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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를 마치면서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22회 연재를 마치면서

이제 ‘정유재란과 장성’ 연재를 마칩니다. 정유재란은 첫째 이순신에서 시작하여 이순신으로 끝났고, 둘째 호남은 초토화·황폐화 되었으며, 셋째 전쟁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많은 것을 가져가 융성을 이루었습니다.

정유재란 초기에 이순신은 하옥되었고 백의종군하였습니다. 7월 16일에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였고, 8월 3일에 이순신은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곧장 전라도로 달려왔습니다.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이순신은 선조에게 받은 ‘수군을 폐지하고 권율의 육군에 합류하라’는 편지에도 불구하고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란 장계를 써서 조정에 보냅니다.

9월 16일에 이순신은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무찌르고 왜선 31척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이 날의 ‘난중일기’에 ‘실로 천행(天幸)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여 함대가 80여 척, 군사가 8천 명에 이르렀으며,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도 합류하였습니다. 9월 하순부터 10월 초까지 조명연합 육군과 수군은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은 조선에 있는 왜군을 11월 15일까지 철수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를 안 이순신은 고니시 왜군을 치기 위하여 여수 장도로 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서로군 제독 유정은 밀약을 하여 고니시를 보내기로 하였고, 뇌물을 받은 진린도 고니시의 배가 남해로 가는 것을 허용하여, 사천 시마즈의 왜군들이 구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왜군의 협공을 우려한 이순신은 노량으로 가서 왜군을 치기로 하였습니다. 진린은 이를 말렸으나, 이순신이 뜻을 굽히지 않자 진린도 마지못하여 해전에 참여하였습니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부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선두에서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탄환을 맞았습니다.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하였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라도 사람들은 모두 통곡하였고, 늙은 할미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후 여수 해안가의 민초들은 스스로 충민사를 세웠고, 석천사 사찰에는 그의 영혼이 모셔졌습니다.

한편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었고 전라도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왜군 50개 부대가 전라도에 바둑판처럼 깔려 살육과 납치, 방화와 약탈을 납치를 자행했습니다. 한마디로 전라도는 쑥대밭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끌려갔고, 3만여 개의 코가 베어져서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특히 진원·영광에서 10,040개의 코가 베어졌는데 진원현은 전쟁 후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현(廢縣)되었습니다.

이런 피해 속에서도 호남사람들은 구례와 장성·남원·순천 등지에서 의병들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특히 장성 제3차 남문의병 활동, 윤진과 변윤중의 순절 등은 자랑스럽습니다.

한편 이 전쟁은 일본 입장에서 보면 노예전쟁, 도자기 전쟁, 약탈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은 도공을 납치하고 활자를 포함한 많은 문화재의 약탈로 도자 문화와 인쇄기술의 발전을 꾀하였고, 포로를 10만 명이나 잡아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거나 노동자로 고용하였습니다.

또한 포로로 끌려간 영광 출신 유학자 강항은 일본 숭려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 주자학을 가르쳤고, 세이카는 일본 유학의 비조(鼻祖)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 유학은 무의 사무라이에게 문을 가르쳐 에도 시대 군신(君臣)의 도리 정착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강항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한·중·일 3국의 국제전쟁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임진왜란이란 명칭은 ‘임진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동’이란 뜻이고 정유재란은 ‘정유년에 왜인들이 다시 쳐들어와 일으킨 난동’이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조선을 유린한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문록·경장의 역(役)’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를 따서 무미건조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오사카 성에서 본 이 전쟁의 영어 번역은 Korean Campaign이었습니다. 일본인의 꼼수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하기야 교토의 풍국신사 앞에 있는 코 무덤도 귀 무덤으로 불러오다가 요즘은 귀 무덤(코 무덤)이 되었습니다.

한편 중국은 이 전쟁을 ‘항왜원조(抗倭援朝)’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을 도운 시혜자로 자처하면서 대국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중국이 북한을 도운 것도 ‘항미원조’였습니다.

끝으로 이 글을 연재 하면서 느낀 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호남인의 자긍심입니다.

湖南國家之保障(호남국가지보장)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이순신이 1593년 7월 16일 친구 현덕승에게 보낸 이 편지 구절은 오늘날 호남 정신의 근간이 되었고, 호남 사람들은 국난에 처할 때 마다 이 말을 되새기며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둘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기념관 입구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납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한 번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유성룡의 저서 <징비록>이 말해 주듯이 조선은 철저히 반성하지 못하여 정유재란이 끝난 후 312년 만에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작금의 한·중·일 3국 관계는 그때와 흡사합니다. 역사전쟁은 진행 중입니다.

그동안 장성군청 홈페이지에 “정유재란과 장성”을 연재하여 주도록 지원하여 주신 장성군청 관계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