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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라도 의병들 다시 나서다.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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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의병들 다시 나서다. 이미지 1

제11회 전라도 의병들 다시 나서다

1597년 9월 초부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순천에 주둔하였고,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장성, 나주를 초토화하고 해남으로 내려갔으며 다른 부대들도 전라도 지역에 주둔하였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전라도에 50개 부대가 바둑판처럼 깔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치에 달하였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고 재물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사람들은 산속이나 섬으로 숨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9월 하순에 구례 석주관 의병 항전이 일어났다. 구례현 남전리 출신 선비 왕득인이 50여 명의 향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왕득인은 죽기를 각오하고 매복에 의한 기습전이나 산곡간의 바윗돌을 굴려 내리는 석탄공법(石彈攻法)으로 적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조총을 가진 왜적의 대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의병들은 석주관에서 모두 순절하였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주 1)

11월 초에 구례에서 2차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구례읍내 20대의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이었다. 이들 의병은 9월 하순에 순절한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 주축이 된 왕의성군(王義成軍)과 구례현의 각 면에서 모여든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 이른바 5의사군(五義士軍)이 합세한 의병 연합체였다. 이들은 각자의 집안 하인들과 산중에 피난 중인 백성들을 모아 수백 명의 의병 조직을 갖추어 석주관에 진영을 마련하였다.

11월 8일에 구례 의병은 구례 화정에 이르러 남원 의병장 조경남과 왜적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11월 9일에는 연곡에서 남원의병과 함께 연합하여 왜군 60여 명을 참살하고 포로 200여 명을 구출하였다.

이후 구례 의병은 화엄사로부터 의승병(義僧兵) 153명과 의곡 103석을 지원 받아 군세를 보강하였다.

그런데 연곡 전투에서 패한 왜군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대규모 보복에 들어갔다. 11월 하순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구례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분산작전을 꾀하였다. 석주성 아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좌우측 산등성이에는 오의사군이, 산 정상에는 왕의성군이 포진하였다.

구례 의병은 피내(血川)로 불리는 계곡으로 왜군을 유인한 다음 숲속에 잠복한 오의사군이 의승군과 합세하여 좌우에서 일제히 적을 공격하였다. 또한 계곡의 북향 정상부에 진치고 있던 왕의성군은 골짜기에 숨어든 왜적을 향해 큰 돌을 굴러내려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구례 의병은 일시 대승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계속 밀려오는 왜군의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오의사군과 의승군은 모두 전사하고 산정에 있던 왕의성 부대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의병과 의승들의 피가 골짜기를 물들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곳을 피아골이라고 하였다.(주 2)

한편 남원의 조경남, 보성의 박광전, 순천의 소희익 등도 의병으로 나섰다.

조경남(1570~1641)은 <난중잡록>을 쓴 선비이다. 그는 13세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임진왜란 7년 전쟁 중에 쓴 일기는 나중에 선조수정실록 편찬 때 사료로 활용되었다.

1597년 8월 9일에 왜군이 남원을 쳐들어오자 관아 서기(書記)였던 조경남은 가족들과 함께 지리산 파근사(波根寺)로 피난을 갔다. 9월 중순경에 조경남은 다시 남원 가까운 산으로 돌아와 의병 활동을 하였다. 9월 22일에 조경남은 왜적 5명을 사살하였다. 이 날의 ‘난중잡록’을 읽어보자.

내가 왜적 5명을 불우치(佛隅峙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에서 죽였으나 그 머리를 베지 않았다. 나는 박언량과 하인 두 명과 함께 활을 끼고 따라나섰다. 불우치에 이르러 높은 데로 올라가 망을 보니, 왜적 5명이 총을 메고 검을 휘두르며 이리로 왔다. 나는 박언량한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이지만 힘써 싸우자”라고 말하고 길가에 매복했다. 적병이 앞으로 오자 박언량과 함께 일시에 발사하니 잇달아 5명의 적이 맞았는데, 두 놈은 곧 거꾸러지고 세 놈은 칼을 던지고 살려주라고 애원했다. 나는 하인에게 명령하여 죽이도록 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병 수백 명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은 적의 시체를 보고 떠들썩하더니 달아나 버렸다.

일기가 마치 전쟁르포 같다. 소설가 김경진은 소설 <임진왜란 8권>에서 조경남의 의병 활동을 날자 별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9월 23일에 조경남은 궁장현(弓藏峴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싸움에서 왜적 36명을 목 베었다.

조경남은 김완과 정사진, 박언량, 박필남 등 20명과 함께 싸웠다. 이들은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임실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동도역 앞 소로를 향하고 있는 왜적 50여 명을 급습하였다.

이어서 조경남은 10월 9일 산동촌 싸움에서 왜적 5명을 베었다. 이 날 조경남 의병은 전 前 초계 군수 정이길을 대장으로 삼고, 조경남을 출전장(出戰將), 정사달을 종사, 유지춘을 참모로 삼았다.

이어서 조경남 의병은 11월 4일에는 순천에서 왜군의 상황을 정찰함과 동시에 왜군 앞잡이 3명을 죽였다. 이 당시 조경남 의병은 조․명연합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11월 24일에는 경상도 함양 음리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17명을 사살하였고, 12월 7일에도 경상도 산음에서 왜적 1백 23명을 죽였다. 이어서 1598년 6월에 조경남은 박언량 등 70명과 함께 전라병사 이광악 부대 소속이 되었다.

한편 71세의 죽천 박광전(1526-1597)은 난리를 피하여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으로 피신하였다. 제자 안방준도 함께였다. 10월에 부인 문씨가 화순 모후산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비통하였다. 병세 또한 날로 깊어 갔다.

그때 생원 박사길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박광전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박광전은 “난리는 급박해지고 나의 병세도 날로 위중하니 나는 곧 죽을 것이요. 그러나 한 줄기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 맹세코 이 왜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는 없소.” 하면서 결속을 다졌다. 박광전은 전 판관 송홍렬을 부장으로 삼고, 둘째 아들 박근제를 종사관으로, 박사길 ․ 박훈 등을 선봉으로 삼았다.

박광전 의병은 동복현(화순군 동복면)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는 고흥 출신 송홍렬이었다. 보성 사람 박훈도 왜적 10여 명을 참수하였고, 능주 출신 박사길 또한 공을 세웠다. 왜적들은 박광전 의병의 기세에 눌려 일시 순천 쪽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고을 수령들은 관내 이탈 죄도 큰 데 다시 돌아와서 박광전의 공로를 시기하여 전라감사 황신에게 모함하였다. 황신은 박광전을 전주감영으로 불러 조사하였다. 박광전은 참담하였다.

전주에서 조사를 받은 박광전은 화순으로 내려오는 길에 조상의 묘소가 있는 진원현(장성군 진원면)에 들렀다. 비참한 심정을 조상님에게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마지막 길을 예감하여서였을까. 11월 18일에 박광전은 세상을 떴다.

임진왜란 7년간의 박광전의 일생은 그야말로 질곡의 역사였다. 1592년 7월에 전라좌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이 깊어서 참전을 하지 못하다가, 1593년 말에는 제자인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장이 되었지만 모함을 받고 한 많은 세상과 이별한 것이다.

11월 28일에 전라감사 황신은 순천에 사는 훈련원 첨정 박이량의 전과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박이량은 처자가 왜적에게 피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군인을 모아 순천의 많은 적과 접전하여 공을 세웠다.

12월 17일에는 의병장 소희익이 순천의 왜적 둔거지에서 남녀 2백86명을 구출하였고, 낙안에서도 남녀 1백 27명을 구출하였다. 도원수 권율의 별장 김운성은 낙안 왜영을 쳐들어가 남녀 1백 54명을 구출하였고, 전주 출신 김익웅은 순천 왜영에서 남녀 95명을 구출하였다.

전라도 의병은 육지에서의 의병뿐만 아니었다. 해상 의병의 활약도 돋보이다. 이순신이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도 해상 의병들의 지원이 큰 몫을 하였다.

해남군 문내면에 있는 우수영관광지에는 울돌목의 의병 항쟁의 흔적이 있다. 여기에 있는 여러 개의 조각상들이 그것이다.

먼저 ‘울돌목의 의병항쟁 1’ 조각상부터 본다. 바로 마하수 부자의 참전 조각상이다.

명량대첩은 해남·진도 등 해안 지방 사람들이 수군과 같이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 항쟁의 승리였다. 부자형제와 이웃들이 함께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으니 마하수 5부자의 혈전이 그 한 예이다.

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 시신을 안고 일성통곡으로 복수를 맹세한 마씨 형제들. 그들은 적이 패퇴할 때 까지 결사의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마하수 5부자는 마하수와 네 아들 성룡, 위룡, 이룡, 화룡을 말한다. 마하수의 기록은 호남절의록의 ‘이순신과 함께 순절한 제공 사실’에 나온다. 호남절의록을 읽어보자.

마하수는 장흥 출신으로 1564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공감 주부를 제수 받았다. 임진왜란 때 부친이 적에게 해를 당하니 그는 복수를 맹세하였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장흥 회령포에서 만나니 이순신이 고을의 여러 배들을 모아 후원을 해주도록 명령하므로 그는 “마땅히 이공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습니다. 남자는 비록 흰머리가 되어도 마음은 건강해지는 법입니다.”하였다.

그는 백진남, 정명열, 문영개 등 십여 명과 함께 먼 바다에 배를 늘어놓고 마치 군선처럼 보이게 하여 명량 싸움을 응원하였다.

그는 고을의 배들을 모아 바깥 바다에 배치하고 바라보니 이순신이 적들에게 포위되었으므로 칼을 뽑아들고 “대장부는 한번 죽을 뿐이지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고자 할 것이냐”하고 두 아들 성룡, 위룡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한편 호남절의록에는 마하수의 아들 마성룡과 마위룡도 기록되어 있다. 마성룡은 해전 후 얼마 있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그랬다. 명량해전에는 피난선 100여척 이 조선 수군 본진 뒤에 배치되어 전함으로 위장하였다. 이들은 실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후방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1597년 9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명량해전 시 피난선이 조선 함대 후방에 배치되어 전선처럼 위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사(正史)도 전라도 사민(士民)들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31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9월 1일(기축) 3번째 기사

통제사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왜장을 죽이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왜장 마다시(麻多時)를 죽였다. 순신이 진도에 도착해 병선을 수습하여 10여 척을 얻었다. 이때 배를 타고 피난해 있던 연해(沿海)의 사민(士民)들이 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였다. 순신은 길을 나누어 그들을 불러모아 군대 후면에 있으면서 군사의 형세를 돕도록 했다. 적장 마다시는 수전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인데,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범하려고 하여, 벽파정 아래에서 접전하게 되었다. 순신은 12척의 배에다 대포를 싣고는 조수를 타고 순류(順流)하여 공격하니, 적이 패주(敗走)하였으므로, 수군의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이 해상 의병들이 백진남·마하수·오익창·김성원·문영개·변홍원·백선명·김택남·임영개·정운희·정명열·김안방 등이다.

백진남은 해남군 옥천면 출신으로 삼당시인인 옥봉 백광훈의 아들이다. 그는 1594년 초에 고봉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이 선조가 계시는 의주에 보낸 양곡을 지원하였고, 명량대첩에도 이순신을 도와 식량과 의복을 내놓았다. 백진남은 명량해전 이후에도 이순신을 여러 번 만났다. 10. 9, 10. 23, 10. 26, 12. 2일자 난중일기에 그 사실이 적혀 있다.

무장 출신 오익창의 역할도 컸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자 본진과 피난선 사이를 오가면서 여러 배에서 솜이불 백여 개를 거두어 이를 물에 적신 후 배에 걸어두니, 적의 탄환이 이를 뚫지를 못하였다. 또 오이(東瓜)를 모아 배 한 척에 가득 실어두고 병졸들 중 목마른 이에게 나누어 주어 갈증을 풀게 하였다. 이순신은 탄복하여 오익창에게 말하기를 “내 군사들이 거둔 이번 승리는 오상사의 힘이 크도다.”하였다.

오익창은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문집 ‘사호집’이 국역되어 관심을 끌었다. 그의 신위는 고창 죽산사(竹山祠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성산리 죽산 마을 소재)에 모시어져 있다.

이어서 ‘울돌목의 의병항쟁(2)’ 조각상 해설을 읽는다.

임진·정유년에 왜적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니 이 지역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도 이 지역 백성들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여 명량해전에서 낮과 괭이 등 연장으로 적을 무찌르다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전사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의병이 마하수뿐만 아니었다. 그런데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이 누구인가. 언젠가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에서 본 명량해전 전사자 명단이 생각났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중략) 이천구, 김수생, 김성진, 하수평, 박헌, 박후령과 그의 아들 인복, 또 양응지와 그의 조카 계원, 그리고 조탁, 조응량과 그의 아들 명신 등 많은 의사들이 목숨까지 바쳐 천추의 호국신이 되었다. (후략)”

그렇다, 조응량 부자는 조응량과 그의 아들 조명신을 말하고, 양응지 숙질은 바로 양응지와 그의 조카 양계원을 일컫는다.

한편 공원 한 쪽에는 해남 출신 의병 오극신 · 오계적 부자가 싸우다가 전사한 조각상도 있다.

전라도 의병들은 비단 조각상에 새겨진 의병들뿐만 아니었다. ‘호남절의록’에 보면 진도군수 송덕일의 삼촌 송지와 군관 송희립의 친척 송계현·송계량·송계창도 의병을 일으켰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동생 김응추도 명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육상 의병들의 활동도 괄목할 만하다. 영암의 전몽성, 유장춘과 나주의 박문립 등은 수군과 협력하여 명량 해협 인근의 해안 지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이 당시에 나베시마 나오시게 휘하 별동대 2만5천 명이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가기 위하여 해남 어란진 근처에 대기 중이었다.

이처럼 호남의 민초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왜적과 싸웠다. 이름도 명예도 남기지 않고 보훈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터전을 지켰다.

이어서 수군 의승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1597년 8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승려 혜희(惠熙)가 와서 인사를 하였다. 그에게 승병의 직첩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의승 수군은 명량대첩에도 일정 역할을 하였다.

수군 의승들의 활동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도 잇따랐다. 자운(慈雲)이란 스님은 이순신이 돌아가신 후에 쌀 6백 섬으로 노량에서 큰 수륙제를 올렸다. 또한 옥형 스님은 1599년에 여수시 덕충동에 석천사를 짓고 이순신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석천사는 충민사 보다 2년 앞서 세워진 호국사찰이었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구례 석주관 칠의사
2. 여수 이충무공 대첩비와 타루비

주 1) 왕득인이 싸운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로 보인다. 이들은 순천에 왜교성을 쌓고 구례․광양․승주․보성 일대를 분탕질하고 있었다.

주 2) 구례 석주관 의병 항쟁이 알려진 것은 정조 22년(1798)이었다. 이 때 화엄사 승당(僧堂)을 중수하면서 두 건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승병격문’과 ‘정유란 일기’가 그것이다.

이후 순조 4년(1804)에 7의사들에게 공훈이 내려졌으며, 고종 5년(1868)에 칠의단(七義壇)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1901년에 칠의각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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