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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본 쿄토의 귀무덤(코무덤) 3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15회 일본 교토의 귀무덤(코무덤) (3)

교토의 코무덤은 조선 통신사가 마주치기 꺼려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조선 통신사에게 대불사 옆에 있는 코 무덤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무위(武威)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1719년 11월에 조선 통신사가 일본 측의 대불사 연회 참석 요청을 거부한 사건이 터졌다. 이 해 4월에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제8대 쇼군 세습을 축하하고자 조선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정사는 홍치중, 부사는 황선, 종사관 이명언, 제술관 신유한이었고, 통신사 일행은 475명이었다.(주11)

이번의 통신사는 상당히 긴장된 모습이었다. 1711년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가 아라이 하쿠세키의 ‘빙례개혁’(조선 멸시적 대우)에 휘둘린 끝에 ‘나라를 욕되게 한 죄’로 관직을 박탈당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주12) 그래서 홍치중 등 통신사들은 설령 ‘관례’일지라도 ‘명분’을 내세워 일본 측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10월 29일에 쓰시마 번주는 대진에서 통신사 일행에게 교토 대불사에서 열릴 연회에 참석하여 달라는 쇼군의 요청을 전달했다. 11월 1일 교토에 도착한 통신사들은 완곡하게 참석을 거절하였다.

11월 1일자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을 읽어보자.

어제 대진(大津)에서 대마도 태수가 봉행을 시켜 전하기를, “예전부터 사신의 행차가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대불사(大佛寺)에 들립니다. 대불사는 경도(京都)의 남쪽 5리쯤에 있는데 관백이 미리 지방관으로 하여금 술과 찬을 만들어 연회를 준비하였으니, 내일 아침에 왕림해 주십시오.” 하였는데,

사신이 대답하기를, “태수가 관백의 명으로 우리를 성대한 연회에 초대하는데 어찌 사양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본국에 있을 때에 평소에 들으니 대불사는 풍신수길의 원당(願堂)이라 하더이다. 이 적(賊)은 우리나라 백 년의 원수로서 의리상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데 어찌 그 절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후의를 사양하겠습니다.” 하였다.

일본 측은 크게 당황하여 대불사가 히데요시의 법당이 아니라고 설득하였다. 심지어 <일본연대기> 책까지 보내어 변명하려 했다. 조선 사신들은 이런 일본의 변명에 대해 정색을 하고 대응하기에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여, 정사와 부사는 연회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종사관은 병을 이유로 동행하지 않았다.(주13)

이에 대하여 일본측 수행인 아메노모리 호슈(우삼동)가 분노를 폭발시켰다.

우삼동(雨森東)은 사나운 사람이었다. 화풀이를 할 데가 없어서 곧 수역관과 사사로운 싸움을 벌였다. 조선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사자처럼 으르렁거리고 고슴도치처럼 화를 냈다. 어금니를 드러내고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마치 칼집에서 칼이 나오고 있는 듯하였다.

내가 이때 복도를 내려가다가 마침 보고 우삼동을 부르며 말하기를, “그대는 글을 읽은 사람이 아닌가. 어찌 화를 내어 이렇게 행패를 부리는가.” 하니,

그는 곧《연대기(年代記)》라는 책 하나를 가지고 와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구부려서 땅을 그으며 분이 나서 말하기를, “당초에 사신이 원당에 관한 말을 잘못 듣고 의리상 원수의 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할 때에는 누가 감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관백께서는 이웃 나라와의 우호에 돈독하여 감히 사신에게 연회하는 예절을 정지하지 못하여 국가의 사적을 가지고 증거를 대어 원씨의 절임을 밝혔으니, 우리나라에서 사신에 대하여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국가의 사적을 믿지 아니하고 공식적인 대접을 받지 않으려 하니, 이것은 우리를 낮추어 보는 것이며 우리를 약하게 보는 것이니, 나는 죽고 말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두 사신이 이미 들리겠다는 허락이 있었으니, 종사관은 병이 나서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다. 가령 그 사이에 그대의 뜻에 맞지 아니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관들이 주선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대가 사소한 혈기에 의한 분을 참지 못하고 일개 역관과 사사로이 싸우니 이것은 조말(曹沫)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요?” 하니, 우삼동이 드디어 사과하고 갔다. 밥 먹은 뒤에 출발하였다.

(조말은 제 환공(齊桓公)이 노군(魯君)과 회맹(會盟)할 때에 조말이 비수를 들고 단에 올라서 제 환공을 협박하여 노(魯)가 제(齊)에게 침략당한 땅을 반환케 하였다.) 〔해유록(海遊錄) 11월 3일〕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일본 외교관이다. 그런 그였지만 그 역시 대불사 연회 참석과 관련하여 화를 냈으니, 한일 간 역사인식에는 이토록 차이가 극명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주14)

한편 1719년에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두 편의 가부키가 오사카에서 공연되었다. 하나는 <본조 삼국지>로 2월에 다케모토자(죽본좌)에서 공연되었고, 다른 하나는 <신공황후 삼한책>으로 5월에 도요다케자(풍죽좌)에서 공연되었다.(주15)

<본조 삼국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윤색한 극화이다. 히데요시는 삼국을 항복시켜 삼국 왕으로부터 피로 쓴 항복문서를 받는다. 이어서 히데요시는 병사들이 벤 적들의 귀를 가지고 와서 교토에 묻고 묘를 만들어 준다. 가부키에 귀(코)무덤이 등장하고 있다. 이를 본 일본인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라는 인식이 가 득 하였으리라.

메이지 시대에도 히데요시에 대한 가부키가 자주 무대에 올랐다. 가부키에 출연한 주연 배우들은 공연 전후에 풍국신사와 코무덤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거금을 희사하고 코무덤의 울타리 석책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하였다. 실제로 필자가 본 코무덤 울타리 석책에는 죽본좌, 풍죽좌란 가부키 극장의 이름과 배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사진 참조)

메이지 유신 이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부활하였다. 1868년에 메이지 천황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주하는 에도 막부 군을 추격하기 위하여 관동으로 향하던 도중,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위해 새로 사당을 만들어 그의 공훈과 위엄을 기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교토와 오사카는 앞 다투어 풍국신사를 건립했다.

1890년에는 풍국회가 결성되었다. 풍국회는 전국적인 모금을 통해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하였다. 1898년은 히데요시가 죽은 지 300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풍국회는 교토를 중심으로 300년제를 성대하게 치렀다.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에 대한 국민 열광이 이에 호응한 것이다. 이때 코무덤도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일본의 정한론도 히데요시의 재조명 사업과 결부되어 진행되었다. 정한론자들은 히데요시의 ‘미완의 위업’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적극 추진하였고,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노일전쟁에서 이기자 더욱 가시화 하였다. 1905년에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초대 통감으로 조선에 와서 고종을 폐위하는 등 조선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제에 의해 36년간 강점되고 말았다.

필자는 교토의 미미쯔까(이총) 앞에서 분명히 보았다. 이 무덤은 처음에는 코무덤이었지만 어느 순간에 교활하게 귀무덤이 되었음을. 코무덤이 히데요시의 전리품이고 일본의 무위를 과시하기 위한 유물임을.(주16)

이 무덤을 본 한국의 관광객들은 일본의 만행에 모두 분노한다. 임진왜란의 아픈 상처를 다시금 느낀다. 지금도 우리는 일본과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 위안부, 독도, 일본 교사서 역사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일본 우익의 역사인식에 분노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주11) 조선 통신사는 1719년 4월 10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9월 4일에 오사카, 9월 27일 에도에 도착하여 10월 1일 국서를 봉정한 다음 10월 15일까지 아사쿠사에 머물렀다.

주12)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년)는 <일본서기>의 오랑캐 사관에 기초하여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경시하면서, 임진왜란을 합리화 시킨 대표적인 일본의 유학자이다.

주1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5년에 호코지(방광사)를 지었는데 1596년 대지진으로 붕괴되었다. 1612년에 히데요리는 그 자리에다가 다시 대불전을 지었다. 그가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에야스는 방광사의 대불을 짓는 것은 히데요시의 숙원사업이기 때문에 그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히데요리에게 강하게 권유하였다. 이에 따라 히데요리는 대불전 공사를 벌여 1614년 4월에 범종이 완성되었고 이어서 건물과 대불도 완성되어 8월에는 대불개안 공양식이 거행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범종에 새긴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이라는 명문(銘文)을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은 문제를 삼았다. "國家安康"은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이름인 "家"와 "康"을 교묘하게 떼어놓았고, "君臣豊樂"은 "토요토미(豊臣)"의 번영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범종의 명문이 자신을 모독하였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오사카 성에서 1614년 겨울과 1615년 여름전투를 하여 오사카 성을 함락시켰다. 1615년 5월에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1593~1615)와 그의 어머니 요도기미(淀君)는 자결하였고, 히데요시 가는 멸문되었다.(사진 오사카 성 자결터 참조)

대불전도 1798년 낙뢰로 인해 소실되어 범종만이 남았다. 현재 방광사 일대는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풍국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조선 통신사 사행록에 나오는 대불사는 정확히 말하면 방광사 대불전이다.

주14) 아메노모리 호슈(일본어 雨森芳洲 1668~1755)는 에도 시대 의 의사이자 유학자이다. 한문, 조선어,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조선 무역의 중개 역할을 하던 쓰시마 번에서 외교 담당 문관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최초로 조선어 교과서인《교린수지(交隣須知)》를 집필하였으며, 전문 통역관으로서 통역 양성학교도 설립하였다. 성신의 외교관계를 강조했으며, 조선과 일본 양국 우호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조선식 이름을 사용했다.

주15) <신공황후삼한책>에서는 서기 249년 신공황후의 한반도 공략을 그렸다. 일본의 1군은 고구려를 이기고 2군은 백제를 항복시키고 3군은 신라를 쳐들어간다. 궁지에 몰린 신라왕이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신공황후는 기뻐하며 창을 들고서 커다란 바위에 크게 새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서기 249년)에는 “신공황후가 직접 배를 타고 물고기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에 도착하니 신라왕이 싸울 엄두도 못 내고 스스로 몸을 결박하여 항복하므로 신라를 ‘정벌’해서 신라왕을 말먹이꾼으로 정했으며, 이 소식을 듣고 고구려왕과 백제왕이 신공황후를 찾아와서 야마토의 서번(西藩)이 되고 영구히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하므로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삼한(三韓)이라는 것이요, 해마다 신라왕이 80척 배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치는 것이 이러한 연유”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신용하 교수는 이 기록은 역사날조라는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는 히미코를 기리는 일본 8세기 초 무녀(巫女)의 서사무가이고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주16) 경남 사천시 선진리 조명군총 옆에 있는 이총은 지금도 이름이 귀무덤이다. 사천의 이총 명칭은 조속히 코무덤(비총)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진
1. 교토의 코무덤 석책
2. 오사카 성
3. 오사카 성의 풍국신사
4. 오사카 성 히데요리 자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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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손승철, 조선통신사를 보는 양국의 시각, 동북아 역사재단 편, 역사속의 한일관계, 동북아역사재단, 2009, p 144- 161
o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 1 규슈,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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