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조회수 : 3828
제목 정유재란 포로 실기 문학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18회 정유재란 포로 실기 문학
- 강항의 <간양록>, 정희득 <월봉해상록>, 노인 <금계일기>

호남은 문향이다. 특히 16세기에는 기라성 같은 호남 문인들이 많았다. 박상, 임억령, 김인후, 기대승, 이후백, 양응정, 박순, 임제, 유희춘, 고경명, 정철, 최경창, 백광훈 등 남달리 우뚝 선 문인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해외 기행문학도 마찬가지이다. 담양의 송희경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다음해인 1420년(세종 2)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노송당 일본행록>을 남겼고, 나주의 최부는 명나라에서 6개월간 표류한 기록인 <표해록>을 썼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10만 명이 넘는다. 이중 조선에 돌아온 자는 6,300여 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일본 포로생활을 실기(實記)로 남긴 이는 단지 호남사람 5인에 불과하다. 즉 강항, 노인, 정희득, 정경득, 정호인이 그들이다.(주1)

강항은 <간양록>, 노인은 <금계일기>, 정희득은 <월봉해상록>, 정경득은 <만사록>, 정호인은 <정유피란기>를 남겼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정경득과 정호인은 정희득과 함께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고, 내용도 정희득과 상당수 중복되어 있음을 감안하여 강항과 정희득, 노인 세 사람의 포로실기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다.(주2)

먼저 수은 강항(姜沆 1567~1618)의 <간양록>에 대하여 살펴보자. 1597년 9월 23일에 강항 일가는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일본 수군에게 잡혔다. 형조좌랑 강항은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는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성 군량미 운반을 담당했으나 남원성이 함락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지만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모두 다 흩어지고 말았다.

9월 14일에 함께 배를 탄 강항 일가는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싸우기로 하였는데, 뱃사공이 21일 밤에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강항 부친이 탄 배와 헤어지고 말았다.

23일 아침에 강항 일행은 부친을 찾아 논잠포로 향했다. 그런데 바다 안개가 자욱한 속에 왜군 수군이 나타났다. 강항 일가는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바닷물이 너무 얕아서 왜군의 갈고리에 구출되었다. 이 와중에 강항은 두 아이가 바다에 내던져지는 아픔을 겪었다.

강항은 일본수군 장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부하 노부시치로(信七郞)에 의해 일본 시코쿠 四國(지금의 에이메 현) 오쓰(大洲)성에 억류되었다. 얼마후 그가 주자학자라는 신분이 알려지자 일본 측의 대우가 변했다. 강항은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승려 요시히도(好仁)와 교류하였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냈다.

이후 강항은 1598년 9월에 오사카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와 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 1562~1600)를 만났다.


상국사의 승려였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에도 유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하리마 영주인 아카마쓰 히로미치는 주자학을 좋아하여 조선 의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른 사무라이였다.

세이카는 아카마쓰에게 진언하여 강항에게 유교 경전 필사를 부탁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서오경에 대한 일본 최초의 주자주석본인 <사서오경 왜훈(倭訓)>이다.(주3)

<간양록>을 보면 당시 강항은 은전을 좀 벌어서 귀국할 배를 마련하고자 왜승 세이카에게 글씨를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강항은 주자학에 대한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주자학을 가르쳐주게 되었고, 예법에 대하여도 많은 지식을 전수하였다.

1600년 4월 2일 강항은 세이카 등의 도움을 받아 가족, 동료 등 38명과 함께 교토를 출발하여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일본에 억류된 지 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강항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일본 에미메 현 오쓰시 시민회관 앞에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져 있다.(주4) 그는 영광군 불갑면에 있는 내산서원(內山書院)에 모셔져 있고 그곳에 묘소도 있다.

한편 강항의 포로생활 기록인 <간양록>은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있을 당시 보고 들은 일본의 역사와 지리, 여러 다이묘(大名)의 정세와 대책 등을 기록한 문집인데, 적중봉소(賊中封疏),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고부인격(告俘人檄), 예승정원 계사(詣承政院啓辭), 섭난사적(涉亂事迹) 등 5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주5)

<적중봉소(賊中封疏)>는 일본에 억류 중에 선조에게 올린 소이다. 여기에는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가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과 일본에서의 생활이 요약되어 있고,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계책을 제시하고, <왜국 팔도 육십육주도>를 부기하고 있다.(주6)

강항은 이 소를 1598년에 이예주(伊豫州)에 있을 때 김석복에게 보냈고, 1599년에 후시미 성에서 중국인 왕건공에게 내용을 추가하여 보냈으며, 같은 내용을 신정남에게도 보냈다. 이 중 왕건공에게 보낸 것이 조정에 도달하였는데 이는 1599년 4월 15일자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글은 <왜국백관도>, <왜국 지리와 풍물(왜국팔도 육십육주도)>, <임진정유 입적제장왜수(일본의 여러 장수)>로 구성되어 있다.

<고부인격(告俘人檄)>은 포로들에게 당부하는 글로 일본을 비판하고 임금의 은혜에 대해 강조한다.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는 승정원에서 일본의 사정을 묻기에 작성한 글이다.

가장 문학성이 짙은 <섭난사적(涉亂事迹)>은 포로생활의 체험을 일기체로 기술한 글이다. 피란 상황과 강항의 개인사 그리고 당시의 심정을 읊었다.

특히 <적중봉소>와 <적중문견록>에는 일본의 역사, 지리를 비롯하여 임진·정유년 전쟁에 참가한 왜장의 목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이후 일본 정세의 변화 등을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적중문견록>에는 왜군 장수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특히 장수들 간의 대립관계까지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나아가 일본의 사정에 더해 조선의 군사 제도, 성읍, 연해지역의 방비 등과 비교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강항이 일본의 정세를 비롯하여 군사 조직까지 정리한 것은 조선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가히 조선 관료다운 면모이다.

<간양록>은 당시의 여러 일본 견문록 중에서 비교적 상세하고 체계적인 내용의 서술서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많이 인용하였다.

아울러 일본에서 번역되기도 하였는데, 1719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간 신유한은 간양록이 오사카에서 발간된 것을 알고는 적에게 기밀이 제공된 것을 통탄하고 있다.(주7)

다음은 함평 출신 유학(幼學) 정희득(鄭希得 1575~1640)의 <월봉해상록>이다. 정희득은 1597년 9월에 부모 형제와 처자를 배에 싣고 왜군을 피하여 서해를 따라 위로 올라가려 했더니, 뱃사공이 길을 잃고 바람조차 불순하여 배가 표류했다.

9월 27일에 배가 영광 칠산 앞 바다(영광군 염산면 두우리)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왜선을 만났다.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정희득의 어머니 이씨는 형수와 아내, 누이동생과 함께 바다로 뛰어 들어 절개를 지켰다. 정경득․정희득 형제는 왜군이 배 안에 묶어 두어 죽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또한 배에 같이 탄 종형 정절의 부인과 며느리 등도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주8)

왜군은 함께 잡혔던 아버지와 두 아이는 중간에 놓아주고, 나머지 정희득 일가는 일본으로 끌고 갔다. 1597년 12월 29일에 정희득은 일본 아와주(阿波州) 이야마성(猪山城, 지금의 토쿠시마성 徳島城)에 도착하였다.

당시 아와주 영주는 하치스카 이에사마(蜂須賀家政)였다. 정희득을 납치한 자는 모리 고시치로(森小七郞)으로서, 바로 하치스카의 부장이었다.

다행히도, 정희득은 하치스카의 조선 출병시 영주의 권한을 대신하던 자의 우대를 받아 시문을 주고받는 등 교류를 가졌고, 그의 도움으로 1598년 11월 22일에 도쿠시마(덕도)를 떠나 12월 23일에 대마도까지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마도주가 이들을 억류하여 6개월 정도 대마도에 머물렀다. 드디어 정희득은 1599년 6월 17일에 대마도를 출발하여 6월 2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정희득은 1613년에 일본 체험 전체를 기록한 <만사록(萬死錄)>을 편찬하였다. 나중에 그의 후손인 정덕휴가 <월봉해상록>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월봉해상록>은 2권 1책으로 소, 풍토기, 해상일록(海上日錄)과 시(詩)가 실려 있다. 소에는 ‘자적왜중환박부산일봉소’가 실려 있다. 이는 1599년 7월에 부산에 도착하여 조정에 올리기 위해 쓴 상소문이다. 그런데 이 상소문은 조정에 주달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선조실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월봉해상록> 중에서 가장 소중한 자료는 ‘해상일록’과 ‘시’이다. 해상일록은 피란을 떠나던 날인 1597년 8월 12일부터 고향에 돌아와 장모님을 뵙고 아들을 만나던 날인 1599년 7월 2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시는 400여 수가 실려 있는데 포로생활중의 개인적 심정을 표현한 시가 대부분이다. 정희득의 문집은 포로생활 중 본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금계 노인(魯認 1566~1622)은 나주 출신이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광주목사 권율 휘하에 들어가 이치전투에 참여하였다. 1597년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자 그는 왜군의 동정을 살피다가 적탄에 맞아 일본에 잡혀갔다. 그는 일본 이예주 사누키(讃岐)지역에 억류되었는데 한 차례 배를 타고 탈출하려다 실패한 후 이즈미(和泉)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즈미 지역에서 만난 명나라 차관 진병산과 이원징의 도움을 받아 1599년 3월 17일 탈출에 성공하여 중국 복건성으로 갔다. 그는 중국에 도착하여 네 차례 송환을 요청하는 최귀문(催歸文)을 쓴 후 5월 10일에 가을이 되면 보내주겠다는 회답을 받았다. 이후 그는 양현사 서원(兩賢祠 書院)의 강학에 참여하고 학자로서 중국의 학문과 제도에 관심을 보였고 북경을 거쳐 1600년 1월에 한양에 돌아왔다. 이처럼 노인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간 후 탈출하여 명나라를 거쳐 조선에 돌아옴으로써 색다른 경험을 한 것이다.

노인은 포로 생활 중의 기록인 <금계일기>를 남겼는데 지금은 앞과 뒤가 끊어진 채 중간부분만 (1599. 2. 21.~6. 27.까지만) 전해지고 있다.

이중 2월 21일부터 3월 16일까지는 일본에서 탈출 준비하는 과정이 실려 있고, 3월 17일 이후는 중국에서의 생활이 적혀 있어 의미가 있다. 그는 나주의 거평사에 배향되어 있다.

강항과 정희득 그리고 노인의 포로실기는 정유재란 유일의 포로실기란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더구나 호남 선비들의 실기문학이란 점에서 자랑스럽다.

아울러 세 사람은 신분상 특성으로 인하여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강항은 관료의 위치에서 일본의 정세를 분석하고 있고 가급적 개인적 감정은 억제하고 있다. 정희득은 자연인으로서 개인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각별하다. 노인은 일본을 탈출한 점을 강조하면서 중국에 대한 호기심에 열정을 다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경험은 후에 <남윤전>, <최척전> 같은 임진왜란 중 해외 체험 소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1) 실기(實記)는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체험 기록이기에 사실적이며 현장성을 지니는 문학 장르이다. 실기는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 사실만을 기록한 역사기록과는 다른 감동을 지니며, 허구적인 문학작품과는 달리 사실성을 가진다.(김미선, P 12)

주2) 정경득의 <만사록>, 정호인의 <정유피란기>는 월봉해상록과 일치하는 내용이 많다. 특히 <만사록>은 1902년에 발간되어 후손들이 월봉해상록을 보고 가필할 가능성이 높다.(김미선, p136~146)

주3) 이 책의 완성은 일본 유학사에서 한당학을 주자학으로 전환시킨 업적으로 평가된다.

주4) “일본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姜沆)의 비(日本朱子学の父, 儒学者, 姜沆の碑)”로 소개된 홍유 강항 현창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왕조시대(朝鮮王朝時代)의 탁월한 학자 강항(姜沆)은(号 睡隠)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朝鮮)으로 재 출병(再出兵: 慶長의 役/정유재란한 때 등당고호(藤堂高虎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게 포로가 되어 두 형인 준(濬), 환(渙)과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이예(伊予 이요/愛媛県)의 대주(大洲/大津)로 연행되었다.

10개월 간 대주성(大洲城)에서 강항(姜沆)의 생활은 학자로서 대우를 받아 금산 출석사(金山 出石寺)의 중들과 교유(交遊)하였다. 한시(漢詩)로 응수하며 매일을 자유롭게 보내는 신분이었다. 교토 복견(京都伏見)의 등당고호저(藤堂高虎邸)에 이송되어 강호유학(江戸儒學)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등원성와(藤原惺窩)와 용야(龍野)의 성주적송광도(城主赤松廣道 아까마스히로미찌), 해운왕 길전소암(海運王 吉田素庵 요시다소안) 등과 자유로운 교우 중에 성와(惺窩)는「사서오경왜훈(四書五経倭訓)」을 완성했다.
강항(姜沆)과 두 형 그리고 수십 인이 사서오경(四書五経)의 대자본(大字本)을 필사(筆写)하였다. 성와(惺窩)는 거기에 화훈(和訓: 일본어)를 달아 간행하였던 것이다.

근세 일본사상(近世 日本思想)의 전환기에 강항(姜沆)과 등원성와(藤原惺窩)의 우정은 일본인이 부러워할 정도였고, 성와(惺窩)가 유학자(儒学者)로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항(姜沆)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강항(姜沆)이 일본유학사상(日本儒学思想)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에이메현(愛媛県) 오쯔시(大洲市)의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 姜沆顯彰碑 1990. 3. 11.) 부비(副碑)와 비문(碑文)에서>

주5) 강항은 원래 이 책을 건차록(巾車錄)이라 했다. 건차란 죄인을 태우는 수레를 뜻하는 데 강항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자처하여 그리하였다. 그런데 그의 제자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강항의 시와 권필의 시에 있는 소무(蘇武)의 고사를 인용하여 간양록(看羊錄)이라 칭하였다. 소무는 한나라의 장수로서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어 19년간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간양록은 1658년에 간행되었다.

한편 1607년에 회답겸쇄환사로 일본에 간 부사 경섬은 <해사록>에서 들은 강항의 절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의 말에 의하면 강항은 포로로 붙잡히고 나서 5년 동안 자신의 바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의관도 바꾸지 않고 방에 조용히 앉아 오로지 책을 읽거나 글을 지었다. 그는 여태까지 일본인들을 상대로 입을 연 적이 없다.”

주6) 강항은 이 소에서 일본의 정책과 비교하여 조선의 정책을 논단하면서 조선의 불합리한 정책을 고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예가 산성의 운영이었다. 강항은 담양부를 금성산성에, 장성현과 정읍군을 입암산성에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주7)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일본의 기밀을 기록한 김성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이 오사카에서 출판된 것을 통탄하고 있다. 그는 국가의 기강이 엄하지 못하여 부산왜관의 통역들이 사적으로 거래하여 일본에 전해졌음을 한심해 하고 있다.(강재언, p 268~269)

주8) 나중에 정희득․정절의 여인들은 열부(烈婦)로 정려되었다. 함평군 월야면에는 팔열부(八烈婦) 정각이 세워졌다. 팔열부에 관하여는 1681년 6월 30일자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o 강재언 지음, 이규수 옮김,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한길사, 2005
o 강항 지음․이을호 옮김, 간양록, 서해문집, 2005
o 강항, 국역 수은집, 전라남도, 1989
o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 조선인 포로의 기억, 국립진주박물관, 2010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미선, 호남의 포로실기 문학, 경인문화사, 2014
o 김동수 역,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o 나카오 히로시 지음, 유종현 옮김, 조선통신사 이야기, 한울, 2005
o 나카오 히로시 지음, 손승철 옮김, 조선통신사, 도서출판 소화, 2013
o 노성환, 일본에 남은 임진왜란, 제이앤씨, 2011
o 노인 저, 노기욱 역, 임진 의병장 노인의 금계집 국역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8
o 손승철 지음, 조선통신사 일본과 통하다, 동아시아, 2006
o 손승철, 조선통신사를 보는 양국의 시각, 동북아 역사재단 편, 역사속의 한일관계, 동북아역사재단, 2009, p 144- 161
o 양은경 엮음,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2
o 임태홍, 일본 사상을 만나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0
o 정장식,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 시대를 가다, 고즈윈, 2005
o 정재정,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 효형출판, 2007
o (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엮음,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한울, 2007
o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o 한국고전번역원, 해행총재,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 사이트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