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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유재란 - 칠천량 해전에서 노량 해전까지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9회 정유재란 - 칠천량 해전에서 노량 해전까지

다시 정유재란을 정리하여 보자. 정유재란은 1597년 1월에 시작하여 1598년 11월 26일에 종료되었다. 그런데 실질적인 전투는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시작되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으로 마무리되었다.

1597년 1월 중순에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른바 정유재란이었다. 제1진으로 가토와 고니시가 이끄는 한 왜군 1만4천5백 명이 부산에 상륙하였다. 1월 13일에 가토가 가장 먼저 전선 130척을 끌고 다대포에 도착하였고, 1월 14일에는 고니시 군대가 두모포 등 여러 포구에 진입하였다.

정유재란은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 교섭 결렬로 인하여 일어난 일본의 재침략 전쟁이다. 1593년 3월부터 시작된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교섭은 1596년 9월에 완전히 깨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가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국서를 보고 분노하여 다시 조선을 침략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조선을 재침략한다. (주1)

도요토미는 재침략을 준비하면서 1592년부터 1596년까지 5년간의 전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도요토미는 조선 침략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첫째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것과 둘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양곡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치밀하게 작전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는 가장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부터 공격을 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과 양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7년 2월에 도요토미는 일사분란하게 조선 재침략 작전을 진행한다. 군대를 1번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12만1천 명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부산 일대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명도 합류시켰다. (주2)

먼저 일본은 이순신 제거 작전을 벌이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백의종군 시킨다. 그리하여 7월 16일에 경상남도 거제도 근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다.

곧바로 왜군은 전라도를 침공하여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이고 심당길 등 도공과 백성들을 포로로 데리고 갔다. 이 전투에서 접반사 정기원, 전라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구례현감 이원춘 등이 전사하고,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8월 20일에 왜군은 전주에 무혈 입성하였다. 명나라 유격 진우충이 전주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다.

8월 24일에 왜군은 전주에서 지휘관 회의를 한다. 이들은 도요토미의 지시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고니시가 이끄는 좌군은 전라도 일원과 충청도 서부를 휩쓸고, 가토가 지휘하는 우군은 충청도 내륙을 거쳐 경기도를 친 다음 서울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서 새로운 작전도 통과되었다. 일본 수군이 육군을 싣고 서해를 통해 서울로 올라가는 작전이었다. 이에 육군 일부가 해남으로 내려갔다.

한편 왜군은 9월 7일 직산전투에서 패하자 다시 남하한다. 9월 16일에 왜군은 정읍에서 지휘관 회의를 한다. 이 회의에는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모리 등 14명의 장수가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왜군은 시마즈와 고니시 등 좌군이 전라도에 주둔하여 성을 쌓을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1597년 9월 16일에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이겼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에서 물리쳤다. 왜선 31척을 격파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서해 진출 계획은 좌절되었다. (주3)

10월 29일에 이순신은 목포 고하도로 진영을 옮겼다. 그는 곧바로 월동 준비를 하였다. 11월 11일에 막사를 준공하였고 군량 조달을 위해 해로통행첩을 발행하였다. 배 운행에 통행첩을 소지하도록 했는데, 배의 크기에 따라 대형은 쌀 3석, 중형 2석, 소형 1석의 통행료를 받았다. 이리하여 1만여 섬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40척의 배를 건조하였다.

12월 10일에 전라감사 황신은 전라도의 적정(敵情)과 영남으로의 군사 이동의 부당성을 조정에 진언하였다.

“도내의 연해안이 온통 적의 소굴이 되어 있는데, 명나라 군대가 와서 토벌하지는 않고 본도의 장수들마저 영남으로 옮겨간다면 적은 반드시 우리의 허실을 엿보아 뒤를 추적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황신의 이 보고는 고니시의 왜군이 장흥과 보성, 순천과 흥양, 낙안에서 날마다 곡식을 수확하여 순천왜성에서 오래 머물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조정은 울산성 공격을 위하여 전라도 병력도 영남으로 출전 명령한 것에 대한 우려였다.

12월 18일에는 전라병사 이광악이 광양성을 공격하였다. 이광악은 진주대첩을 이끈 장수였다. 그런데 광양성은 견고하였다. 조선군은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윽고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가 보낸 왜군이 도착하여 조선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조선군은 도리어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양군의 전투는 엎치락뒤치락하였다.

며칠 후 왜군은 광양성을 포기하고 왜교성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왜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태세에 들어갔다. 울산에는 가토가, 사천에는 시마즈, 순천에는 고니시, 부산에는 우키타와 모리 히데모도가 주둔한다.

1597년 11월에 조명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왜군을 몰아내는 작전에 돌입하였다. 그 첫 대상이 가토 기요사마가 지키고 있던 울산성이었다. 12월 22일부터 5만 명의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을 포위하고 총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왜군의 완강한 저항과 명군 내부의 불협화음 때문에 울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1598년 1월 4일에 철수하고 말았다.

1598년 2월 17일에 이순신은 목포 고하도에서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고금도는 여건이 한산도보다 더 좋았다. 주민도 1천 5백여 호나 되어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전선 건조와 군대 보강에 박차를 가하여 함대는 80여 척, 군사도 8천 명에 이르렀다. 이 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흥양현감 최희량이었다. 최희량은 백성들을 이끌고 전선을 건조하였고 구리와 쇠를 실어다가 대포 등도 만들었다.

7월 16일에 명나라 수군 500여 척이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도독 진린은 성격이 난폭하고 거만하기로 소문이 난 자였다.

7월 18일에 이순신은 적선 100여 척이 녹도에 침범했다는 보고를 받고 진린과 함께 출전하였다. 연합함대가 고흥군 금당도에 이르렀을 때 왜선들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튿날 이순신은 녹도만호 송여종에게 배 8척으로 절이도(고흥군 거금도)에서 복병하도록 하고 진린도 30척을 남겨두었다.

7월 24일에 이순신은 진린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흥이 한창 돋워질 무렵 명나라 군관 한 사람이 진린에게 보고하기를 “오늘 새벽에 절이도에 침입한 적선 11척을 송여종이 공격해서 그 중 6척을 나포하고 왜군 머리 69급을 취했습니다. 명나라 수군은 싸우지 못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진린은 술잔을 집어 던지며 그 군관을 끌어내라고 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진린을 진정시키고 수급 69급 중에 40급을 진린에게 주었다.

이러자 송여종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순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왜적들의 머리는 썩은 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가지고 저 사람들과 다투자는 말인가. 너의 공적은 내 보고서에 들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하였다. 그랬다. 이순신은 두 가지 형태로 조정에 장계를 보내면서 송여종의 공로를 낱낱이 적었다.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교토의 외곽에 있는 후시미 성에서 죽었다. 나이 62세였다. 그는 죽으면서 이런 시를 남기었다.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런가.
나니와(옛 오사카의 지명)의 영화는 꿈에 또 꿈인 것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대로에게 5살 난 아들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죽거든 지체 없이 조선에서 철병하라.”고 유언하였다.

히데요시 사망을 계기로 5대로는 조선의 주둔군을 철수시키기로 하였다. 10월 1일에 일본 특사가 부산으로 건너왔다. 특사는 가토․고니시․시마즈 등을 만나 철군을 지시했다. 일반 사병에게는 비밀로 붙여졌다. 그러나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조․명 연합군에게도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다.(주4) 연합군은 대대적인 반격 작전에 들어갔다. 명군은 병력을 네 방향으로 나누어 울산․사천․순천 등지의 왜군을 공략하였다. 이때 동원된 군사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당시 조선에 남아있는 왜군은 6만4천여 명이었다.(주5)

조․명 연합군 중에서 가장 먼저 제독 마귀가 지휘한 동로군이 9월 중순에 울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가토의 응전 회피로 점령에 실패하였다. 더구나 왜군 구원병이 부산에서 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명군은 경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제독 동일원이 이끄는 중로군은 사천성을 공격하였다.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했다. 9월 28일에는 사천성을 포위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명군의 규모가 큰 것을 알고 병력들을 사천 신성으로 후퇴시키고 유인작전을 썼다.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시마즈는 대대적인 반격을 하여 중로군은 10월 1일에 대패하고 말았다. 시마즈는 38,717개의 머리에서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한편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서로군도 순천 왜교성를 공격하였다. 서로군의 공격에는 진린과 이순신의 연합수군도 참여하였다.

9월 20일에 제독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카를 사로잡을 작전을 폈다. 강화를 하겠다는 속임수를 썼다. 그런데 고니시가 회담장으로 가고 있을 때 명군이 미리 대포를 쏘고 말았다. 고니시는 곧바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겸연쩍은 유정은 바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9월 21일에는 조․명 수군도 예교성을 공격했는데 물이 얕아 가까이 가서 싸울 수 없었다. 9월 22일에도 조․명 수군은 공격을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유격 계금이 어깨에 탄환을 맞았고 명군 11명이 죽었다.

9월 23일에 제독 유정은 전투를 중지하였다. 공성전을 펼칠 사다리를 준비한다는 핑계였다. 서로군의 공격은 10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수로군은 적극 공세를 펼쳤으나 육군은 소극적이었다.

10월 2일 오전 일찍 조․명 수군은 군사들을 진격시켰다. 이순신의 수군이 먼저 올라갔다. 정오까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그러나 유정의 육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10월 3일에는 명나라 함대 300척이 초저녁부터 자정이 될 때 까지 싸웠는데 조수 시간을 놓쳐 사선 19척과 호선 20여 척이 갯벌 위에 갇혔다가 왜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10월 4일에도 진린은 연합함대를 이끌고 공격을 계속했으나 육군이 호응하지 않아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진린은 유정을 찾아가 엄중 항의하였다.

10월 6일에 권율은 이순신에게 군관을 보내어 유정이 달아나려 한다는 편지를 전하였다. 이순신은 일기에 “분하고, 분하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적었다.

명나라 도독 유정은 10월 7일에 전력을 정비한 후에 다시 공격한다고 하고 부유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유정은 9일에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한편 일본 특사는 왜군 장수들에게 11월 15일까지 부산으로 철수하여 귀국하라는 명령서를 전달했다. 고니시도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고니시는 유정과 은밀하게 화의를 진행하였다. 순천왜성을 고스란히 내주기로 하고 철수를 보장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수군이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공세를 펼쳤다. 뇌물을 받은 진린은 고니시의 통신선 1척을 남해 쪽으로 보내주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노량해전의 시발이었다. 순천 왜성이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뒤늦게 통신선 1척이 순천을 떠났다는 소식을 안 이순신은 급히 군관 송희립과 해남현감 유형 등 여러 장수를 불러 의논하였다. 논의 결과 일본 구원군을 공격하도록 남해 쪽으로 출격하기로 결정되었다.

11월 15일에 이순신은 도독을 만나서 진린에게 고니시의 배를 보낸 것을 항의하였다. 그런데 이 날도 왜선 두 척이 강화하자고 진린의 진중을 드나들었다. 더구나 고니시는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바쳤다. 이순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뇌물을 받는 진린은 이순신에게 철군하는 왜군을 그냥 돌려보내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수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고 결연히 거절하자 진린은 별수 없이 그 뜻을 따랐다.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 배가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5천 명이었다.

한편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 군대는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노량바다로 집결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의 사위였다.

11월 18일 오후 6시, 이순신은 무수한 적들이 노량에 닿았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을 점검했다. 결전에 앞서 이순신은 갑판에 올라가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적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순신은 숨 죽여 왜선을 기다렸다. 조선군은 남해 관음포에 명군은 곤양 죽도 부근에 닻을 내리고 대기했다.

19일 새벽 2시경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함대가 선봉에 섰다. 전투는 과거 다른 해전과는 달리 근접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거의 천여 척에 달하는 함대가 서로 엉켜 싸웠다. 더구나 캄캄한 밤이었다.

대 혼전이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일본 수군은 조선함대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왜군은 관음포를 큰 바다로 가는 수로로 생각하고 진입하였다. 날이 밝자 육지에 막힌 포구라는 사실을 안 일본 수군 일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했고, 나머지 일부는 조명 수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생결단을 하였다.

이 와중에 왜군 한 명이 이순신에게 조총을 쏘았다. 이순신은 탄환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곁에 있던 송희립이 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유해를 옷으로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11월 19일 정오 무렵에 전투가 끝났다. 일본 수군은 200척이 침몰 당하였다. 시마즈와 소 요시토시는 가까스로 도망쳤고, 고니시도 남해도 외해를 통해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진린이 이순신의 배에 다가와 감사를 표하려다가 비로소 그의 죽음을 알았다. 진린이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이 해전에는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가리포 첨사 이영남도 전사하였다. 이영남은 조방장도 겸하였는데 완도 고금도 충무사에 이순신과 함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우연치 않게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이 파직을 당했다. 그는 곧바로 안동으로 낙향하여 1604년에 <징비록>을 썼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지 312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한 번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 입구에 적힌 글)

주1) 정유재란 시 일본의 부대는 1군이 가토 기요사마 1만명, 2군이 고니시 유키나카 14,700명, 3군 구로다 나가마사 1만명, 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5군 시마즈 요시히로 1만명, 6군 조소가베 모도지가 13,300명, 7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11,000명, 8군 모리 데루토모, 우키다 히데이에 4 만명 등 도합 12만 1천명이었다.

주2) 당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7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은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후궁으로 보낼 것 (2) 일본 무역선의 왕래를 보장할 것 (3) 명나라는 일본과 우호관계를 서약할 것 (4) 조선 팔도를 분할하여 경상도, 전라도 등 네 개 도는 일본 영토로 줄 것 (5)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도요토미의 요구 조건은 명나라나 조선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함에도 일본의 고니시와 명나라의 심유경은 명나라와 일본 양측에 서로 숨기고 강화협상을 진행하였다.

한편 일본을 다녀 온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에게 허위 보고를 한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라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는 것이며 그리되면 신하로서 영구히 조공을 바치겠나이다.”라고 적힌 위조된 사죄문을 바친 것이다. 이 사죄문이 위조임을 알 리가 없는 명나라 조정은 검토 끝에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책봉하기로 결정한다.

1596년 6월 명나라의 정사 양방형과 부사 심유경은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들어간다. 8월 8일 조선도 명나라 사신 수행원 자격으로 황신을 정사로, 박홍장을 부사로 보낸다.

명나라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자 도요토미는 명나라에서 자신이 요구한 강화 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오사카 성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한다. 이때가 9월 2일이다.

심유경과 고니시는 서로 짜고 조약 담당관인 승려 쇼타이에게 국서를 조작하여 적당히 읽도록 하였다. 도요토미가 한문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심유경으로부터 국서를 전달받은 도요토미가 쇼타이에게 국서를 읽으라고 하자, 쇼타이는 진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도요토미가 이를 추궁하자 쇼타이는 사실 그대로 국서를 읽고 말았다. 일본이 제시한 강화 7개 요구 조건이 모조리 무시되었음을 안 도요토미는 분노하였다. 그는 책봉문을 빼앗아 내팽개치며 외쳤다.

“아니 일본 왕이야 이미 내가 하고 있는 데, 무슨 빌어먹을 명나라 오랑캐의 책봉이냐? 게다가 나의 요구 조건은 하나도 안 들어주고.”

강화회담은 즉석에서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자기를 속인 고니시를 당장 죽이라고 소리쳤다. 왜장들은 도요토미에게 간청하였다. 고니시 만큼 조선 사정에 밝은 장수가 없으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 그러자 도요토미는 고니시의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은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일본을 빠져 나왔다. 통역사 요시라는 조선 사신 황신에게 이번에 왜군이 조선을 쳐들어가면 전라도 쪽으로 진격할 것이 틀림없다고 일러주었다. 11월 23일 부산에 도착한 황신은 곧장 그간의 사정을 아는 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왜장 고니시와 명나라 심유경 사이에 벌인 4년여 간의 국제 사기극은 막을 내렸다. 심유경은 또 명나라에 거짓 보고하였으나 명나라는 이번에는 속지 않았다. 명나라 황제는 지금까지 강화를 추진해온 관계자들을 모두 처벌했다. 병부상서 석성이 실각되었고 심유경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1597년 7월에 부총병 양원은 경상도 의령에서 심유경을 잡았다. 그는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짐승 가죽을 말에 싣는 중이었다. 그는 명나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주3)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리에는 고난의 역정이 있었다. 선조 임금의 수군 폐지 명령, 유언비어 난무와 군사들의 공포심, 그리고 당일 전투 등 소위 3중고를 겪었다.

8월 3일에 이순신은 진주에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발령장을 받았다. 이 날 그는 단 10명의 군관과 함께 전라도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순신은 8월 15일에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의 편지를 받았다.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착잡하였다. 그는 곧바로 장계를 작성하였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전선수가 적다하나 보잘 것 없는 신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 할 것입니다.”

8월 19일에 이순신은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군량을 사사로이 피난민에게 넘겨주고 술과 음식을 받아먹었기에 곤장 20대를 때렸다.

유언비어도 난무하였다. 8월 25일에 이순신은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가면서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낸 포작인(匏作人) 두 사람을 체포하여 목을 베고, 그 목을 매달아서 사람들이 널리 보도록 하였다. 이러하자 군대와 백성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9월 15일 밤에 이순신은 해남 우수영에서 휘하 장수들에게 일장훈시를 하였다.

병법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 했는데 이 두 마디 말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대들은 이번 전투에서 살고자 하는 생각을 품지 마시오.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군졸들도 뒤를 따를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요”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9월 16일 오전에 조선 함대 13척과 왜선 133척의 싸움이 시작되자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은 공포에 질려 전투하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앞장서서 홀로 분전하였을 때, 여러 장수들의 배는 1마장 정도 뒤에 있었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순신은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렸다. 그러자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이순신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이순신은 배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그러자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급하므로 우선 싸워 공을 세우게 하겠다.”하였다. 그때서야 여러 배들이 전투에 가세하였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에서 이긴 것을 천행(天幸)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아무튼 13대 133척의 싸움에서 31척의 왜선을 격파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서해 진출 계획은 좌절되었다.

주4) 1598년 8월 20일의 실록에는 풍신수길 사망 보고가 적혀있다.

선조 103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8월 20일(계유) 5번째 기사

전라 수사 이순신이 수길의 사망과 왜적의 철수 상황을 치계하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純信)이 비밀히 치계하였다. “일본에서 도망해 온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수길(秀吉)이 7월 초에 병사했으므로 흉적들이 철수해 돌아가려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또 왜인들이 말하기를, ‘금년은 불길한 해이다. 중국 장수가 무수히 나오고 조선의 주사(舟師)도 많다. 협공을 당할까 매우 우려되니 도망쳐 돌아가려 한다.’ 했습니다.”

주5) 1598년 10월 현재 조선에 남아있는 왜군은 6만4천여 명이었다. 즉 울산에 가토 기요사마의 휘하 1만 명, 서생포에 구로다 나가사마 휘하 5천 명, 부산과 그 주변에 모리 요시나리․데라자와 마사나리등의 휘하 6천 명, 창원과 김해의 죽도에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그의 아들 가쓰시게 휘하 1만2천 명, 고성에 다치바나 무네토라 등의 휘하 7천 명, 사천에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 1만 명, 남해도에 소 요시토시 휘하 1천 명, 순천의 예교(왜교)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휘하 1만 3천여 명 등이었다.(김성한, 칠년전쟁 5권, 산천재, 2012 p 486-487)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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