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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인연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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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인연
- 영광군 내산서원에서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 있는 내산서원을 간다. 이곳은 수은 강항 선생을 모신 곳이다. 사당 용계사에는 강항과 그의 제자 윤순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뒤쪽 산기슭에는 강항 선생 묘소가 있다.

강항 기념관을 구경하였다. 여기에는 강항 선생과 관련된 전시물이 여러 개 있다. 포로가 된 강항 선생, 오즈에서의 억류생활, 홍유 강항 현창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후지와라 세이카,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왕복 서신, 일본 주자학 경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중에서 강항과 세이카와의 만남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전시물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왕복 서신’, ‘일본 주자학 경전’이 그것이다.

먼저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왕복 서신’ 전시물을 살펴본다. 이는 3단으로 되어 있는데 1, 2단은 편지가 적혀있고, 하단에는 내용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이를 읽어 본다.(주1)

"저 후지와라가 생각컨데, 그 대 강선생은 조선의 관리로서 뜻하지 않게 일본으로 붙잡혀 왔습니다. 만일 일이 잘 된다면 본국인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자신의 고향을 잊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대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습니다. ..."

이 내용만 읽고서는 후지와라가 강항 간의 왕복편지 사연을 알 수가 없다. 다행히도 국립진주박물관 2010년 국제교류전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책에 동일한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강항과 세이카의 왕복 편지의 사연은 이렇다. 세이카는 히로미치의 부탁을 받아서 강항에게 글씨를 써 달라는 요청을 한다. 주자의 훈몽절구의 시를 병풍으로 써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에 대해 강항은 세이카에게 “글씨 쓰기를 좋아 하지도 않을 뿐 더러 솜씨도 하찮습니다.”라고 겸손히 사양하였다. 그러자 세이카는 강항의 솜씨가 좋으며 다만 겸손한 것뿐이라는 히로미치의 말을 듣고서 강항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결코 사양치 말라고 하였다.

한편 내산서원 기념관에 전시물에 번역된 글이 진주박물관 발간 책에도 적혀 있다.

"저 후지와라가 생각하건대, 그 대 강선생은 조선의 관리로서 뜻하지 않게 일본으로 붙잡혀 왔습니다. 만일 일이 잘 된다면 본국인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지요. 자신의 고향을 잊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대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내산서원 전시 내용과 거의 같다. 그런데 진주박물관 발간 책에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생계의 어려움은 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옛날 중국 제나라의 도정백(陶貞白)이란 사람이 조정의 사자에게 두 마리의 소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 의미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도 이 뜻을 알아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더더욱 이국인이기 때문이잖습니까?"

이를 음미해보면 세이카는 강항과 그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다.

한편 <간양록>에는 강항과 히로미치가 만난 기록이 적혀 있다.

"그리하여 나도 가끔 광통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는 만날 때마다 ‘밤사이 어떠하신지요? 하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중략) 또 그는 우리나라 선비로서 포로 신세에 있는 자와 우리 형제들에게 육경(六經)의 큰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고, 그 값으로 가만히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를 보조하면서 돌아가는 길에 노자에 보태 쓰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히로미치가 강항에게 재정적 후원을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일본 주자학 경전’ 전시물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강항이 발문을 썼다는 사서오경이 전시되어 있다. 이 책들은 지금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강씨 문중에서 복사하여 온 것이란다.(주2)

세이카가 에도 유학을 개척하는데 획기적인 계기는 히로미치에게 추천한 강항을 비롯한 10명의 조선인 유학자가 베껴 쓴 사서오경에 자신이 직접 왜훈을 붙이면서부터이다. 이 책이 바로 사서오경에 대한 주자의 집주에 일본식 훈을 단 <사서오경 왜훈(四書五經倭訓)>이다.(주3)

이 책의 완성은 일본의 유학에 주자학적 이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자학의 보급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 세이카가 강항에게 이 책의 발문을 요청하면서 보낸 서한 일부를 읽어보자.(주4)

"일본에서 유학을 말하는 자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유(漢儒)의 가르침을 전할 뿐이다. 아직도 송유(宋儒)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 이 때문에 아카마츠 히로미치는 나에게 지금 새롭게 사서요경의 경문을 쓰고 왜훈 방점을 덧붙여 송유(宋儒)의 뜻을 후학들이 편리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라고 분부했다. 일본에서 송유의 옳음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책을 원본으로 삼을 것이다."(<등원성와집> 卷之十 問姜沆) (주5)

강항도 이러한 세이카에 대하여 극찬을 하였다.(주6)

"세이카는 일본에서 주자가 전한 주를 배우는 유일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정주학에 대해서는 세이카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한편 세이카는 강항에게 조선의 과거 절차, 춘추(春秋)의 석전(釋奠)이며 경연(經筵)ㆍ조저(朝著)의 규정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물었다.

춘추의 석전은 공자묘에서 봄과 가을에 두 번 공자를 제사 지내는 의식이며, 경연은 임금과 같이 유학을 공부하는 일이고, 조저는 관청의 관리등급 제도이다. 과거는 말할 필요도 없이 관리 선발제도인데 중국과 조선의 유교국가 체계의 근간이다.

이렇듯 세이카는 이론, 학문으로서의 성리학만이 아니고,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국가의 제도나 의식 등에 대하여도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정말 주자학에 미친 일본인이었다.

이에 대하여 강항은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여하여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고, 단지 과거ㆍ석전(釋奠) 등의 대개를 알려 주었다. 그랬더니 세이카는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도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하였다.(간양록 ‘적중문견록’)

그런데 이런 조선 유교제도의 실천자가 바로 히로미치였다.

"히로미치는 상례(喪禮)가 없는 일본에서 홀로 삼년상을 실행하였고, 중국의 제도 및 조선의 예절을 독실히 좋아하며, 의복ㆍ음식의 세세한 절차에 있어서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의 것을 본받고자 하였다."(간양록에서)

또한 히로미치는 조선의「오례의서(五儀儀書)」·「군학석채의목(郡學釋菜儀目)」을 얻어 보고 그의 사읍(私邑)인 단마(但馬)에다 공자묘(廟)를 세웠다. 또 우리나라 제복(祭服)ㆍ제관(祭冠)을 본떠 입고 틈틈이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제의(祭儀)를 익혔다.

여기서 말하는「오례의서(五儀儀書)」란 조선시대의 예전으로 성종11년1475)에 만든『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또는 그와 유사한 의례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오례는 길례, 흉례, 빈례, 군례, 가례의 다섯 가지 예이다.「군학석채의목(郡學釋菜儀目)」은 군학(郡學)이란 조선 각지에 설치된 향교로 이곳에서 행하여 진 석존(釋奠)의 의궤(儀軌)로 생각된다.

세이카는 이런 히로미치에 대하여 비록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강항과 세이카의 만남은 주자학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시문도 주고받았고 일본의 정치에 대하여도 담론을 하였다.(주7)

주1) 이 편지는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부설 천리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2) 강항은 성리학 서적 등 16종 21책을 직접 필사하여 일본에서의 주작학 보급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필사본 원본이 일본 내각문고에 보존되어 있다.(하우봉, p 482)

강항이 세이카에게 주자학을 가르치면서 남긴 서적들을 보면, <오경대전>, <소학식어>, <통감식어>, <정몽식어>, <춘추>, <예기>, <근사록> , <근사속록> 등 주자학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서적들이 망라되어 있다.

주3) 사서는 논어 · 맹자 ·대학 ·중용이고,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춘추 · 예기이다. 그런데 사서오경왜훈은 전하지 않는다. 1600년 10월 아카마츠 히로미치의 할복 자결 때문에 이 사서오경 왜훈 간행이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주4) 강재언, 284~286

주5) 에도 이전의 일본 유학은 중국 한나라, 당나라 유학의 가르침이었다. 즉 훈고(訓詁) · 기송(記誦)의 학문이었다. 그런데 세이카는 송나라 유학 즉 정주학에 입각한 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사서오경왜훈>이다.

주6) 호사카 유지, p141

주7) 강항과 세이카는 유학에 대하여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 시문도 주고받고 일본의 정치에 대한 담론도 하였다.

강항의 <간양록>, ‘섭난사적’에 나오는 시문을 살펴보자.

왜승(倭僧) 가고(加古)가 병풍에다, 누르고 흰 국화ㆍ여랑(女郞 여자 또는 창기를 말하기도 함)ㆍ견우화(牽牛花)를 그려 놓고, 나에게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삼경의 가을 바람 간밤에 서리 내려 / 三徑秋風夜有霜
담백색 주렁주렁 경황색 섞이었네. / 離離淡白雜輕黃
중양의 꽃송이를 오히려 따 봄직한데 / 重陽靑蘂猶堪摘
무슨 일로 견우화에 여랑까지 겹쳤는가. / 何事牽牛更女郞

또 한 폭에는 기화(琪花)ㆍ요초(瑤草)를 그렸기로 다음과 같이 썼다.

고운 꽃 고운 풀 이름조차 모를레라 / 瓊花瑤草不知名
구십일 봄 빛에 분수 밖의 영화로세. / 九十春光律外榮
밝은 달 다락 앞에 보내줄 양이면 / 明月樓前如可寄
미인은 응당 먼 곳 사람 정을 알리. / 美人應識遠人情

순수좌(舜首座)는 화답하여 다른 폭에 시를 썼다.

두어 폭 국화 색이 어울려 진기한데 / 數莖叢菊色交奇
먼 손님 새 시제도 역시 서로 알맞구려. / 遠客新題亦自宜
높은 가을 서리 이슬 아래에도 변함 없는 절의거니 / 節義高秋霜露底
이 꽃을 대하면 내 스승이라 부르네. / 對花猶道是吾師

사진 1 내산서원
2와 3, 4 내산사원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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