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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예전쟁,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 1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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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노예전쟁,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1)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 이는 정유재란 때 더욱 심하였는데 왜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조선인을 잡아갔다. 심지어 부산에 노예상인들이 와서 포로들을 직접 사 갔는데 포르투갈 노예상인도 조선에 건너가기도 하였다.(주1과 2)

일본 안양사 주지 케이넨(慶念)은 1597년 6월 24일부터 1598년 2월 2일 사이에 일본 규슈(九州) 우스끼성 성주 오오타 히슈우의 군의관으로 종군하였는데 그는 이 시기에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를 썼다.

승려 케이넨의 1597년 8월 5일과 8월 6일 그리고 11월 19일자 일기를 읽어보면 왜군의 포악성이 잘 드러나 있다.

1597년 8월 5일 적국인 전라도라고 하지만 검붉게 치솟아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런 상황을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나.

8월 6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금속 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게 되었다. 들도 산도 불지르는데 혈안이 된 무사들의 소리가 시끄럽고, 마치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비참한 광경이구나.

11월 19일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왔는데,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노예상도 있었다. 이들은 군대의 행렬을 따라 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서 불로 목을 묶어 앞으로 몰고 가는 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 붙여 두들겨 패는 모습이 지옥의 아방(阿防)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길들이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왜군은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 남녀노소를 잡아다가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나가사키나 히라도 등에서 포르투갈 노예상인에게 팔아 넘기는 등 국제적 인신매매를 하였다.(주3)

왜군이 조선인을 납치한 목적은 농촌 노동력의 보충, 가사와 공장 노예의 획득, 도공, 세공, 직조공, 바느질 쟁이, 의사 등 기술인력 확보, 국제 노예상인에게 매매 등이었다. 일본은 그간 100년간의 국내 전쟁과 두 번의 조선 침략으로 남자는 대부분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조선인은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인적자원이었다.(주4)

특히 포로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노동력 확보에 도움이 되었고, 포르투갈 상인들이 선호하여 마카오, 유럽 등에 팔려가기도 하였다.(주5)

피로인 중에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1577~1640)가 그린 드로잉 작품 <조선 남자>의 모델이 된 이도 있었다. 바로 안토니오 꼬레아(Antonio Correa)이다. 1993년에 MBC TV는 다큐멘터리 <역사 대기행 안토니오 꼬레아>를 방영했는데 남원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가 남원에서 납치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주6, 사진 참조)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의 의병군에 참가한 적도 있는 조위한(趙緯韓)은 1612년에 ‘최척전(崔陟傳)’이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다.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이산가족이 된 최척(崔陟)과 옥영(玉英) 부부가 각기 중국인과 일본인 상선을 타고 베트남으로 갔다가 기이한 해후를 한다는 내용이다.

한편 필자는 2014년 4월 14일에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열린 테마전시회를 관람하였다. ‘난세에서의 편지’ 전시는 천수각 소장 편지 84개를 전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전국시대 무장들의 편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보낸 공문을 보았다. 1597년 11월 29일에 작성된 이 공문은 ‘잡아둔 조선인 포로 중에서 세공, 바느질 잘 하는 사람, 솜씨가 있는 여자를 진상하라’고 적혀 있었다. 해설에는 ‘히데요시의 정실부인인 오네가 조선인 여자를 하녀로 부리면서 30년간 데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주 7과 주 8, 사진 참조)

주1) 임진왜란 중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피로인(被虜人)이라 한다. 전쟁에 참가하여 붙잡힌 병사를 포로라고 하는데, 피로인은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도 강제로 잡혀 간 민간인을 말한다.

피로(被虜)는 조선 조정의 공식 호칭이었다. 1607년 일본에 보내는 예조참판의 서계나 선조수정실록에도 피로(被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1607년 1월 1일 3번 째 기사

회답사에 쇄환사(刷還使)를 겸칭하도록 명하였다. 여우길(呂祐吉) 등이 떠난 후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전후 성교(聖敎)를 보건대 사신의 행차에 우리나라 피로인(被擄人)들을 모두 쇄환코자 한다 하였습니다. 무릇 이를 보고 듣는 자로서 누군들 감격치 않겠습니까. 구구하게 이런 거조를 하는 것은 백성을 위해 굽히는 것이니, 사신의 명호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고 칭하고 중국 조정에 주문(奏文)할 때에도 이러한 뜻을 언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리고 상이 하교하기를,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로는 왜인의 조총(鳥銃)이 가장 절묘하다. 백금을 넉넉히 보내 역관(譯官)들로 하여금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사서 가져오게 하라.” 하니,
이에 해조(該曹)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 상의 뜻을 알렸다. 이로 말미암아 사행(使行)에 참여한 사람들이 화물(貨物)을 많이 가지고 가 모두 흥리(興利)할 계책을 꾸몄으므로 식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군사-군기(軍器)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호구-이동(移動) / *무역(貿易)

주2)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악성은 극에 달하였다. 살인과 납치,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 히데요시가 내린 명령서에는 조선에서 왜군들이 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 사항이 명시되어 있었는데 이를 보면 조선 백성에 대한 회유책을 썼다.

하나, 군대에 의한 약탈이나 난폭 행위
하나, 방화(放火)
하나, 백성에 대한 무리한 불법 요구

그런데 정유재란 때는 히데요시의 명령은 마치 금수와 같았다. 왜군은 조선의 관리와 가족을 샅샅이 찾아내어 죽이고 집을 불태웠으며, 백성들도 모두 죽이도록 하는 등 무력적이고 강압적이었다.

1597년 8월 16일의 승려 케이넨 일기는 전라도 남원 백성들이 처참하게 살육 당하였음을 보여준다.

남원성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 무참하구나.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덧없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죽었구나.

주3)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은 최소한 10만 명 이상이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처음에는 5~6만 명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2~3만 명으로 축소하였다. 한국은 일반적으로 10만 명 정도로 보고 있는데 심지어 40만 명까지 보는 학자도 있다.

일본 학자 나이토 슌포(1896~1990)은 당시 확인 가능한 자료를 모아서 얻은 데이터에 근거하여 2~3만 명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이 연구는 300년이 지난 뒤에 나온 연구였으므로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허남린, p 91)

한국 측에서 포로를 10만 명으로 보는 근거는 1599년 7월에 조선으로 돌아온 정희득이 상소문에서 ‘일본에 잡혀간 포로가 남자가 3~4만 명은 되겠고, 늙고 약한 여자는 그 수가 갑절이나 될 것’이라고 밝힌 점과 피로인 전이생의 상소문을 들고 있다.

피로인이 40만명으로 보는 학자는 1591년과 1598년 당시 조선의 인구를 각각 1,300만 명과 1,085만 명으로 파악하여 115만명의 인구가 감소한 점에 주목하여 100만명 이상이 왜란으로 인해 사망 내지 포로였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코베기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45만 명이 죽고 15만 명 정도의 오차 범위를 두면 피로인이 4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김문자, p 126, 민덕기 p387-388)

그러나 40만 명이라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더구나 인구 감소는 215만명(1,300 - 1,085 = 215만명)인데 115만 명으로 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한편 정재정과 김미선은 피로인이 9만 명에서 14만 명에 달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주4) 김문자(p 125)는 포로들의 납치 목적을 (1) 일본 내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2) 다도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도공을 연행 (3) 전지에서 군량수송과 축성 잡역 등 노역요원으로 사용 (4) 여자와 어린이 중에서 미모가 뛰어난 자 (5) 전쟁 중에 일본에 협력한 자 (6) 전쟁중 조선 여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반한 경우 (7) 미색을 탐하는 왜군의 호색적 요구 (8) 노예 매매를 목적으로 한 경우 등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주5) 16세기에는 아시아 노예무역이 횡행했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나가사키 등에 상주하면서 국제적 인신매매를 했다. 일본인은 조선 포로를 팔면서 조총, 비단, 담배 등으로 바꾸었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상인의 노예 매매에 협조를 하기도 하였다.(허남린 p 91-93)
일본에 와 있던 루이스 세르케이라는 1598년 9월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손승철, 조선통신사, 일본과 통하다 p153)

나가사키에 인접한 곳에 있는 많은 일본인들은 포르투갈 사람이 노예를 사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상인들은 그들에게 조선 사람을 팔기 위하여 일본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선인이 잡혀있는 지역에서 그들을 구매하는 한편, 조선인을 포획하기 위해 직접 조선으로 가기도 했다. 조선인을 포획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중국 배에서 이들을 포로투갈 상인에게 팔았다.(1598년 9월 4일 기록)

주6) 루벤스의 그림에 나오는 <조선 남자 1617~1618년 작 추정> 모델 ‘안토니오 코레아’는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가 1598년 3월 일본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5명중 한 명인데, 이는 당시에 일본이 세계 노예무역 시장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일주기(1591~1606)>에 나오는 안토니오 관련 기록은 곽차섭의 책 p138-139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은 9개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 이 중 어떤 곳들로부터 즉 해안에 가까운 지방들에서 왜군은 연령을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자와 여자, 소년 소녀를 잡아왔는데,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

나는 12 스쿠도를 약간 넘은 가격으로 그 중 5명을 샀다. 나는 그들에게 세례를 받게 한 뒤, 인도의 고아로 데려가 그곳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나는 이중 한명을 나와 함께 피렌체까지 데리고 왔는데 그는 지금 안토니오란 이름으로 로마에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979년 10월 7일 한국일보에는 이탈리아 남단 알비 시에는 코레아(Corea) 씨의 집성촌이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시조로 거론되는 인물은 정유재란 때 노예로 팔린 조선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에는 박용구가 뮤지컬 ‘불멸의 피리’를 완성했는데 그 줄거리는 1597년에 전라도 운봉에서 왜병에게 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가, 나가사키 노예시장에서 팔린 코레아를 그리고 있다. 1993년에는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 소설도 간행되었다.

여담이지만 1610년대에 이탈리아의 바티칸 신부들이 로마에서 살게 된 안토니오 코레아를 만주를 통해 한반도에 입국시켜 선교를 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좌절되었다고 한다.

주7) 오사카성 전투 400년(2014~2015)기념 ‘난세에서의 편지’ 전시회에서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보낸 공문(1597년 11월 29일)과 영문 해설은 다음과 같다.

16.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발행한 공문서〔주인장(朱印狀)〕

아카가이 야스오 기증 / 오사카 성(城) 박물관 소장품

보고 계시는 편지는 정유재란(경장의 역) 때에 히데요시가 한국 진영에 있는 영주들에게 포로들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명령을 내린 내용을 포함한 공문서입니다.

히데요시는 공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한국인들 중에 세공, 자수 기술자, 바느질 잘하는 사람, 그리고 손재주가 뛰어난 여자가 있다면 감금을 하고 내게 보내시오. 나를 위해 일을 하게 하겠소. 집집마다 수색을 하여 그들을 잡아오시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백성들은 붙잡히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제로 노역을 하거나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바다를 건너 한국을 침략했던 일본군은 일본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량의 현지 남자들과 여자들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아리타 도자기와 가라쓰 도자기를 만든 도공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데요시를 위해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로 일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오네는 포로로 잡혀온 궁녀들을 곁에 뒀고 이 편지가 쓰였을 때부터 그녀의 죽음까지 거의 30년에 걸쳐 그들을 신임했습니다.

16. Red-sealed Letter issued by Hideyoshi Toyotomi

Donated by Mr. Yasuo Akagai / Osaka Castle Museum Collection

Shown here is one of the red-sealed letters in which Hideyoshi ordered the lords at the camp in Korea during the Keicho-no-Eki (the Second Korean Campaign) to send hostages to him.
Hideyoshi mentions:
"If there are craftsmen, embroidery artisans, and women who are good hands among Koreans, keep them under restraint, send them to me. I will make them work for me. Investigate through the houses and arrest them."
On the occasion of battles even in Japan, common people were arrested and taken as hostages. They were forced to work as laborers or for human trafficking, which frequently happened.
The Japanese army, which had crossed the sea and gone to Korea, captured local men and women in large numbers in the same way as in Japan and brought them back to Japan. Among these people, potters of Arita Ware and Karatsu Ware were included.
It is unknown how many Koreans Hideyoshi forced to work for him. However his wife O-ne employed lady attendants who were brought in as hostages, and she placed her confidence in them for nearly 30 years from the time when this letter was issued to the time of her death.

그런데 영문 해설 중에 임진왜란의 번역이 조금 이상하다. Korean Campaign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보통 임진왜란은 Japanese Invasion of Korea, Imjin War 또는 Hideyoshi Invasions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이 조선 캠페인이라니.

전쟁이 무슨 사회・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활동]인가? 여기에 일본의 얄팍한 꼼수가 드러난다. 역사를 은폐 축소하고 왜곡하는 술수가 엿보인다.

한편 임진왜란 7년 전쟁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명칭이 없다. 한국은 임진왜란(임진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동), 정유재란이라 하고, 통털어서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일본은 문록․경장의 역(役)이라고 칭하여 천황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고, 중국은 만력의 역 또는 항왜원조(왜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라고 한다. 그래서 김성한은 소설 제목을 ‘7년 전쟁’으로 이이화는 책 제목을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이라고 하였다.

주8)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년)는 일본 히젠 국(肥前国) 사가번(佐賀藩) 번조(藩祖)이다. 그는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와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휘하 장수로 참전하였다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을 들었고 1608년에는 사가성을 수축해 히젠국 사가번의 기초를 세웠다. 또한 이삼평(李參平) 등 많은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아리타를 일본 도자기 생산지로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정유재란 때 전라도 금구·김제, 화순, 능주 등에서 5,444개의 코를 베어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오사카 성 전시회 난세에서의 편지
2.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보낸 공문
3. 루벤스의 드로잉 <조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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