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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유재란의 참상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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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정유재란의 참상

정유재란으로 전라도는 피해가 극심하였다. 전라도는 왜군의 야만적인 살상과 납치, 방화와 약탈로 초토화하였다.

그러면 정유재란의 참상을 인적 피해와 물적 피해로 나누어 알아보기로 하자.

1. 인적 피해

8월 16일에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왜군은 정말 잔인하였다. 산하를 불태우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었다. 코는 전리품의 상징이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남원성 전투에 종군했던 일본 승려 케이넨은 8월 16일자 조선일기에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편찬한 이수광(1563~1628)은 다음 시를 지어 남원성에서 순절한 이들을 위로하였다.

외로운 성에 피비(血雨)가 날리던 옛일을 생각하니 憶昔孤城血雨飛
서생(書生)은 겹겹 포위망을 깨뜨릴 힘이 없었네. 書生無力破重圍
지금 남은 자리엔 가을 풀만 쓸쓸한데 至今遺跡空秋草
흐르는 눈물이 석양의 나그네 옷 적시는구나. 淚入斜陽濕客衣

일본 교토의 코 무덤에는 최소한 5만개 이상의 코가 묻혀있다. 이 중 장성․진원․영광․금구․김제 등 전라도에서 취한 코가 2만개 이상 된다. 일본 문헌에 의하면 9월 21일에 진원현에서 870개의 코가 일본에 도착했고, 영광과 진원(현 장성읍, 진원, 남면, 황룡, 동화, 삼계, 삼서지역으로 추정됨)에서 10,040개가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 9월에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금구와 김제에서 취한 코 3,369개를 도요토미에게 보냈는데 그 증명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코무덤은 교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쿠오카현 카시이, 오카야마현의 비제시(備前市)와 쯔야마시(津山市), 가고시마성 부근에도 코무덤이 있다.

또한,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끌고 가 노예처럼 부리고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먹기도 하였다. 루벤스의 그림 <조선 남자>의 모델 안토니오 코레아도 포로였는데, 어느 학자는 코레아가 남원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군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끌고 갔다. 남원성에서 순절한 이복남 장군의 셋째 아들과 장성 기씨 부인의 두 아들들이 그들이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포로는 최소한 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597년 9월에 잡혀갔다가 1599년 7월에 조선으로 돌아온 정희득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가 남자가 3~4만 명은 되겠고, 늙고 약한 여자는 그 수가 갑절이나 될 것이라고 상소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전쟁 후에 조선으로 돌아온 포로는 6천 명 정도였다. 구우일모(九牛一毛)였다.

한편 조선의 여인들은 더 큰 고통을 당하였다. 왜군은 전쟁 중에 현지 처첩을 합법적으로 허용하였다. 군사들에 대한 일종의 사기앙양 책(策)이었다. 왜군은 마을에 들어 닥치면 가장 먼저 여자를 찾아내 겁탈하고 포로로 데려가 동거생활을 하였다. 나이 불문, 처녀나 부인을 가리지 않고 유린했다.

<연려실기술>에도 부녀자들의 수난이 잘 드러나 있다.

○ 그때 사대부집 부녀들이 많이 약탈을 당하였는데 왜적이 물러간 뒤에 화를 면한 집에서는 변고를 당한 집과 혼인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임금이 근심하여, “이런 풍습이 만약 이대로 간다면 온 나라의 대가(大家) 중에는 거의 완전한 사람이 없겠다.” 하고, 종실과 귀척(貴戚)에게 힘써 권하여 변고를 만난 집과 혼인하도록 하였더니 그 뒤부터는 감히 험점을 구별하는 자가 없었다.《공사견문》

그런데 많은 부녀자들은 왜군의 유린에 맞서서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 그 중 한 사람이 장성의 기씨 부인이다.

1617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열녀가 충신이나 효자 보다 훨씬 많이 포함되어 있다.

삼강행실도의 속편인 이 책에는 총 1천725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시 충신 54명, 효자 94명, 열녀 436명 총 584명이 수록돼 있다. 열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에 대하여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부녀자 중에 절개를 지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가 없었고, 효자가 그 다음이고 충신은 또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드러나게 칭찬할만한 자가 또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아! 선비들이 평소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할 때에는 누군들 내가 대장부라고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위태로움에 처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에는 도리어 부인네들보다도 못하였구나.

2. 물적 피해

물적 피해도 엄청 컸다. 방화와 약탈이 전라도 전역에서 일어났다. 왜군은 마을을 불 지르고 사찰과 정자 등을 불태웠다. 장성의 필암서원과 기영정, 광주향교와 담양 소쇄원, 순천의 송광사․선암사 등이 불탔다.

선암사의 경우는 철불 1기, 보탑 2기, 부도 3기와 문수전, 뒷간, 조계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불타 흔적마저 없어졌다. 각 관아에 비치된 각종 토지대장, 노비대장, 호적대장 등 공문서와 개인 소장 서적도 불탔다.

아울러 임진왜란은 약탈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부터 전투부대와는 별도로 6개 특수부대(도서부․공예부․포로부․금속부․보물부․가축부)를 편성하였다. 왜군은 많은 학승들을 자문역으로 조선에 종군토록 하여 조선의 문물을 조직적으로 약탈하였다. 상국사의 승열, 안국사의 혜경 등이 그들이다.

6개 특수부서 중 도서부는 전적류(典籍類)의 수집을 맡았고, 공예부는 도자기 등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 및 목공, 직공(織工), 도공 등 공장(工匠)의 납치를, 포로부는 한의사와 젊은 남녀의 납치를, 금속부는 조선의 병기 및 금속예술품, 금속활자 등의 탈취를 맡았다. 또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귀품의 노획을 맡았고, 축부(畜部)는 가축을 포획했다.

왜군은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불상, 불화, 서적, 활자들은 물론이고 동식물도 조직적으로 가져갔다.

일본 후쿠야마 안국사에는 종군 승려 안고구지 헤게이가 담양 용구산 반야암에서 가져간 불화가 소장되어 있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 1557년에 발간한 주자문록도 가져갔는데 이 책은 지금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노송당 송희경의 <일본행록>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일본에 끌려간 정경득이 필사하여 가지고 1599년에 돌아왔다.

그런데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일본에게는 오히려 문화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활자나 그림, 서적을 약탈하고 강항 등과 같은 유명한 선비들과 우수한 인쇄공들을 포로로 데려가 성리학과 인쇄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이용했다.

아울러 왜군은 수많은 도공을 납치해 갔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에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하여 조선에서는 일상생활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릇들이 일본에서는 귀중한 보물로 여겨졌다.

일본의 번주들은 앞 다투어 도공들을 납치해 갔다. 번주들은 도공들을 특별히 대우하면서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중 일본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로 끌려간 박평의, 심당길 등의 도공과 사가현 아리따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 등은 오늘날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특히, 아리따 도자기의 원조 이삼평은 도자기 신이 되어 아리따에는 <도조신사>가 세워져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잡아 간 포로와 약탈한 문화재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3. 정유재란의 후유증

정유재란의 후유증은 너무 심각하였다. 인구가 크게 줄고 농토가 황폐하여졌다. 조선의 인구는 1591년의 1,300만 명이 1598년에는 1,085만 명으로 215만 명이 감소하였고, 토지 결수도 임진왜란 이전에 1,515,591결 이었던 것이 1604년에는 342,634결로 80%가 줄었다. 한마디로 향촌사회가 무너지고 촌락은 황폐화 되었다.

심지어 진원현의 경우 독자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1600년에 진원현은 자립이 불가능하게 되자 간판을 내리고 장성현과 합병하였다. 전국에서 유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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