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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19회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인터넷에서 강항을 검색하면 동영상을 볼 수 있다. KBS 역사스페셜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선비 강항, 그는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가 그것이다. 유인촌이 해설하는 이 방송의 첫 머리에는 조용필이 부르는 ‘간양록’이 애절하게 흘러나온다. (주1)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 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 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이 노래는 1980년에 신봉승 작가가 쓴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인데,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영광 출신 선비 수은 강항(姜沆 1567~1618)의 ‘포로실기’ 제목이기도 하다.

호조좌랑이었던 강항은 1597년 9월 23일에 영광 앞바다에서 일본수군에게 잡혀서 일본 오쯔성(大洲城)에 억류되었다가, 1598년 9월 하순에 교토의 후시미 성으로 옮겨졌다.(주2)

후시미에서 강항은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사서오경을 필사하고 세이카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세이카 등의 도움을 받아 1600년 5월에 조선에 돌아왔다.

일본 에이메 현 오쓰시 시민회관 앞에는 강항을 기리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 姜沆顯彰碑)’가 세워져 있다.

그러면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만남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는 강항이 쓴 <간양록>중 ‘적중문견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주3)

“소신(小臣)이 교토에 온 다음 일본의 허실을 알기 위하여 때때로 일본인 승려(倭僧)와 접촉하였습니다. 그중에는 문자를 해득하고 사리를 아는 자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의사(醫師) 노릇도 하는 의안(意安)과 이안(理安)(주4)이란 승려도 감시받고 있는 소신을 만나러 자주 찾아왔습니다.

또 묘수원(妙壽院)의 중 순수좌(舜首座 후지하라 세이카)라는 자가 있는데, 경극황문정가(京極黃門定家)(주5)의 자손이고, 단마수(但馬守) 적송좌병광통(赤松左兵廣通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스승으로서 자못 총명하여 옛글(古文)도 잘 알고 글에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질이 칼칼하여 왜인에게 용납되지 못하였습니다. 언제인가 내부(內府) 가강(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그가 훌륭한 인재란 말을 듣고 왜경(倭京)에다 집을 짓고 해마다 쌀을 2천 석씩을 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수좌는 집도 쌀도 받지 아니하면서, 단지 약주소장 승준(若州少將勝俊 기노시타 가츠토시), 좌병광통(左兵廣通)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 글에서 묘수원(妙壽院)의 왜승 순수좌(舜首座)가 바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이다.(주6)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름을 숙(肅)이라 했으며 자는 렌부(斂父), 호는 세이카(惺窩)이다. 순수좌가 유학자가 되면서 지은 호 세이카(성와 惺窩)는 강항이 그를 위해 쓴 ‘성재기(惺齋記)’와 ‘시상와기(是尙窩記)’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따온 것이다.

그는 일본 중세 가학(歌學)의 태두인 후지와라 사다이에(藤原定家)의 후손으로 1561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승려가 되어 교토의 상국사(相國寺)에 들어가 공부했다.(주7)

세이카는 1590년 조선통신사로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일행이 교토에 왔을 때, 통신사 사절단과 시문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서장관 허성과 접촉하면서 조선유학에 대하여 감명을 받았다.

당시에 세이카는 ‘장자’ 외편 달생편의 한 구절을 원용하여 호를 시립자(柴立子)라 불렀다. 이에 허성은 ‘시립자설’을 지어 세이카에게 주면서 유학과 노불(老佛)사상이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주8)
허성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1591년에 사츠마(薩摩 지금의 큐슈)에서 명나라 사신 배에 편승하여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 하였지만 폭풍을 만나 실패하였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고자 했으나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세이카는 상당히 까칠한 승려였다. 실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거리를 두었다. 이에야스는 1593년에 에도에서 세이카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때 세이카는 당나라 태종과 그의 신하들의 정치를 논한 <정관정요>를 강의했는데 이에야스는 상당히 감명을 받은 것 같다.

세이카는 오로지 약주소장 승준(若州少將勝俊 기노시타 가츠토시)과 좌병광통(左兵廣通 아카마츠 히로미치)과 친하게 지냈다. 약주소장(若州小將) 승준(勝俊)은 와까사 노구니(若狹國) 고하마(小濱)의 영주(領主)인 기노시다 가츠토시(木下勝俊 1569~1649)이고, 좌병적송광통(赤松広通 1562~1600)은 학문을 좋아한 다이묘(大名)로 1585년에 풍신수길(豊臣秀吉)로부터 단마 다케다성(但馬 竹田城)을 하사 받은 일본 성주이고 관직이 좌병위 독(左兵衛督)이었다.

강항은 히로미치에 대하여 <간양록>에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광통이란 자는 이 나라 환무천황(桓武天皇)의 구대(九代)손이다. 그는 육경(六經)을 독실히 좋아하여,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도 늘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재주는 좀 미욱한 편이서 일본 번역(諺譯) 없이는 한 줄도 읽어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그는 우직하게 유학에 미친 사무라이였다. 세이카도 제자 히로미치는 비록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닐 만큼 예법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아무튼 강항은 히데요시가 거주하던 후시미성에 있는 히로미치 저택에서 세이카 · 히로미치와 교류하였다. 일본 학계는 세이카와 히로미치 그리고 강항을 에도 유학을 탄생시킨 3인방이라고 부른다.(주9)

주1) 이 역사스페셜은 2002년 3월 16일에 KBS 1 TV에서 방영되었다.

주2) 강항이 오쯔성에서 후시미성으로 이송된 것은 왜인들이 강항이 유학자임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강항이 후시미 성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조선 선비들이 여러 명 모여 있었다. 즉 동래 김우정, 하동 강사준, 강천추, 정창세, 함양 박여즙, 태안 전시습, 무안 서경춘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이렇듯 일본의 지도층과 지식층들은 조선의 성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3) 간양록은 번역본이 3가지이다. 이을호 박사가 번역한 간양록(서해문집, 2005년 발간), 북한 학자 김찬순이 옮긴 간양록(보리, 2006년 발간), 그리고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 사이트 <한국고전종합 D/B> 해행총재/에 있는 간양록 번역 글(신호열, 1974년)이 그것이다.

주4) 강재언(p 284)은 강항이 <간양록>에서 언급한 의안(意安)과 이안(理安)은 둘 다 세이카의 제자로서, 의안은 교토의 수리사업과 베트남 무역으로 유명한 스미쿠라 료우이의 동생이고 막부 의사인 요시다 이안(길전의암 吉田意庵 )을 말하고, 이안은 료우이의 아들 요시다 소안(길전소암 吉田素庵)이라고 하면서, 강항이 잘 못 쓴 것 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주5) 경극황문정가(京極黃門定家) : 후지와라 노사다이에(藤原定家 1162~1241) 가인(歌人)으로 유명하다. 저택이 교오고구(京極)에 있었고 벼슬이 쥬우나곤(中納言)이었으므로 ‘교오고구 쥬우나곤’이라고도 한다. 황문은 쥬우나곤의 당명(唐名 중국식 호칭)이다.

주6)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청령국지 1> 인물 편에서 후지와라 세이카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이 소개는 간양록을 많이 참조한 듯하다.(이덕무, 청령국지 1 인물, 청장관 전서 제 64권,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 사이트 참조)

등원숙(藤原肅), 자(字)를 염부(斂夫)라 하고 호(號)를 성와(惺窩)라 하였으며, 경극황문정가(京極黃門定家)의 손자이고 위순(爲純)의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여 글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법명(法名)을 종순(宗蕣)이라 하고 묘수원 수좌(妙壽院首座)라 칭하였다. 불서(佛書)를 읽기는 하였으나 뜻은 유가(儒家)에 있었으므로, 일찍이 중국과 조선을 사모하여, 명(明)나라에 들어가려다가 풍파를 만나서 돌아오고, 조선으로 건너가려다가 전쟁 때문에 그만두었다. 조선의 원외랑(員外郞) 강항(姜沆)이 와서 적송씨(赤松氏)의 집에 객으로 있을 때에 염부를 보고 칭찬하였다. 일본의 유자(儒者)들은 한(漢)ㆍ당(唐) 때의 주소(注疏)만을 읽었으나, 염부는 스스로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훈고(訓詁)에 의거하였으므로 그 공로가 가장 컸다. 가강(家康)이, 그가 재주가 있고 어질다는 말을 듣고 집을 지어 주고 쌀을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가강을 위하여《정관정요(貞觀政要)》ㆍ《십칠사(十七史)》를 강독(講讀)한 일이 있었다.

다만 그 제자(弟子)인 약주 소장(若州小將) 승준(勝俊)과 좌병(左兵) 광통(廣通)과 함께 교유(交遊)하였는데, “일본의 장관(將官)은 죄다 도적(盜賊)인데 광통만이 사람다운 마음을 가졌다.” 하였다.

광통은 환무(桓武)의 9세손으로 육경(六經 역경(易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주례(周禮)》ㆍ《예기(禮記)》ㆍ《춘추(春秋)》)를 독실하게 좋아하여 어지러운 싸움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으며, 일본에는 본디 상례(喪禮)가 없었는데 광통이 혼자 삼년상(三年喪)을 지냈다. 또 중국의 제도와 조선의 예의를 독실하게 좋아하여 의복이나 음식 따위 자잘한 일들까지도 반드시 본뜨려 하였다.

또 조선의《오례의(五禮儀)》와《군학석채의(郡學釋菜儀)》를 얻어 보고는, 단마(但馬)의 사읍(私邑)에 공자묘(孔子廟)를 세우고 조선의 제복(祭服)을 만들어,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제사 의식을 익혔다. 강원외(姜員外 강항을 가리킴)에게 부탁하여 육경을 베끼고, 남몰래 은전(銀錢)을 주어 귀국하는 노자를 보태어 주었다.

임도춘(林道春)ㆍ나파도원(那波道圓)ㆍ굴정의(崛正意)ㆍ관원덕암(菅原德菴 스가 도꾸안 菅得菴)ㆍ송영창삼(松永昌三 마쓰나가 세끼고 松永尺五)ㆍ삼택기재(三宅寄齋 미야게 기사이) 등은 다 종순 수좌(宗蕣首座)의 제자이다.

한편 한국고전번역원은 세이카의 약력을 아래와 같이 부기하고 있다.

등원숙(藤原肅) : 1561~1619. 후지와라 세이까(藤原惺窩)로 더 알려져 있다. 숙(肅)은 이름, 성와(惺窩)는 호. 일본 유학(儒學)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학풍(學風)은 정주(程朱學)을 주로 하되 양명학(陽明學)을 배척하지 않았다.

주7) 후지와라 집안은 원래 효고현(兵庫縣) 미키시(三木市) 출신으로 장원을 소유한 구 귀족 가문이었다. 세이카의 집안은 무사가 아니었지만 무사와 마찬가지로 성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 1578년 세이카의 나이 18세 때, 그의 아버지 성(城)이 적군의 급습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하자 그는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숙부가 주지로 있는 교토의 상국사(相國寺)로 피신했다.

상국사에서 후지와라는 선승(禪僧)이 되었고, 승려로 있을 때에는 순수좌(舜首座)라고 불렸는데 순수좌는 사찰에서 주지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말한다. 그는 이곳에서 불교와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하였다.

주8) 허성(許筬 1548~1612)은 홍길동전 저자로 유명한 허균의 이복형이고, 동인의 영수 초당 허엽의 아들이다.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세이카 선생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사신들을 교토 시노에 있는 다이도쿠지(大徳寺)에 머물게 했다. 선생(세이카)이 와서 세 사신을 만나보고 서로 필담과 시를 나누었다.”
주9) 강재언, p 28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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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한국고전번역원, 해행총재,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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