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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본 교토의 귀무덤(코무덤) 2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14회 일본 교토의 귀 무덤(코 무덤) (2)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세키가하라 벌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家臣)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와 싸워 대승을 거두고 패권을 잡았다. 1603년에 도쿠가와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관동의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세웠다. 에도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주 8)

이어서 에도 막부는 1615년 여름 오사카 성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1593~1615) 군대를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패한 히데요리는 자살하였고 히데요시 가문은 문을 닫았다.

그러면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 입장은 분명하지 않다. 적극적으로 히데요시 흔적 지우기에 나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찬양을 하지도 않았다.

1700년 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 역사소설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가 인기를 끌었다. 1719년에는 히데요시를 주연으로 하는 가부키가 오사카에서 공연되었는데 대성황이었다. 백성들은 히데요시에 열광하였다. 이에 대하여 에도 막부는 수수방관이었다.

교토의 코 무덤에 대하여도 그렇다. 에도 막부는 코 무덤을 은근히 활용하였다. 조선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하였을 때 히데요시가 세운 대불사를 방문코스로 넣고, 그 옆에 있는 코 무덤을 자연스럽게 보도록 한 것이다.

한편 에도막부는 임진왜란 7년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조선과의 교린을 추진하였다. 1599년부터 대마도주는 일본에 끌고 간 조선포로들을 수시로 송환하면서 교섭을 간청하였다. 1604년에 조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중을 살피기 위하여 승려 사명당을 탐적사( 探賊使)란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탐적사란 ‘도적의 행동을 살피는 사신.’이다. 당시 조선의 대일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1605년 3월에 송운대사 유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이때 이에야스는 자신은 임진왜란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강변하였다. 이에 유정은 에도막부의 뜻을 확인하고 포로 1,39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606년 6월에 조선은 두 가지 조건을 일본에 제시하였다. 즉 일본 국왕 명의의 강화요청서를 보낼 것, 임진왜란 당시 왕릉 도굴범을 붙잡아 보낼 것이었다. 11월 8일에 일본은 일본 국왕 인이 찍힌 문서와 도굴범 두 사람을 범인으로 조선에 보냈다.

물론 조선에서는 국서는 위조이고, 도굴범도 잡범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조선의 요구가 형식적으로는 수용되었기 때문에 1607년(선조 40)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은 1811년까지 12번 통신사를 파견하였다.(주 9)

조선의 초기 3회(1607년, 1617년, 1624년) 일본 사절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 했다. 회답이란 외교적 사항에 대한 답례라는 뜻이고, 쇄환이란 ‘모두 데려 온다.’는 뜻이다. 쇄는 빗자루란 의미이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전후 처리와 일본에 끌려간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을 ‘빗자루로 쓸듯이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신뢰가 통한다.’는 의미의 통신사(通信使)는 1636년 4회 사신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 사신이 코 무덤을 본 것은 1617년 사행 때부터이다.(주 10) 1617년에 조선 정부는 포로 쇄환과 에도막부의 오사카 평정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정사는 오윤겸, 부사는 박재, 종사관은 이경직이었고 일행은 428명이었다.

8월 26일에 후시미성(복견성)에서는 히데타다 쇼군에 대한 국서 봉정식이 거행되었고 연회가 벌어졌다. 히데타다 막부는 후시미 성의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하급관리와 하인들에게 대불사에서 음식을 접대하였다. 조선 사신들은 대불사 연회에도 참석하고 근처의 코 무덤을 보았다.
이경직의 <부상록>에 그 기록이 있다.

대불사 절 앞에 높은 구릉이 있어 무덤 모양 같았고, 석탑(石塔)을 설치했는데 수길이 우리나라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다가 여기에 묻은 것이다.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가 봉분을 만들고 비(碑)를 세웠다 하는데, 이 말을 들으니 뼈에 사무치는 통분을 견딜 수 없었다.

1624년에 조선은 에도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쇼군 세습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신들은 에도를 다녀오는 길에 교토에 머물렀는데 1625년 1월 17일에 대불사를 찾았다.

부사 강홍중(1577~1642)의 <동사록>을 읽어보자.

1625년 1월 17일. 맑음. 사시(巳時)에 출발하여 시가지를 지나 대불사(大佛寺)를 찾아가니, 대불사는 왜경의 동남방에 있었다. 현방과 더불어 두루 보니 금부처 하나가 당중(堂中)에 있는데, 그 높이는 10여 장(丈)이요, 그 둘레는 한 산더미와 같았다. 층탑(層榻)과 사벽(四壁)은 모두 황금으로 칠했으며, 건물은 크고 헌걸스러워 기둥의 크기가 세 아름이었다. 바닥에는 큰 돌을 깔았는데 깎고 갈아서 매끄러웠으니, 그 제도의 장려(壯麗)함이 천하에 둘도 없는 거찰(巨刹)이었다.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중수한 지 겨우 20여 년이 된다 한다.

절 앞에 봉분(封墳)과 같은 높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왜인들이 “수길이 조선(我國)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 이곳에 묻었는데,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秀賴)가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하며, 어떤 사람은 “진주성이 함락한 후에 그 수급(首級)을 이곳에 묻었다.” 하니, 들으매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후략)

코 무덤을 본 강홍중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진주 출신인 그가 진주성이 함락된 후에 전사한 조선 군사들의 수급을 이곳에 묻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더욱 통분하였으리라.

1655년에도 조선통신사들은 에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교토를 들렀다. 종사관 남용익의 11월 16일자 부상일록(扶桑日錄)를 읽어보자.

아침에 비오고 낮에 흐림. 왜경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대진(大津)에서 점심을 먹는데 하총수(下總守)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이어 대불사에 들러 구경하기를 청하였다. 의성이 또 간청하기를 “절이 길가에 있어 몇 리 밖에 되지 않는데 전부터 사신이 다 들러서 구경하였으므로 하총수가 이미 와서 기다리니 조금 머물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허락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4시 경)에 절에 당도한즉 하총수가 미리 좌석을 설비하였다가 곧 나와 뵙고 물러갔다. 이어 삼중 찬합 및 술과 과실을 바쳤다. 의성의 부자 및 중달ㆍ소백 두 중이 대문 안에서 영접하고 또한 각각 찬합을 바치므로 곧 하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금 있다가 나와서 초혼(初昏)에 왜경 본국사에 도착하였다. 하총수 및 의성이 밖에서 문안하였다. 대불사는 층각(層閣)이 매우 높고 좌불(坐佛)의 금상(金像)이 높이는 10장(丈)이 넘고 너비는 4~5장이요, 한 손바닥의 크기가 거의 한 칸에 차고 무릎에서 정수리[頂]에 이르는 높이까지 1장(丈) 간격마다 불상 하나씩 붙였는데 좌우에 무릇 25불로서 그 부처 하나의 크기가 보통 사람만하다. 왼쪽의 긴 행랑에는 3만 3천 3백 33불을 세웠다.

속설에 전하기를 가강(家康)이 풍신수뢰(豐臣秀賴)의 재물을 소비시키기 위하여 크게 보시(布施)하라고 유혹하여 이것을 창건하게 하였다 한다. 불상이 굉장하기로는 이것이 극도였다.(후략)

이후에도 조선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하였을 때 에도막부는 대불사에서 연회를 베풀고 인근의 코 무덤(비총)을 보여주었다. 비총은 일본의 무위(武威)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조선통신사들은 마지못하여 비총을 보았다. 그리고 잔혹성과 야만에 치를 떨었다.

주 8) 1600년 10월 2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동군 10만 명은 세키가하라 벌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家臣)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의 서군 8만 명을 이겨 패권을 잡았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의 중세와 근세를 나누는 분수령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요토미 가를 멸하고 에도에 막부를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의 역사는 약 500여 년 간의 기나긴 중세 시대를 마감하고 에도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의미는 당시까지 변방 지역으로 취급되었던 관동 지역이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하는 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관동 지역은 오랑캐의 땅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개설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중심 지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주 9) 조선 조정은 2차로 1617년(광해군 9), 3차로 1624년(인조 2)에 회답 및 쇄환사를 파견하였고, 4회 1636년(인조 14) 이후는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한 이후 1643년(인조 21), 1655년(효종 6), 1682년(숙종 8), 1711년(숙종 37), 1719년(숙종 45), 1748년(영조 24), 1764년(영조 40), 1811년(순조 11)에 12번째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들의 사행 기록은 <해행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주 10) 1607년 2월 27일에 회답겸쇄환사가 부산을 출발하였다. 정사는 여우길, 부사는 경섬이며 총인원은 504명이었다. 사절단 일행이 오사카에 도착한 것은 4월 8일이었다. 이때 오사카 성에는 아직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살고 있었다. 조선 사절은 당연히 오사카 성에는 가지 않았고 히데요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4월 일자 경섬의 <해사록>에는 히데요리와 코 무덤 관련 기록이 있는데, 조선 사신들이 코무덤을 본 것 같지는 않다.

1607년 4월 9일. 맑음. 대판에 머물렀다.(중략)

대판은 곧 수길의 아들 수뢰가 살고 있는 곳이다. 수뢰의 그때 나이 15세로 기안(氣岸)이 웅대하며 음식을 먹을 적에도 풍악을 폐하지 않았다. 오직 호화와 사치를 스스로 즐기며 처사가 대부분 유약하므로 왜인들이 우활(迂濶)하다고 하였다.

왜경(倭京)의 동교(東郊)에 우리나라 사람의 비총(鼻塚)이 있다. 대개, 왜국이 서로 전쟁할 적에 반드시 사람의 코를 베어 마치 헌괵(獻馘) 하듯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년 난리 때에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거둬 모아 한 곳에 묻고 흙을 쌓아서 무덤을 만든 것이다.

수뢰가 비를 세웠는데, 새기기를 “너희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의 운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참호(塹壕)를 파고 담을 둘러쌓아 밟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그의 어미가 수뢰를 위해 불사(佛事)를 많이 행하여 뒷일을 빌었다 한다.(후략)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