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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회 오천 김경수, 금산성 함락 소식을 듣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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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오천 김경수, 금산성 함락 소식을 듣다.

장성군청 광장에는 장성을 상징하는 비가 3개 있다. 문불여장성비, 백비,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가 그것이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장성에서는 문(文)을 논하지 말라. 학문과 문장은 장성이 제일이다. 필암서원의 김인후(1510~1560), 고산서원의 기정진(1798~1879). 이 분들이 문불여장성을 빛낸 인물이다. 하서 김인후는 문장과 도학과 절의를 겸한 선비로서,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에서 호남 유일의 유학자이다. 노사 기정진은 위정척사 운동을 벌인 한말의 거유로서 제자가 6백 명에 이르렀다.

백비(白碑)는 청백의 상징이다. 명종 때 명신 아곡 박수량(1491~1554)은 너무 청렴하여 명종이 그의 묘에 비를 세우면서 아무런 글도 쓰지 말라고 하였단다. 장성군은 2011년 9월부터 청백리 송흠(1459~1547)과 박수량의 청백리 정신을 배우는 청렴문화 체험교육을 하고 있는데, 금년 6월까지 전국 131개 기관에서 2만 명이 참여하였다. 이제 장성은 명실상부하게 청백의 고장이 되었다.

한편 장성은 의병의 고장이다. 장성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남문의병, 한말 때 기우만·기삼연이 항일의병 활동을 한 곳이다.

5월 31일 의병의 날에 장성군은 장성 의병활동의 재조명 - 의병활동 전개와 역사문화자원의 활용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군청광장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를 세웠다.

호남오산남문창의는 오천 김경수(1543~1621)가 맹주가 되어 전라도 여러 고을의 의사(義士)들이 참여한 것으로서 이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간 중 3차에 걸친 의병활동을 벌이었다.

이제 김경수를 중심으로 장성 남문의병의 길을 떠난다. 먼저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에 실려 있는 ‘남문일기’부터 읽는다.

1592년 7월18일

전 좌랑 김경수는 금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종제 전 판관 김신남 및 두 아들 극후 및 극순을 이끌고 곧 장성현 남문에 나가 장차 의병청을 설치하고자 기효간, 윤진 등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이를 읽어 보면 김경수는 장성현 남문에 나가 의병청 설치를 도모한다.

장성현은 지금의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鰲山里)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장성은 일명 오산(鰲山 자라 오, 뫼 산)이라 하였는데 이는 현청 옆에 금오산(金鰲山)이 있어 그러한 것이다. 금오산이란 이름은 자라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면 남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산리는 다섯 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교촌, 북창, 양막, 죽남, 학교촌 마을이 그것이다. 교촌은 항교가 있었던 곳이고, 북창은 북쪽에 있는 창고라는 의미이고, 양막 마을에는 말을 기르던 마장이 있었단다.

현장 답사결과 양막 마을 앞에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이 봉우리를 자라등이라고 부른단다. ‘작은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습과 같다‘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 읍성 공간구조로 보아 이 자라등 바로 앞 어느 곳에 장성현 관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문은 신흥역 앞에 있는 논 어디에 있다. 마을 사람들은 죽남마을 쉼터 바로 옆의 논을 ‘대문안 배미’라고 부르고 있었다. ‘문안에 있는 논’이라고 불렀으니 이 논 근처에 남문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구전에 의하면 옛 장성현 남문이 ‘당밑들’에 있었다 하니 ‘당밑들’은 대문안 배미 바깥 어디이다. 남문의 위치는 장성군에서 다시 고증과 면밀한 현장 확인을 하여 남문이 있었다는 표석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

한편 김경수는 금산성 함락 소식을 듣고 분개하였다. 금산성 함락은 1592년 7월 10일에 의병장 제봉 고경명(1533~1592)이 금산전투에서 패배하여 순절한 사건이다. 김경수와 고경명은 서로 막역한 관계였다. 고경명은 김경수의 사촌 형 김백균의 사위였다. 더구나 김경수는 고경명이 담양에 의병청을 설치할 때 집안 가동과 식량 그리고 장편전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고경명의 순절 소식을 들은 김경수는 너무 참담하였다. 제봉 고경명이 왜적을 무찌르겠다고 6천 명의 의병을 이끌고 나선지 20일도 채 안되어 순절하였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더욱이나 왜적의 손에 죽었다니 너무 분하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면 여기에서 임진왜란 발발과 고경명 의병에 대하여 살펴보자.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왜군 2만 명은 7백 척의 배를 타고 부산포에 상륙한다. 왜군은 다음날 부산성을 점령하고 4월 15일 동래성을 쳐들어갔다. 파죽지세였다. 왜군은 싸우기에 앞서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나무 목판 하나를 전달했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戰則戰矣)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不戰則假道)

즉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征明假道)을 터주라는 것이다.

약 100년 동안 계속 되었던 군웅할거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은 대 아시아제국의 건설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한다.

이에 송상현은 전투의 의지를 다지는 답신을 보낸다.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戰死易)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假道難)

왜군은 즉시 공격하였다. 참패는 시간문제였다. 왜군 2만 명과 조선군 2천 명의 싸움이었으니. 동래성은 곧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 양산군수 조영규(1535~1592)는 전사하였다. 조영규는 장성출신으로 나중에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이후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의 2만 2천 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1만 1천 명 등 왜군 22만 명이 조선에 속속 상륙하였다.

왜군 침략의 급보가 한양에 전해지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서는 순변사 이일을 보내어 적을 막으라 했다. 그런데 이일은 서울에서 군사 300명도 구하지 못하여 혼자서 전쟁터로 향한다. 그 뒤에 조정은 맹장 신립에게 적을 막으라 했으나 신립의 부대는 4월 28일 충주 벌판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채 전투를 벌이다 몰살하고 만다.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너무나 침통했다. 선조는 4월 30일 비 오는 칠흑 같은 새벽에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간다.

5월 3일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피난을 간다. 그리고 계속 몽진을 하여 6월 22일에 압록강 근처 의주에 도착한다.

조선은 그야말로 공포와 혼란 그 자체였다. 백성들은 물론 지방 수령들과 군인들까지 왜군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무기 조총이 ‘귀신 병기’라 하여 모두 무서워했다.

그런데 5월 초에 정말 어이없는 사건이 터진다. 전라도 군대 8천 명을 이끌고 서울로 북상 중이던 전라관찰사 이광이 선조임금께서 피난을 가고 서울이 왜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자 충청도 공주에서 갑자기 군대를 해산시켜 버린 것이다.

그는 “임금의 행차가 평안도로 가서 그 존망을 알 수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며 군사를 전주로 되돌려 버린다. 이런 상황은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듣자 전 수원부사 김천일(1537~1593)은 분함을 참지 못한다. 그는 고경명에게 먼저 전라관찰사 이광을 처벌하고 군사를 모아 북상하자고 편지를 보낸다. 5월 6일에 김천일은 고경명을 담양에서 만나서 이 일을 의논한다.

당시에 김천일은 은퇴하여 나주의 시골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임금이 피난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목 놓아 통곡하여 거의 기절하다가 다시 분연히 말하기를,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 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나는 신하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면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 하면서 창의거병을 결심하였다.

5월 16일에 김천일은 나주공관에서 뜻을 같이 한 선비들과 회합을 갖는다. 나주공관은 지금의 금성관 근처이다. 이 모임에는 송제민, 양산룡·양산숙 형제, 양산룡의 처가 사람인 유온·유경지, 김천일의 외가인 이광익과 이광주, 그리고 임환, 서정후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주로 나주, 남평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6월 3일에 김천일은 드디어 나주에서 거병한다. 의병은 300명이었다. 김천일은 피를 입에 바르고 의병들과 함께 맹세했다.

56세의 김천일은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는 사람들에게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 것 같다.”고 말하고 북상 길에 오른다.

한편 전 동래부사 고경명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에 살았는데,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전라감사 이광에게 글을 보내어 준절히 책망했다.

고경명은 박광옥, 유팽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여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모였다.

이 모임에는 고경명, 고종후·고인후 부자, 고경명의 조카 고성후, 사위인 노석령, 박회가 참여했으며, 옥과의 유팽로와 남원의 양대박, 양희적, 양정언, 안영, 이대윤, 이억수, 채희윤, 순창의 양사형, 장성의 강념, 영암의 박대기, 박승원·박장원 부자, 광주의 김덕홍(김덕령의 큰 형), 정귀세, 유사경, 박지효, 박대수, 신응화, 임실의 홍석방, 부안의 김영무, 김억일, 강진의 최우, 해남의 고몽룡, 동복의 정암수, 정유성, 능주의 고훈, 창평의 조효원, 함평의 박응수, 영광의 이인우, 남평의 정준일, 최후립·최홍립 형제 등 21개 읍 61명의 사림과 유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날 60세의 고경명은 맹주에 추대되었다. 그는 단 위에 올라 늙고 병들었음에도 맹주가 되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6월 11일을 거병할 날로 정하고 각 지역에 격문을 보내어 선비와 백성들이 많이 참여하도록 하였고, 제주목사 양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말(馬)을 수집했다.

1592년 6월 1일자 선조 수정실록에는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각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 전라·경상·충청도를 말함)의 장수와 신하들이 모두 인심을 잃은데다가 변란이 일어난 뒤에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道內)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이 유생등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하여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장성군청에 세워진 비 3개
2. 장성현청 근처(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3. 장성현 남문 터(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죽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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