>, 윤근수의 <신도비명>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러면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여 당시의 전투를 정리하여 보자.

7월 9일에 고경명은 방어사 곽영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이 말에서 떨어져 후퇴해 달아나자 왜군이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

석양 무렵에 이르러 왜군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들어가게 하고,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또 진천뢰(震天雷)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날이 저물자, 양쪽은 각기 군사를 거두었다.

방어사 곽영은 고경명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 날 같이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이 때 큰 아들 고종후가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으니 이 승리한 형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왜군과 진지를 마주 대하여 들판에서 잔다면 밤중에 습격을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하였다. 이에 고경명은 “네가 부자간의 정으로 내가 죽을까 걱정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을 따름이다. 그것이 나의 소임이다.”라고 하므로, 고종후는 다시 말을 못하였다.

7월 10일 동틀 녘에 고경명은 다시 방어사 곽영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였다.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고경명은 기병 800여 명을 데리고 서문을 공격하였다. 이때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수천 명의 왜군이 고함치면서 달려 나왔다.

왜군은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관군을 공격하니, 관군의 선봉장인 영암 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달아났다. 이어서 왜적은 광주․흥덕 두 고을의 관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방어사 곽영의 진에서는 멀리에서 바라만 보다가 도망쳐 버렸다.

의병장 고경명은 혼자 감당할 생각으로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버티어 기다리게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급한 소리로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고 외쳤다. 대 혼란이 일어나고 의병진도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고경명은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말 타는데 숙달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게 되면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고경명에게 말을 타고 달아나기를 청하니, 고경명이 말하기를, “내 어찌 구차스럽게 죽음을 모면하려 할 것이냐” 하였다. 부하들이 고경명을 말에 태웠으나 금방 말에서 떨어지고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이 말에서 내려 고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이윽고 왜적이 고경명에게 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때 좌부장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 하인에게, “대장은 모면하였는가?”라고 물으니, “아직 못나왔습니다.” 하였다. 유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가니, 이에 고경명이 유팽로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달려 나가거라” 하였다. 유팽로가 말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남자가 군사를 도모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거기에서 죽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왜적의 칼이 다가오니 유팽로가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웠다. 고경명은 유팽로․안영 등과 함께 죽었다. 이때 고경명은 60세, 유팽로는 29세, 안영은 28세이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유팽로와 안영에 대하여 알아보자.

안방준이 쓴 <은봉전서>의 ‘호남의록’을 보면 유팽로는 고경명을 구하려 다시 적진으로 갈 때에 하인이 말을 끌어당기며 가지 말라고 읍소하였다 한다. 그때 유팽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하인의 손목을 베니 하인은 부득이 말고삐를 놓고 뒤따랐다. 참, 드라마틱한 이야기이다.

유팽로는 옥과(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사람으로 성균관 학유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와 담양에서 이종 간인 남원출신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만나 창의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는 피난민 5백여 명과 하인들 1백 명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고경명의 막좌가 되었다.

유팽로는 고경명에게 제갈량과 같은 책사이었으나 눈이 애꾸인데다가 용모도 볼품이 없어 주변의 장수들이 그를 업신여기었다. 안방준은 <은봉전서>에서 유팽로가 금산 전투에 임하면서 “금산의 왜적은 그 무리가 수 만 명이니 우리의 군사로는 대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여러 군사들이 힘을 합쳐 험난한 요새를 점거하고, 적이 교만에 빠져 태만해지기를 기다려 정예병을 선발하여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간언을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신위는 광주의 포충사, 충남 금산군 칠백의총 안의 종용사에 있고, 곡성군 옥과면에는 정렬각이 세워져 있다. 최근에는 곡성군에서 그에 대한 숭모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안영은 남원 사람으로 기묘명현 안처순의 증손자이고 청백리 이후백의 외손자이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공부는 주로 백부 안창국이 가르쳤다. 그는 스무 살에 고암 양자징의 딸과 결혼하였다. 양자징은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고 하서 김인후의 사위이다. 필암서원에는 양자징의 신위가 김인후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안영의 어머니는 서울 친정에 있었다. 안영은 모친을 찾아 서울로 가려는데 난리 통에 길이 막혀 버렸다. 그는 유팽로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고경명을 찾아가 고경명의 종사관이 되었다. 안영은 고경명을 시종 모시면서 죽음도 그와 함께 하였다.

금산 전투 후에 왜적들이 물러나자 그의 백부가 의승군의 조력으로 안영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가 찼던 칼의 칼집에는 성(姓)이 전자 篆字로 새겨져 있었고 허리 사이의 비단 주머니에는 충효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비단 주머니 글씨는 부인 양씨가 수놓은 것이었다. 그의 신위는 광주 포충사, 충남 금산 칠백의총 내 종용사와 전북 남원시의 정충사에 모시어져 있다.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도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고인후는 158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의 정도로 보아 홍문관이나 한림원에 배치하여야 하는데 당시에 고경명이 미움을 받던 터라 성균관 학유로 발령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고경명, 형님 고종후와 함께 최전선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금산 전투 때에도 그는 왜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군사들을 재정비하여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때 나이 32세이었다.

의병장 고경명의 큰 아들 고종후도 아버지를 구하려고 적진으로 뛰어 들려고 하였으나 주변에서 “그러면 누가 부친과 동생의 시신을 수습할 것이냐”고 강력하게 말리었다.

가까운 고을의 백성들은 고경명의 순절 소식을 듣자, 노소가 모두 짐을 싸매고 발을 구르며 “우리들은 이제 죽었다.”하고, 울음소리가 들판을 진동했다. 무너졌던 군사들은 그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차츰 모여 왔으나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부르짖고 울면서 흩어졌다.

한편 전라도를 점령하려던 왜군은 권율․황진과 이치전투를, 고경명과 금산전투를 연이어 치러서 전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전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금산 근처에 머물렀다.

김세곤(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충남 금산의 고경명 순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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