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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본 에도시대의 주자학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21회 일본 에도시대의 주자학
- 강항이 일본 주자학에 끼친 영향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의 만남은 1598년 9월 하순부터 강항이 귀국한 1600년 4월까지 1년 7개월간 계속되었다. 1600년 4월 2일에 강항은 세이카와 히로미치 등의 도움을 받아 교토 후시미 성을 출발하여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주1)

강항이 귀국한 후에도 세이카는 유학에 심취하였다. 또한 세이카는 의복에도 신경을 써서 나름대로의 옷차림을 고안해 냈다.

1600년 9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는 세기하가라 전투에 이기고 난 후, 세이카에게 강의를 부탁하였다. 예전부터 이에야스는 주자학의 신분질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초청을 받은 세이카는 유복(儒服)을 입고 이에야스를 찾았다. 이에야스는 세이카에게 잘 가르쳐 달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세이카는 강의를 시작하기 않았다. 의아해 하며 이에야스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묻자, 세이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군님의 복장은 제 강의를 듣는 복장이 아닙니다.”

몸을 가지런히 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당시에 이에야스는 간편복을 입고 있었다. 세이카의 말을 들은 이에야스는 옷을 정복으로 갈아입고서 세이카의 강의를 경청하였다.(주2)

이후 이에야스는 세이카에게 에도 막부에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이카는 이에야스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것은 1600년 10월에 자결한 아카마쓰 히로미치 때문이었다.

1600년 9월 15일에 세기하가라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는 히데요시 사후(死後) 정권 쟁탈전이었다. 결과는 이에야스 동군의 승리였다. 패배한 서군의 장수 이시다 미쓰나리(1563-1600)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를 당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친분이 깊었던 아카마쓰 히로미치도 자결을 명받았다. 이에야스의 분노를 산 것이다.(주3)

제자이면서 후원자인 히로미치를 잃은 세이카는 통곡하였다. 세이카는 히로미치의 죽음을 애도하며 만시를 30수나 지어 영전에 바쳤다.(주4)

이후 세이카는 주자학에 열정을 불태웠다. 세이카는 4천왕이라 불리는 수제자들, 즉 하야시 라잔과 마츠나가 세키고 · 호리교안 · 나와 가츠쇼와 함께 에도시대 유학을 꽃 피웠다.

그의 제자 중 에도 막부 유학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이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교토 오산중 하나인 겐닌지(建仁寺) 승려였던 라잔은 17세에 접한 <주자집주>에 감명을 받고 주자학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라잔은 세이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불교에서 유학으로 기울고 있었다.

1603년에 그는 공개석상에서 주자의 새로운 주석을 붙인 <논어>를 강의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기존의 박사 집안 출신인 기요하라 히데카타는 이에야스에게 이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학설을 선택하는 것은 학자의 자유라는 입장을 표명하여 히데카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도 유학은 이에야스의 이런 결단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주5)

1604년에 라잔은 요시다 소안의 소개로 세이카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라잔은 21세, 세이카는 43살이었다. 이 때 라잔은 이미 세이카의 문인들에게 <주자집주>를 강의할 정도로 주자학에 대한 내공이 막강하였다.


라잔(羅山)이라는 호는 스승 세이카가 “옛 사람은 나부(羅浮)에서 <춘추>를 읽었지만, 이제 나부(羅浮)는 나부에 있지 않고 자네의 밝은 창가 맑은 책상 위에 있다”라며 그를 나부산인(羅浮山人)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605년에 라잔은 스승 후지와라 세이카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슨푸성의 서고관리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이 해에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슨푸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라잔은 히데타다(1605년), 이에미쓰(1624년), 이에츠나(1655년)로 이어지는 에도 막부에서 4대째 대학두(大學頭)로 종사하여 ‘사상계의 쇼군’이라 불렸다. 이후 하야시 집안은 라잔 → 슌사이 → 노부아쓰로 이어지면서 대학두를 세습하였다.(주6)

세이카는 그때 까지 고잔(五山) 선승들의 교양의 일부였던 유학을 체계화해서 경학파(京學派)로 독립시켰다. 경학파는 세이카를 중심으로 한 주자학자 집단이 왜경 즉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경학파는 이황의 성리학을 기조로 하지만 이이의 학설이나 양명학을 수용하는 등 포섭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이카의 이런 학풍은 조선 절충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비하여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스승인 세이카가 육상산, 왕양명 등이 학풍을 수용하며 유학을 탐구한 것과는 달리 오로지 주자학만을 신봉했다. 양명학과 불교를 배제하고 철저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태도는 조선 퇴계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라잔은 철저한 퇴계 이황 신봉자였다.

한편 세이카의 4명의 제자 중 마츠나가 세키고는 기노시타 준안(1621~1698)과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 아메리모노 호슈(1668~1755) 등 막번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계보를 형성하였다. 아울러 호리 교안은 오와리 번의 유관이었고, 나와 가츠쇼는 기슈번의 유관으로 번의 유학계도 세이카의 제자들이 거의 장악하였다.


따라서 일본 사상계에서 세이카를 일본 근세 유학의 비조(鼻祖)라 부르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에도 시대 초기까지 일본은 무(武)와 불(佛)의 나라였다. 그런데 여기에 유(儒)가 결부됨으로써 일본의 정신문화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 사상사에서 에도시대가 그 이전 시대와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는 무(武)의 사무라이가 문(文)을 읽었다는 것이다. 문(文)을 통하여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었다.

에도 시대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사계급에서 하극상을 대신하여 군신(君臣)의 도리, 더 크게 말하면 삼강오륜의 유교적 윤리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文)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시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으로 뒷받침 한 이는 바로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그리고 세이카 뒤에는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온 전라도 영광 선비 강항이 있었다.(주7)

이제 19회부터 21회까지 3회에 걸친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또는 제2의 왕인(王仁)으로 불리는 강항에 대한 글을 마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강항은 지금 한국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에 신봉승 작가의 드라마 <간양록>이 MBC에서 방영되었고, 가수 조용필이 주제가를 불러 강항은 상당히 알려졌다. 2002년에도 ‘KBS 역사 스페셜’ 방영으로 강항 바람이 잠시 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강항은 관심밖에 밀려 나 있다. 강항이나 <간양록>에 관한 연구도 그리 많지 않고, 대중 소설이나 전기(傳記) 한 권 없다. 단지 <간양록> 번역 책 두 권이 있을 뿐이다.(주8)

민선 6기 이낙연 전라남도지사는 2014년 7월 1일 취임사에서 일본에 유학을 가르친 왕인 박사와 강항을 자랑스러운 선조로 추앙하였다. 지금부터라도 강항에 대한 재조명 사업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기념관을 짓는 하드 파워가 아닌, 전기와 소설 발간, TV드라마․영화․뮤지컬 제작 등 소프트 파워를 키우면 가능하다.(주9)

주1) 강항의 귀국 기록은 <간양록> ‘섭난사적’과 ‘적중문견록’에 실려 있다.

주2) 세이카는 처음에는 스님의 복장(僧服)으로 지냈지만 나중에는 조선 유학자 옷차림을 하였다. 이는 세이카의 환속을 의미하고 유학자로 다시 태어났음을 상징하는 징표이다.
세이카와 이에야스의 에피소드는 후세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호사카 유지 p 151~154)

주3)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1600년 음력 9월 15일(10월 21일) 일어난 전투이다.

전투의 본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확고부동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 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주4) 강재언, P 286

주5) 강재언, P 289

주6) 대학두는 에도 막부의 관학 학문소의 최고 책임자,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제학과 대사성을 겸임한 벼슬에 해당한다.

주7) 에도 시대에는 막부와 번의 정치에 유학자가 많이 참여하였다. 후지와라 세이카와 강항 그리고 아카마츠 히로미츠 3인방은 일본 에도 시대 유학을 연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주8) 간양록 책은 이을호 교수와 북한의 김찬순 교수가 번역한 책 두 종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주9)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는 초등학교 사회과 부교재에 유학자 강항을 싣는 등 대대적인 강항 현창사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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