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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예전쟁,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 2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17회 노예전쟁,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2)

1598년 11월 하순에 정유재란이 끝나자 에도막부는 임진왜란 7년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조선과의 교린을 추진하였다. 특히 대마도가 적극적이었다. 대마도는 전쟁으로 인하여 인적·물적 자원이 모두 고갈되어 매우 궁핍하여졌다. 더욱이나 조선과의 교역마저 단절되자 매년 1백 석씩 지원받던 세사미도 끊어져 살 길이 막막하였다.

이에 대마도주는 1599년부터 일본에 끌고 간 조선 포로들을 수시로 조선에 보내주면서 교역 재개를 간절히 간청하였다.

1599년 6월에 함평 출신 정희득 등 15명이, 1600년 2월에는 합천 유생 곽진방 등 160명이 조선에 돌아왔고, 4월에도 321명, 5월에는 영광 출신 강항 등 38명이 송환되었다. 일본은 1601년에 250명, 1602년 229명, 1603년 200명 등을 보냈다. 1599년부터 1603년까지 4년 동안에 1,300명이 송환되었다.(나카오 히로시, 조선통신사 이야기, p 57)

1604년에 조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중을 살피기 위하여 승려 사명당을 탐적사(探賊使)란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1605년 3월에 송운대사 유정은 후시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이때 이에야스는 “나는 임진년 당시에 관동에 있었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조선과 나 사이에는 원한이 없다. 화친을 원한다.”고 하였다. 이에 유정은 에도 막부의 뜻을 확인하고 포로 1,39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주9)

드디어 조선은 1607(선조 40)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파견된 사절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 했다. 쇄환이란 ‘모두 데려 온다.’는 뜻이다. 쇄는 빗자루란 의미이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전후 처리와 일본에 끌려간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을 ‘빗자루로 쓸듯이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1607년 2월 27일에 회답겸쇄환사가 부산을 출발하였다. 정사는 여우길, 부사는 경섬이며 총인원은 504명이었다. 사신은 국서를 전달한 후에는 오로지 쇄환에 주력하였다. 예조는 억류된 몇 만 명의 송환을 요청하면서 쇄환이 잘 되어야 양국의 교류가 영속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에도막부는 장군의 명령으로 각지에 쇄환을 하달하였다. 이 명령에 가장 적극 움직인 이는 대마도주였다. 그러나 막부의 쇄환 명령은 지방까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고, 심지어 교토에서 조차 막부의 명령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막부의 실력자 혼다 마사노부는 예조에 보내는 서계에서 “피로인들은 일본에 온지 거의 20여년이 되었다. 그 중 결혼하거나 자녀를 가진 자들도 있다. 귀국은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기되 본인이 원하면 귀국시키라는 것이 장군의 엄명”이라고 하였다.

‘본인이 원하면 귀국시키라’는 단서가 붙었으니, 이국에서 속박을 받던 포로들이 자유롭게 귀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본인이 원해도 주인이 놓아주지 않아 도망쳐온 예도 있었다. 이리하여 6월 26일에 사신과 함께 쇄환된 사람은 1,418명에 불과하였다. 경섬은 <해사록>에 구우일모(九牛一毛)라고 적었다.(주10)

1609년에 조선은 대마도주와 교역을 재개하였다. 소위 기유약조 (己酉約條)이다. 대마도주는 예전처럼 세사미두(歲賜米豆)는 100석을 받게 되었다.(주11)

1617년에 조선 정부는 포로 쇄환과 에도막부의 오사카 평정을 축하하기 위하여 제2차 회답및쇄환사를 파견하였다. 정사는 오윤겸, 부사는 박재, 종사관은 이경직이었고 일행은 428명이었다. 광주 금남로의 주인공인 정충신(1576~1636)도 군관으로 호위를 담당하였다.(주12)

이때 사신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쇄환을 추진하였다. 통역관 박대근, 최의길, 강우성 등이 대마도 관리들과 함께 각 번에서 쇄환자를 모집하였다. 통역관 강우성은 원래 피로인이었던 자였다. 그들은 고쿠라, 하카다, 히로시마(廣島), 비전 등지에 파견되어 피로인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다. 특히 히로시마에서 만난 피로인 4명에 관한 기록을 보면 피로인의 삶을 여실히 알 수 있다.(주13, 9월 22일자 이경직의 <부상록>)

이렇게 사신들은 같은 노력을 다 하였지만, 오사카를 출발 할 당시 모인 포로들은 100여 명 정도였다. 심지어 모집된 조선인 중에 다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사신들은 배 3척에 321명의 피로인을 데리고 10월 18일에 귀국하였다.(주14)

이경직은 <부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대개 충성심 높은 선비나 일본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밖에 처자가 딸려 있거나 재산이 있어 이미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은 전혀 돌아갈 뜻이 없었다. 한탄스럽다! 한탄스럽다!

이러함에도 전라도 출신 포로들이 여러 명 쇄환사와 함께 돌아왔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소쇄원 사람들이다. 양천경(1560~1591)의 아내 함풍이씨와 차남 몽린(夢麟)과 삼남 몽인 (夢寅) 그리고 딸이 쇄환된 것이다. 양천경의 가족 4명은 1597년에 일본에 끌려갔는데 당시 아들 몽린은 15세, 몽인은 10세 그리고 딸은 13세였다. 그런데 아들 몽린과 어머니와 딸은 오사카에서 머물고, 몽인는 이예주에서 지내다가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만 20년만의 일이었다.(주15)

1624년(인조 2)에 조선은 제3차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였다. 에도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쇼군 세습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이었다. 정사는 정립, 부사는 강홍중, 종사관은 신계영이었고, 사행 인원은 460명이었다.

조선 통신사는 에도에서 국서를 전달하고 12월 22일에 집정 도이 도시가쓰(利勝)에게 피로인의 쇄환에 협조를 요청했다. 강홍중의 <부상록>이다.

“쇄환에 관한 일은 이미 승낙을 받았으나, 사로잡혀 온 사람들이 모두 주왜(主倭)를 겁내어 즐겨 나오지 않으니, 만약 엄령이 아니면 쇄환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모름지기 한 문서를 만들어 빙험(憑驗)하게 하고, 각도(各道)의 장관(將官)들이 방금 모였다 하니, 또한 널리 알려 속이고 숨김이 없게 하오.” 하니, 대답하기를, “삼가 말씀과 같이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약간의 피로인(被擄人)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 마땅히 그 이름을 써 보내고 또한 엄중히 신칙하여 쇄환하게 할 것이요, 전일과 같이 헛이름만 있고 실지가 없게 하지 마오. 만약 먼저 돌아가기를 자원하는 자만을 쇄환한다고 말하면 주왜(主倭)들이 이를 구실 삼아 보내지 않을 것이며, 연구세심(年久歲深)하면 남자는 장가들고 여자는 시집가서 아들과 손자를 두게 될 것이고 늙은 자는 죽고 젊은 자는 늙어질 것이니, 이 기회를 잃고 돌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본국으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겠소? 모름지기 십분 유의하여 조속히 답서를 써서 보내줌이 옳을 것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 일은 다시 말할 것 없이 마땅히 극력 도모하겠습니다. 여러 도의 장관(將官)에게도 이미 분부하였습니다.” 하고, 곧 일어나 물러갔다.

에도 막부가 지원하였음에도 피로인들은 고국에 돌아갈 엄두를 못 내었다. 돌아간다고 약속을 하여 놓고서는 나타나지 않는 이도 있었다.

부사 강홍중은 ‘문견총록’에서 “일본은 물자가 풍부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생리(生利)가 매우 넉넉하였다. 사로잡혀 온 사람도 빈손으로 와서 수 년 사이에 재산이 혹 수백 금이 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 생업을 즐겨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뜻이 없었다. 나라 가운데 크고 작은 역사를 백성에게 부역시키지 않고 모두 고용(雇傭)하여 썼으며, 임금(賃金)이 또한 풍족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그는 피로인들을 만난 여러 소회를 <부상록>에 자세히 적어 놓고 있다.(주16)

아무튼 사신들은 피로인 소환에 열성을 다하였지만 조선 통신사가 1625년 1월 27일에 오사카를 떠날 때 쇄환인은 겨우 21명이었고, 3월 5일에 부산에 돌아왔을 때는 146명 뿐이었다.

더구나 부산에 도착하자 조선 관원들은 쇄환인을 맞을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양식 지원은 물론이고 고향 가는 길 안내 조차 없었다. 별수 없이 사신들이 가지고 있던 양식 일부를 주었고 그들 고향에 편지를 써 주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참 한심한 조선 정부였다.(주17)

이후 조선 조정은 쇄환 정책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643년에는 14명의 피로인이 송환되는데 그쳤다. 이로써 10만 명 이상이 되는 피로인 중에 조선에 돌아온 자는 6~7천 명에 그쳤다. 조선 사신 경섬의 표현대로 구우일모(九牛一毛)였다.

그런데 조선에 돌아 온 피로인들은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았다. 양반은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 재야에서 살아야 했다. 타의 이지만 일본에 잡혀 갔다는 사실 자체가 절의를 잃은 것으로 평가되는 분위기였다. 쇄환된 천민들도 다시 천민에 편입되었다.(정재정 P 136-137)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편 일본에 정착한 포로들 중에는 일본 사회 발전에 족적을 남긴 이가 상당수이다. 우선에 신이 된 피로인, 즉 신사에 모셔진 조선인이 있다. 이들은 아리타 도조신사(陶祖神社)의 이삼평, 나가사키현 미가와치 부산신사의 고려할매와 도조신사의 이마무라 조엔, 구마모토 가토신사의 김환, 고오즈 시마의 여신 오다 쥬리아가 있다.(주18)

두 번째는 전문 기술인력이다. 이들 중에는 도공이 단연 많다. 규슈 가고시마 도공 심당길, 박평의 등과 구마모토 도공 존해, 규슈 가라쯔(唐津), 고다(高田), 다카도리(高取), 하기(萩) 도자기를 만든 도공들이 모두 조선 포로들이다. 또한 구마모토현 의사 이경택, 본묘사 주지 여대남, 제지 기술자 도경과 경춘, 사가현 사가시 나염 기술자 이구산, 유학자 홍호연, 도사번 나카무라시 베틀기술자 조선직녀, 도사번 의사 경동, 가가번의 일본정원사 김여철 등이 있다.

특히 유학자 강항(1567~1618)은 선승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에게 주자학을 전수하여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에도 막부의 정치와 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포로들 중에는 포로생활 사실을 기록하여 실기문학으로 남긴 이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전라도 영광의 강항(간양록), 함평 정희득(월봉해상록), 나주의 노인(금계일기), 함평 정경득(만사록), 함평 정호인(정유피란기) 등이다. 이들의 실기(實記)는 중요한 기록문학이 되고 있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포로들은 일본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 발전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름 없이 농업과 상업 종사자로 일한 피로인들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에도 막부 시대의 경제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 경제는 조선 포로들의 노동력에 힘입은 바 크다. 일본은 이 점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주9) 1604년에 일본에 강화사(講和使)로 간 사명대사 유정은 1605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3천 명의 포로 송환을 약속받았지만 4월에 돌아오면서 데려온 포로는 1,390명 정도였다.(나카오 히로시, 조선통신사 이야기 p 56) 어떤 자료에는 2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1605년 4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유정이 포로 3천 명을 쇄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수 39권, 38년(1605년) 4월 1일(을사) 2번 째 기사
유정(惟正)이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우리나라 남녀 3천여 명을 쇄환(刷還)하였다.【유정은 승려이다. 갑진년 봄 왜인 귤지정(橘智正)이 와서 통신을 요구하니, 조정에서는 유정에게 가서 적정을 탐색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돌아왔다.】

주10) 1607년 윤 6월 26일자 경섬의 해사록(海槎錄)
맑음. 대마도에 머물렀다. 대판의 대관 편동주선(片桐主膳)이 포로인 24명을 나중에 보내오고 갑비수 장정(甲斐守 長正)이 또 포로인 64명을 보내오므로 당상(堂上) 역관으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어 사례하게 하였다. 대마도 사람들이 일행을 따라다니느라 비용을 많이 썼으므로 쓰다 남은 은 1천 2백여 냥을 주었다. 되돌아오는 포로를 점검해 보았더니 남녀 합쳐 겨우 1천4백18명이었다. 이어 10일 양식을 내주었다. 대개 포로인으로 일본 내지(內地)에 흩어져 있는 자가 몇 만이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돌아가게 하라는 관백의 명령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주인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숨겨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였고, 또 포로인들도 머물러 사는 것을 편히 여겨 돌아오려는 자가 적었다. 지금 쇄환해 오는 수는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털 한 개 뽑은 정도도 못 되니, 통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주11) 기유약조(己酉約條)는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이다. 조약 내용은 주로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의 왕래 조건에 관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대마도주가 피로인(被虜人)의 송환을 충실히 이행했으므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쓰시마 도주에게 내리는 쌀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2.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3. 관직을 제수 받은 자는 1년에 한 차례씩 조선에 와야 하며, 다른 사람은 파견할 수 없다.
4.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왜선은 쓰시마 도주의 허가장을 지녀야 한다.
5. 쓰시마 도주에서 도서(圖書)를 만들어 준다.
6. 허가장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7.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을 쓰시마 도주의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밖에는 55일로 한다.

주12) 1617년 제2차 회답및쇄환사 사행 인원은 이경직의 부상록(扶桑錄)에 실려있다.

[사행 인원]
정사(正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윤겸(吳允謙), 부사(副使) 행호군(行護軍) 박재(朴梓), 종사관(從事官) 행사과(行司果) 이경직(李景稷), 역학(譯學) 행사정(行司正) 박대근(朴大根)ㆍ전 정(正) 최의길(崔義吉)ㆍ강우성(康遇聖)ㆍ정순방(鄭純邦)ㆍ전 첨정(僉正) 한덕남(韓德男), 한학(漢學) 동지(同知) 정언방(鄭彥邦)ㆍ전 직장(直長) 이현남(李賢男), 의원(醫員) 전 첨정 정종례(鄭宗禮)ㆍ전 봉사(奉事) 문현남(文賢男), 사자관(寫字官) 행호군 송효남(宋孝男), 화원(畫員) 행사과 유성업(柳成業), 서사(書寫) 엄대인(嚴大仁), 정사(正使) 자제(子弟 자제는 자제군관의 약칭. 사신의 친척을 군관으로 삼아 데리고 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이경란(李景蘭)ㆍ학생(學生) 이안농(李安農), 군관(軍官) 선전관(宣傳官) 이진경(李眞卿)ㆍ전 현감(縣監) 유시건(柳時健)ㆍ전 만호(萬戶) 송덕영(宋德英)ㆍ전 만호(萬戶) 정충신(鄭忠信)ㆍ전 주부(主簿) 우상중(禹尙中)ㆍ내금위(內禁衛) 이영생(李瀛生), 부사 자제 내금위 박제(朴霽)ㆍ사용(司勇) 유윤(柳潤)ㆍ군관(軍官)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안경복(安景福)ㆍ전 감찰(監察) 최호(崔昊)ㆍ초관(哨官) 박응운(朴應雲)ㆍ내금위(內禁衛) 신경기(申景沂)ㆍ내금위 박성현(朴成賢)ㆍ내금위 유동기(柳東起), 종사관 자제 김철남(金哲男), 별파진(別破陣) 최의홍(崔義弘)ㆍ정의일(鄭義逸), 기패관(旗牌官) 김적(金迪), 포수(砲手) 김사길(金士吉), 정사반당(伴倘) 종 언생(彥生)ㆍ구남(九男), 부사 반당 종 장복이(張福伊)ㆍ복이(福伊), 종사관 반당 종 생이(生伊)ㆍ복지(福只), 소동(小童) 김득수(金得秀)ㆍ이경생(李慶生)ㆍ박이청(朴以淸)ㆍ황대희(黃大希)ㆍ박유생(朴酉生)ㆍ홍봉룡(洪鳳龍), 기(旗)ㆍ둑(纛)ㆍ절(節)ㆍ월(鉞) 봉지인(捧持人) 김득립(金得立) 등 8명, 취수(吹手) 황흑매(黃黑梅) 등 16명, 나장(羅將) 이천운(李天雲) 등 14명, 도척(刀尺) 명생(命生) 등 6명, 취적(吹笛) 경주(慶州) 종 응세(應世)ㆍ소통사(小通事) 김군만(金君萬) 등 6명, 두상(斗上) 김성기(金成己)ㆍ김흔세(金欣世)ㆍ주동(朱同)ㆍ고춘복(高春福), 타공(舵工 키잡이) 한한기(韓汗己)ㆍ김연세(金連世)ㆍ오몽련(吳夢連)ㆍ김언상(金彥祥), 삼선(三船) 이하의 두상(斗上) 강걸(姜乞) 등 7명, 타공 박언복(朴彥福) 등 7명, 격군(格軍) 언금(彥金) 등 2백80명, 역관 이하의 종 16명, 군관 등의 종 14명, 일행 인원(人員)의 총계 4백28명임

․반당(伴倘) : 외국(外國)에 가는 사신이 자비로 데리고 가는 종자(從者)
․도척(刀尺) : 지방 관아에서 음식을 맡아서 만들던 사람
․두상(斗上) : 미상(未詳).
․삼선(三船) : 셋째 배라는 뜻. 일본 가는 사신 일행의 배가 6척이었는데, 1선, 2선, 3선, 4선, 5선, 6선이라는 표현을 썼음
․격군(格軍) : 곁군의 취음(取音). 수부(水夫)의 하나로서 사공의 일을 돕는 사람

주13) 1617년 9월 22일자 이경직의 부상록에는 히로시마(광도)에 살고 있는 포로들 4명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9월 22일
비. 복도 태보(福島 太輔)가 보낸 왜인 두 사람이 작은 배에다 하정 예물을 싣고 배 앞에 와서 배례(拜禮)하는데 조흥도 함께 왔다. 역관을 시켜 말하기를, “갈 때나 올 때나 모두 이렇게 성의를 다하니 매우 감사하다. 또 광도(廣島)에는 포로 된 사람이 많다고 한다. 듣건대, 너의 태보는 제법 호령(號令)이 서고 또한 사체(事體)를 안다 하니, 장군의 영을 반드시 어기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사람을 앞서 보냈지마는 너희들도 또한 돌아가서 보고하여 모름지기 다 찾아내어 보내도록 하라.” 하니, 두 왜인이 절하면서, “명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하직하고 갔다.

포로 되었던 사람 넷이 와서 뵙는데, 하나는 스스로 일컫기를, 전 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 박우(朴佑), 왜명(倭名)은 휴암(休菴)인데 중이 되어 의술(醫術)을 업으로 하여 암도(岩島)에 있으며, 암국태수(岩國太守) 길천광가(吉川廣家)에게 의탁하고 있는데 전라도 나주(羅州) 사람이고, 하나는 대구(大邱) 사람으로 별시위(別侍衛) 안몽상(安夢祥)의 아들 경우(景宇)인데, 승명(僧名)은 탁암(卓菴)이고 의술(醫術)을 업으로 하면서 태보의 조카 우위문(右衛門)에게 의탁하여 광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하나는 전라도 금구(金溝)에 사는 김승수(金承守)의 아들이고 현학(玄鶴)의 손자로서 이름이 응복(應福)인데, 왜명은 정삼랑(正三郞)으로서 광도 지옥정(紙屋町)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하나는 함평(咸平) 광교(廣橋)에 사는 몽걸(夢傑)의 아들 목한(木漢)이라 하였다. 그런데 목한은 군관 안경복(安景福)과 뒤쫓아 하관(下關)에 오기를 약속하고 밖에서 벌써 가 버렸다.

그 나머지 세 사람은 앞에 불러 와서 유시문(諭示文)을 내어 보이며 간곡하게 개유(開諭)하였는데, 안경우는 돌아갈 뜻이 아주 없어 매양 태보가 허락지 않는다고 핑계하고, 박우는 스스로 말하기를, “고국을 향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런 먼 섬에 있기 때문에 도망갈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 사신의 행차를 만났으니, 만약 배 한 척을 얻으면 살던 곳에 돌아가서 처자를 이끌고 중로(中路)에 뒤따라가겠습니다. 자녀가 6~7명인데, 딸 하나는 강호(江戶)의 장군 곁에 있고, 하나는 또 광가(廣家)의 곁에 있으니, 만약 본국 문서만 얻으면 내어 보이고 데려올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곧 마도에 말하여 배 한 척을 세내고, 의성의 관하(管下) 왜인 승병위(勝兵衛)와 통사 왜인 이병위(利兵衛) 등을 데리고 암도(岩島)ㆍ광도 등지에 앞서 가서 각 사람의 처자를 찾아낸 다음, 행차가 도착한 곳에 뒤쫓아 오도록 하였다. (후략)

주14) 광해 9년(1617년) 10월 26일 4번 째 기사
회답하러 갔던 사신이〈서목으로〉장계(狀啓)를 올렸다. “일행이 이달 4일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고, 18일 인시에 완이포(完伊浦)를 떠났으며, 술시에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하였습니다. 데려오는 붙잡혀갔던 남녀는 모두 3백21명입니다.”

주15) 양천경(1560~1591)은 소쇄원을 지은 소쇄처사 양산보(1503~1557)의 손자이고 고암 양자징의 장남이다.

양천경은 정여립 사건의 여파로 양천회 그리고 강해(수은 강항의 큰 형이다)와 함께 1591년(선조 24)에 장살 당하였다. 이를 신묘사화라 한다. 양천경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몽웅이고 차남은 몽린, 삼남은 몽인(귀국 후 몽기로 개명)이다. 딸은 몽인의 누나였다. 일본에 납치된 양몽린 일가 4명의 기록은 오윤겸의 <동사상일록(日錄)>과 이경직의 <부상록>에 나온다.
〔오윤겸의 동사상일록〕

1617년 10월 8일
맑음. 강우성을 고대(苦待)하였으나 오지 아니하였다. 저녁에 돛단 배 한 척이 바다 밖에서 오므로 나는 부사ㆍ종사와 더불어 기둥 밖 바다가 바라뵈는 곳에 나앉아 고대하고 있었는데 점점 포구에 가까워 오는 것을 보니 바로 강우성의 배였다. 그래서 일행 상하가 모두 기뻐하여 서로 불러댔다.

강우성은 광도(廣島) 및 비전주(備前州)를 역방하여 두 곳에서 포로된 사람 46명을 얻고 일기도에 도착하여, 또 한 사람을 얻었는데, 자기는 행차가 머물고 기다리는 것이 염려가 되어서 순풍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작은 배를 타고서 노를 재촉하여 먼저 오고, 포로된 사람을 실은 배는 큰 배인데다 짐마저 무거워서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일기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양몽인(梁夢寅)도 또한 여섯 사람을 거느리고 작은 배를 타고 오다가 서로 일기도에서 만나 바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몽인은 바로 몽린(夢麟)의 아우요 몽린은 천경(千頃)의 아들인데, 정유년 난리에 양씨 집안 일문이 함몰을 당하고 천경의 처 및 자녀 세 사람은 함께 사로잡혀 왔었는데, 오늘날에야 모두 살아서 돌아오니 실로 천행이었다.
〔이경직의 부상록(扶桑錄) 〕

10월 8일(기사)
맑음. 유방원에 체류하였다. 의성에게 쾌속선(快速船) 한 채를 보내 강우성의 행방을 탐지토록 하였다.

강우성이 이날 저녁에 와서, “비전(備前)에 도착해서 나흘을 머물면서 포로된 사람 45명을 찾아내어 삼뢰도(三瀨島)에 도착하여 먼저 내보냈습니다. 광도(廣島)에 도착하여 포로되었던 사람 박우(朴佑)와 같이 쇄환하는 일로 들어갔다가 마도 사람 승위문(勝衛門) 등과 서로 만나 닷새를 머물면서 박우 등 20여 명을 찾아냈습니다. 박우의 처자(妻子)는 또 암국도(巖國島)에 있는데, 데려오려고 하므로 승위문을 시켜 데리고 오도록 한 다음, 저는 먼저 떠났습니다. 초 6일 일기도에 오니, 앞서 보낸 포로들이 탄 배와 양몽린(梁夢麟)의 아우 몽인(夢寅) 등 일곱 사람이 이예주(伊豫州)에서 나오다가 일기도에서 바람에 막혀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를 체류했으나 또한 순풍을 만나지 못하였는데, 저는 타고 있던 쾌속선을 노를 저어 나오고, 소통사 한 사람과 사령(使令) 두 사람을 남겨 두며 포로들이 탄 배를 보호[押領]하고 있다가 바람을 만나면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의성과 조흥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강우성이 온 것을 위로하고, 차송(差送)했던 쾌속선도 또한 불러서 돌아오도록 하였다 했다. 의성이 밤떡을 보내왔다. 조흥이 잔치를 베풀겠다고 재삼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더니, 귤지정을 보내어 청하기까지 하므로 부득이 허락하였다. 귤지정이 송이(松茸)를 보내왔다. 포로된 사람으로서 본도에 있는 사람을 속히 찾아내었다가 일기도에서 바람에 막힌 포로들이 탄 배가 들어오면 곧 출발할 뜻으로 의성 등에게 다시 말하였다.

10월 9일(경오)
맑음. 유방원에 체류하였다. 조흥이 잔치를 베풀어 일행 원역(員役)과 아래로 격군(格軍)까지 모두 궤향(饋饗)하였다.

의성 등에게 묻기를, “본도에 있는 포로된 사람을 어찌해서 지금까지 찾아내지 않는가?”하였더니,

답하기를, “비록 영을 내렸으나 아직 찾아내지 못했는데, 필시 갈 만한 사람은 전일에 다 보냈고 지금 누락(漏落)된 사람은 모두 형편에 어려움이 있는 까닭으로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사신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여기를 지나갈 때에 벌써 쇄환하는 일을 말했으니, 본도에서 모를 일이 아닌데 지금 몇 달이 지났으나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우리가 바다를 바라보건대, 배 두어 척이 일기에서 나오고 있으니 필시 포로들이 탄 배일 것이다. 오늘 들어오면 내일에는 출발할 참이니, 속히 찾아내고, 포로들이 탈 배와 예조에 올릴 문서도 속히 정리해 놓고 기다리라.” 하니,

답하기를, “배는 이미 대선(大船)을 정비(整備)해 놓았고, 문서도 또한 잘 쓰도록 하였으며, 포로된 사람도 미처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섬 안 사람이 매우 적어, 격군은 모두 전일 대판(大坂)에 갔던 사람을 골라 보내게 되는데, 겨울옷을 미처 짓지 못했습니다. 만약 내일 출발한다면 매우 군색할 듯하오니, 행여 하루만 늦추어 모레 승선하신다면, 부지런히 정리하여 다시는 늦추는 일이 없을 것이오니, 천만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재삼 굳게 거절했으나, 그들의 언사와 기색을 보니 미처 정돈하지 못한 일이 있는 듯하므로 정녕 11일로써 약속하고 허락하였다. 의성이 11일에 잠시 전별연 베풀기를 청하므로, 두 번씩이나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답하기를, “전일의 작은 술자리는 행차를 위로한 것이고, 이번에는 전별연을 베풀고자 합니다.” 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포로된 사람에 대한 일은 미루고 핑계하여 시일을 늦추다가, 섬을 떠나는 날에 다만 책임을 때우려 하니, 그 정상(情狀)이 교묘하고 간사하여 너무도 고약하였다.

최의길이 대덕사(大德寺)에 있을 때에 증여받은 물품을 문밖에 나눠 두어 일행 중에 의심이 나게 했고 일행의 체면을 손상시켰는데, 적간관(赤間關)에 와서야 비로소 그 상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온 후 강우성의 돌아옴을 기다려 한 곳에서 조사[憑閱]하여 태벌(笞罰)을 시행하였다. 강우성이 쇄환한 사람이 탄 배 두 척과 양몽인(梁夢寅)이 탄 배 한 척이 일기에서 들어왔다.

조흥이 사람을 시켜 청하기를, “사신이 바다를 건널 때에 도주가 잔치를 베푸는 것은 준례이니, 11일에 설행하기를 청합니다. 만약 허락을 받지 못하면 다만 옛 규례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다시 면목이 없게 되니, 하찮은 정성이나마 굽어 살피시고 사양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두 번이나 베푸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으로써 사양하여 굳게 거절하였다.

주16) 강홍중은 동사록(東槎錄)에서 여러 피로인 들과의 면담 결과를 적어 놓고 있다.

1624년 11월 30일(경진)
맑음. 날이 밝은 후에 발행하여 좌도하(佐渡河) 부교(浮橋)를 지나 묵가(墨街)에 이르러 여염의 점사(店舍)에 사처를 정하니, 또한 미농주 지방으로 장군의 장입(藏入)하는 땅이었다. 강전장감(岡田將監)이 대원(大垣)에서 와 지대(支待)를 주관하였는데, 이 사람은 임진왜란 때에 평행장(平行長)을 따라 평양(平壤)에 왕래하던 자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아내는 조선 사람인데, 아들을 낳아 벌써 장성하여 지금 강호에 가 있습니다.” 하며, 몸소 사후(伺候)하기를 극히 공손하게 하였으며, 접대하는 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중략)

황혼 후에 명호옥(名護屋)에 다다르니, 인가가 곳곳마다 등을 달지 않은 집이 없고 또 횃불로 길을 비추어 밝기가 대낮과 같았다. 대광원(大光院)에 사처를 정하니, 이곳은 미장주(尾張州) 지방으로 덕천미장 중납언의진(德川尾張 中納言義眞)이 관할하는 곳이었다. 의진(義眞)은 수충(秀忠)의 둘째 아우요, 지금 장군의 숙부이며, 나이는 지금 25세요, 녹봉 70만 석을 받는다 한다. 봉행(奉行) 등전민부경 안중(藤田民部卿安重)이 와서 지공(支供)의 일을 주관하였다. 미장(尾張) 지방은 토품이 기름지고 촌락이 번성하여 성중(城中)의 인가가 수만여 호나 되고 장창(長槍)과 이검(利劍)이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 한다.

사로잡혀 온 사람 박승조(朴承祖)라는 자가 찾아와 뵙고, 스스로 운봉(雲峯) 사는 양반의 아들이라 일컬으며, “정유년에 사로잡혀 와 지금 미장성주 의진(尾張城主 義眞)의 마부(馬夫)로 있는데, 본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사신의 행차가 돌아가실 때에 같이 갈까 합니다. 그리고 아내도 또한 서울 남대문 부근에 살던 사람이니, 마땅히 일시에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하였다.

또 두 사람이 와서 뵙는데, 하나는 울산(蔚山) 사람이요, 하나는 진해(鎭海) 사람으로, ‘임진년에 사로잡혀 와 또한 의진의 종이 되어 방금 교사(敎師)로서 사람에게 조총(鳥銃)을 가르친다.’ 하였다. 운봉 사람은 그 말이 거짓 같으나 자못 정녕하게 믿음을 보이므로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해 보냈다.

12월 14일(갑오)
흐리다가 저녁에 눈이 왔다. 강호에서 머물렀다. 현방과 의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18~19일경에 만나보려 한다는 소문이 있는 듯하니, 사신을 위하여 심히 다행한 일입니다.”하였다.

사로잡혀 온 사람 무안 공생(務安貢生) 이애찬(李愛贊)이 와서 소지(所志)를 올려 당시에 사로잡혀 온 곡절과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하나하나 말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비통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갈 때에 같이 데리고 가겠다는 뜻으로서 제급(題給)하였다. 또 낙안(樂安) 사람 조일남(曹一男)이라는 자가 찾아와 양반의 아들이라 이르며, ‘정유년에 사로잡혀 와 평호도(平戶島)에서 살고 있는데 그곳은 바로 일기도주(壹岐島主)가 있는 곳으로 현재 도주의 관하가 되어 지난 4월에 도주를 따라 이곳에 왔다.’ 한다.

우리나라 말에는 비록 약간 서투른 듯 하나 또한 아주 잊어버린 말은 없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당초에 부처(夫妻)가 한때에 사로잡혀 와서 다행히 같이 살고 있습니다만, 항상 돌아갈 마음이 있으므로 본국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장(主將)이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묻기를, ‘네가 본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으면 보내 줄 것이니, 사신을 찾아가 뵈어라.’ 하므로 와서 뵈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장군이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일로(一路)를 검칙하여 접대를 융숭하게 하고 또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던 날에 관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서 보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신은 반드시 칙사(勅使)라 일컫고, 하인은 반드시 당인(唐人)이라 부르게 하는 등 경례(敬禮)를 다하게 했습니다. 사신이 입성(入城)하던 날에 좌우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고요하여 떠드는 소리가 없었던 것이 모두 장군의 명령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항간에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번에 만약 사신이 오지 않았다면 반드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는데, 비록 그렇게 말은 하나 전쟁을 어찌 경솔하게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마는, 소문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또 곤양(昆陽) 사람이 찾아와 뵙고 스스로 이르기를, “김 첨사(金僉使)의 아들이온데 임진년에 사로잡혀 와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포를 잘 쏘므로 수십 인을 데리고 항시 교련을 시키고 있는데, 행차가 돌아가실 때에 만약 데리고 가신다면 이곳에 사로잡혀 온 사람 30여 인을 마땅히 개유(開諭)하여 일시에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경솔하여 성실하지 않은 듯하여 믿을 수 없었다. 세 사신이 같이 상의한 후 사로잡혀 온 사람의 쇄환하는 일로써 현방에게 글을 보내어 집정(執政) 등에게 주선해 보라고 하였다. 저녁에 두 집정이 별도로 하정(下程)을 보내 왔으므로 마도의 사후하는 왜인과 일행 하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행에게 지공하는 요미(料米)는 왜경(倭京)에 있을 때와 같았다.

1624년 12월 23일(계묘)
맑음. 강호에서 머물렀다. 피로인(被擄人)들이 처음에는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하던 자가 이제 와서는 다시 오지 않으며, 간혹 와 뵙는 자도 있으나 혹은 부채가 있다 핑계하고, 혹은 주왜(主倭)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칭탁하여 정상이 백 가지로 변하니, 참으로 분통한 일이다. (후략)

1625년(인조 3) 1월 7일
맑음. 해가 돋은 후 발행하는데, 북풍이 모래를 불어 먼지가 거리에 자욱하여 간신히 세 부교를 건넜다. (중략)

강호로부터 지나오는 일로(一路)에 사로잡혀 온 사람이 없는 곳이 없건만 혹은 주왜(主倭)에게 구애가 되고 혹은 처자에 끌리고 혹은 임시 편안한 데 마음이 쏠려, 비록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있으나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고 혹은 정녕하게 약속하고서도 지금에 와서는 백 가지로 교묘하게 회피한다. 운봉(雲峯) 사람 박승조(朴承祖) 같은 자는 사신의 앞에서 약속하고서도 또한 나타나지 않으니, 그 정상이 극히 밉살스럽다.

1625년 1월 9일
아침에 흐림. 해가 돋은 후 발행하여 안토령(安土嶺)을 넘어 팔번촌(八幡村) 점사에서 점심을 들었다. 지공(支供)은 좌화산(佐和山)에서 판출하였다 한다. 신시(申時)에 수산(守山)에 당도하여 갈 때 유숙하던 절에서 숙박하였다.

사로잡혀 온 여인 3명이 좌화산에서 왔는데, 모두 전라도 사람이었다. 1인은 양반의 딸인데, 정유년 8세 때에 사로잡혀 이곳에 와서, 딸 하나를 낳아 지금 14세인데 같이 데리고 나왔다. (후략)

1625년 1월 12일
간혹 갬.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밤에 하인들이 돈을 다투어 소란을 피우므로, 군관 등을 시켜 사핵(査覈)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운봉(雲峯) 사람 박승조(朴承祖)가 명호옥(名護屋)에서 피로인(被擄人) 1명을 데리고 와서 뵙고, 겸하여 제가 돌아가지 못하는 사연을 전달하였는데, 그 말을 들어보니 그 정상이 또한 그럴 만하였다.

1625년 1월 17일
맑음. 사시(巳時)에 출발하여 시가지를 지나 대불사(大佛寺)를 찾아가니, 대불사는 왜경의 동남방에 있었다. 현방과 더불어 두루 보니 금부처 하나가 당중(堂中)에 있는데, 그 높이는 10여 장(丈)이요, 그 둘레는 한 산더미와 같았다. 층탑(層榻)과 사벽(四壁)은 모두 황금으로 칠했으며, 건물은 크고 헌걸스러워 기둥의 크기가 세 아름이었다. 바닥에는 큰 돌을 깔았는데 깎고 갈아서 매끄러웠으니, 그 제도(制度)의 장려(壯麗)함이 천하에 둘도 없는 거찰(巨刹)이었다.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중수한 지 겨우 20여 년이 된다 한다.

절 앞에 봉분(封墳)과 같은 높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석탑(石塔)이 세워졌다. 왜인들이, “수길(秀吉)이 조선[我國]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 이곳에 묻었는데,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秀賴)가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하며, 어떤 사람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한 후에 그 수급(首級)을 이곳에 묻었다.” 하니, 들으매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미시에 정포(淀浦)에 다다랐는데, 대불사에서 정포까지 여염이 연달았으니, 이는 복견(伏見)을 왕래하는 큰길이었다. 남으로 복견성(伏見城)을 바라보니 수길이 죽은 후 수십 년 이래로 점점 조잔(凋殘)하여져 다만 성터만 있을 뿐이요, 여러 왜장의 집이 모두 황폐하고 허물어졌으며, 청정(淸正)의 집도 또한 길가에 있는데 이제는 다 허물어져 있었다. 오직 사찰이 여염 가운데 섞여 있어 송죽(松竹)이 집을 두르고 부도(浮屠)와 층탑(層塔)이 반공에 솟았으니, 일본이 불교를 숭상함을 알 수 있다. 정포 대관은 곧 판창(板倉)이 보낸 사람인데 진무〔振舞 연향(宴享)의 이름〕를 베풀어 공궤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종사와 더불어 같이 상선(上船)을 타고 물을 따라 내려가서 중류(中流)에 떠서 사방을 바라보니 강산(江山)이 절승하였다. 갈 때에는 밤에 갔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보았는데, 진작 배에 올라 마음껏 구경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해가 저문 후에 각기 자기 배로 옮겨 타고 밤이 깊어 평방(平方)에 당도하니, 이는 점심참을 베푼 곳이다. 대관 등이 숙공(熟供)을 올리고 일행 하인까지 공궤하였다. 달이 한 길[丈]이나 오른 후에 다시 뱃길을 떠났다. 밤중에 비바람이 갑자기 휘몰아치므로 대판을 10여 리 앞두고 배를 정박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복견에서 남쪽으로 우치(宇治)를 바라보니, 마을이 즐비하여 한쪽 면에 가득하였는데, 차(茶)의 산지로 온 나라에 이름이 높았다. 마을 앞에는 긴 다리 하나가 있는데, 봄꽃이 만발할 때에는 여러 왜장들이 이 다리에 모여 천렵(川獵)을 하고 차를 끓여 종일 유흥(遊興)한다고 한다. 정포(淀浦)에서 배를 타고 몇 리를 지나 서쪽으로 산기(山崎)를 바라보니, 이곳은 수길(秀吉)이 명지(明智)와 싸워 승전한 곳이라 한다.

피로인(被擄人) 6명이 왜경에서 따라왔는데, 그 가운데 한 여인은 거제도(巨濟島) 사람이다. 다섯 오빠와 한 언니가 고향에 생존해 있음을 듣고 그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왔다.

왜경으로부터 육로 40리, 강로(江路) 90리를 행하였다.

왜경에서 나올 때에 중국 사람 7~8명이 관광하는 사람 틈에 있으므로, 물어보니, ‘장삿일로 늘 장기(長崎)에 왕래하여 혹 수 년을 유련(留連)하여 돌아가지 않는다.’ 한다. 장기는 상선(商船)이 폭주(輻湊)하는 곳이었다.

강홍중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포로들의 출신지는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자가 많다. 왜군은 정유재란 때 전라도를 집중 점령하였고,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남부지역에 주로 주둔하였기에 전라도와 경상도 백성들을 많이 잡아갔다.

주17) 1625년 3월 7일 강홍중의 동사록(東槎錄)
맑음. 수사와 첨사가 찾아와 보았다. 조반 후에 발행하는데 상사는 동래에 들르지 않고 곧장 양산(梁山)으로 향하였으니, 부사(府使)와 감정이 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신기(神氣)가 불평하여 유숙하였는데, 동래 부사와 울산 부사가 와서 담화하였고, 조금 후에 종사가 또한 와서 담화하다가 곧 양산(梁山)으로 향하였다. (중략)

부산에서 발행할 때에 쇄환인 등이 서로 이끌고 따라오며 말 앞에서 통곡하였다. 아마 배 안에서는 주방(廚房)에서 공궤하였는데, 부산에 와서는 의뢰할 곳이 없고, 고향으로 가고자 해도 또 길을 알지 못하여서이리라. 이 때문에 울부짖으며 따라오니, 정경이 지극히 가련하였다. 행중(行中)의 나머지 양식을 덜어내어 각기 5일간 양식을 주어 보내고, 그 살던 고을에 관문(關文)을 써서 각기 그 사람에게 부쳤다.

주18) 오다 쥬리아는 조선 양반의 딸인데,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잡혀 그의 양녀가 되었다. 그녀는 천주교도가 되었는데 고니시가 처형된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


1611년 에스파나의 국왕사절 비스카이노는 “이에야스의 시녀 쥬리아의 집에서 열린 미사에 갔다. 유리로 만든 완구를 주자, 그것보다 로사리오 묵주와 예수의 초상을 희망했다”라는 신실한 신자로서의 모습을 보고하고 있다.

천주교를 금지한 이에야스가 주리아의 미모와 재능을 사랑하여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녀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결국 어부 몇 사람만 사는 절해 고도 고즈시마(神津島)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오늘날 한일 가톨릭교에서 오타 쥬리아는 순교자이자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고즈시마 섬에서는 매년 5월 세 번째 일요일에 주리아제가 열리고 있다.

한편 나가사키 일대에서는 조선인 포로 수천 명이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며 일본 기독교사에 순교자로 기록된 자도 21명이고 그중 9명이 복자로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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