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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유재란 때 싸운 장성 사람들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10회 정유재란 때 싸운 장성 사람들
- 김신남 등 3차 남문의병들과 변이중

1597년 8월 16일에 남원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 장성 남문의병은 다시 3차 의병을 일으켰다. 맹주 김경수는 사촌동생 김신남에게 “지난 임진왜란 때 두 아이(1593년 6월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한 김극후와 김극순을 말한다)가 전사한 뒤부터 날마다 원수를 갚을 일만 생각해 왔다.”라고 호소하면서 의병을 다시 모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경수의 말에 김신남이 대답하기를 “우리 형님의 뜻을 아우가 어찌 모르겠습니까.”하고, 같이 남문 밖으로 나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두 번 의거하였으나 실패만 있고 성공이 없었으니 동지들의 마음에 누가 죽음을 원하지 않으리오.”하였다.

8월 17일에 김신남은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전주로 향하여 그곳에서 의병과 군량을 모았다. 8월 18일에는 고창의 김홍우가 의병 100명, 김중기·박안동·김세 등이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전주에 집결한 600명의 장성의병은 8월 19일에 군오를 점검한 후 8월 20일 여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9월 8일경 안성에서 직산전투에서 패한 왜군들을 대파하였다. 김신남 · 김성진 등이 이끄는 장성의병 600여 명은 후퇴하는 왜적을 안성에서 싸워 32명을 목 베었다. 포로가 된 조선 남녀 17명도 구출하였다. 장성의병들도 상당한 희생이 따랐다. 김성진, 허상징, 송정춘, 오인갑 등 전사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김신남이 이끄는 장성 의병은 9월 10일에 파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문창의에 참여한 의사들 중에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이가 적지 않았다. 먼저 정읍출신 유희진․유희사․유희문 형제이다. 이들은 1597년 11월에 정읍 북쪽 남나령(南羅嶺)에 모여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아직 출발하지 못하였는데 적들이 기습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3형제 모두 순절하였다.

또한 유경인(柳景仁 1558~1597)은 재종 유희문, 유희사 등과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고 고을 청년 수백인과 가동 오십여 명을 모집하여 요새지를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편을 담당하고 병력을 우치 아래로 이동하였다. 그때 적들이 몰려오자 유경인은 적 수십 급을 베였다. 그 후 물러난 왜적이 다시 합세하여 공격하여 와서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죽으니, 이 날이 1597년 10월 3일이었다.

3차 의병장 김신남(1552~1598)은 1598년 8월에 순절하였다. 김신남은 1598년 8월에 명나라 유정이 전라방어사가 되어 서로(西路)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돕고자 아들 사원 ․ 사근과 같이 향병을 모집하여 남원에 이르러 운봉에서 왜적과 마주쳤다. 그는 수일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죽으니 그 날이 8월 26일이었다.(주 1)

한편 화차를 발명한 망암 변이중은 정유재란 때는 분호조로 강화도에서 중국 군대의 군량 보급의 일을 주관하였다. 변이중은 상소하여 조목조목 왜적의 허실과 군정의 득실을 진술하였다. 상소문에는 평양에서 승전한 이후에 정예를 가지고 적의 귀로를 끊고 요해처를 매복시키며 대군으로 적의 뒤를 공격하면 고니시와 가토의 목을 깃대 위에 걸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명나라 장수가 화의를 주장하여 기회를 놓쳤다고 하면서, 이제 호남과 호서를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산성을 지키고 수군이 서해를 수호하는 계책을 적었다. 또 수군에 의한 대마도 공격과 육군에 의한 남해 왜적을 적극적인 공격전을 주문하였다.(주 2)

1598년 초에 망암 변이중은 이천 ․ 상주목사에 임명되었다가 여름에 독운사(督運使)로 옮겼다. 당시 군량을 조달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명나라 장수 왕몽교가 독운은 변이중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하여 독운사가 된 것이다.

이 때 변이중은 강화도를 굳게 지켜 요새화하는 상소를 하였다. 왜적이 호남 일대를 점거하였으니 왜적은 반드시 수로를 통하여 서해로 올라올 것이라고 하면서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여 강화도를 지켜야 함을 호소하였다. 또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을 조달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 상소는 당시에 채택되지 못하였다. 당시에 깨어 있는 선비들은 이를 애석해 하고 한탄하였다 한다.(주 3)

한편 장성 남문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명과 윤황, 그리고 정절은 정유재란 때 피신하다가 왜적을 만나 순절하였다.(주 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주 1) 명나라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서로군은 순천 왜교성를 공격하였다. 진린과 이순신의 연합수군도 참여하였다.

9월 20일에 제독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카를 사로잡을 작전을 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9월 20일부터 10월 6일까지 조․명연합군의 공격은 제족 유정의 무능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났다. 이에 진린과 이순신은 이후 독자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김신남의 순절에 관하여는 추가로 고증이 필요하다. 1598년 8월 중순의 운봉 전투에 대하여는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였다.

주 2) 적을 토멸할 계획과 대책을 말하는 상소문(봉암서원, 봉암서원지, P 92- 103) 변이중이 상소문을 상소한 일시가 구체적이지 않다. 수군의 대마도 공격 주장을 한 것을 미루어보면 조선 수군이 전몰한 칠천량 해전(1597년 7월 16일) 이전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선조가 이 상소를 그대로 채택하였더라면 전라도가 유린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조․명연합군이 교룡산성에서 왜군을 막았더라면 남원이 그리 쉽게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 3) 강화를 고수 하자는 상소문(봉암서원, 봉암서원지, P 107- 114 참조) 망암선생 신도비명(봉암서원, 봉암서원지, P 192- 201 참조)

주 4) 김명(金溟 1571~1597)은 나주 출신으로 김부의 아우로서 1592년에 김부를 따라 창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김부가 출전하자 김명은 처 이씨 그리고 형수 임씨와 같이 무안 몽탄을 지나다 적을 만나 죽었다. 부인 이씨도 김명이 죽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윤황(尹趪 1562~1597)은 무안 출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1차 의병에 나가서 직산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그런데 그는 1597년에 영광 칠산에서 순절하였다.

정절(1536~1597)은 함평 출신으로 1592년에 의병장 김제민과 직산에서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9월에 60세의 정절은 90세 노모가 생존하고 계시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업고 처자를 거느리고 피난길에 나서 9월 16일 영광 법성포에서 배를 타고 칠산 앞 바다에 이르렀다.

이 배는 함평 출신 정희득(1573-1640), 정경득 일가의 배였다. 정경득·정희득 일가는 8월 12일에 왜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평 집을 떠났다. 이들은 8월 19일에 영광 둔전포에서 거룻배 하나를 구하여 수리하고 서해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9월 15일에 정희득 일가는 구수포에서 배에 올랐다. 16일에는 육지의 왜군이 법성창에서 이리저리 분탕질을 하다가 배를 보고 총을 쏘았지만 총알이 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족형(族兄) 정절 등 여러 친척들과 합류하였다.

17일 새벽에 배를 띄워 서쪽으로 갔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법성포 앞바다에 돌려댔다. 18일에는 재원도로 옮겼으나 큰 바람이 불어 며칠간 움직이지 못하였다.

9월 27일에 배가 영광 칠산 앞 바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왜선을 만났다.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정절의 부인과 며느리 등은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정절은 호인(好仁), 호례(好禮) 두 아들과 함께 왜적에게 사로잡혀 강박을 당하였다. 정절은 왜적을 꾸짖으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짐승만도 못한 놈들 앞에 무릎을 꿇으랴” 하니 왜적이 칼을 뽑아 왼편 팔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천만번 살을 찢는다 해도 굴복할 수 없다.”하였다. 왜적은 다시 오른편 팔을 치고 정절을 죽였다.

정희득의 가족들도 수난을 당하였다. 정희득의 어머니 이씨는 형수와 아내, 누이동생에게 “추잡한 왜적이 이렇게 닥쳤으니 장차 어떤 변을 당할 것인가. 슬프다, 우리 네 부녀의 처지는 죽음 밖에 없구나”하니, 정희득의 아내가 말하기를 “난을 당했을 때부터 함께 죽기를 약속했지요. 저의 결심은 이미 정해 있습니다.”하고 늙은 어버이께 하직을 고했다. 또 정희득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몸을 아껴 형제분과 함께 아버님을 모시고 꼭 생환토록 하시오”하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어머니·형수·누이동생도 앞다퉈 바다로 뛰어 들었다.

정희득 형제는 왜군이 배 안에 묶어 두어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망극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나중에 정희득·정절의 여인들은 열부(烈婦)로 정려되었다. 함평군 월야면에는 팔열부(八烈婦) 정각이 세워졌다. 한편 정의득은 포로로 잡혀갔다가 1599년에 다시 돌아와서 <월봉해상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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