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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부(烈婦) 기씨부인(2) - 맥동마을 정려비, 장편 서사시와 음악극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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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열부(烈婦) 기씨부인(2) - 맥동마을 정려비, 장편 서사시와 음악극

일비장은 정유재란 때 정절을 지킨 기씨부인의 애절한 이야기를 담은 흔적이다. 이제 묘소를 떠난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맥동마을 입구이다. 여기에는 기씨와 박씨부인 정려비각이 있다. 문정공 하서 선생 유허비와 같이 있다. 숙종 9년(1683년)에 세워진 정려비에는 ‘열부 참봉 김중총(金仲聰) 처 박씨지려, 열부 선교랑 김남중 처 기씨지려’라고 새겨져 있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장손인 김중총은 태인박씨와 결혼을 하였다. 김중총의 아버지는 김종룡(從龍)이고 어머니는 일재 이항의 딸이었다. 그런데 김중총은 경기전 참봉을 하였으나 일찍 별세하였다. 혼자 된 박씨는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만나 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안타깝게도 하서 선생의 큰 아들 집안은 후손이 끊기고 말았다.

최근에 열부(烈婦) 기씨부인 이야기는 노래로, 장편 서사시로 그리고 음악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먼저 ‘일비장’ 노래를 살펴보자. 이 노래는 김예송이 작사하고 김기봉이 작곡하였고, 민재연이 불렀다. 노랫말을 읊어본다.

정녀여 의녀여 하서 선생 손부여
왜병에게 손목 잡혀 이 한 몸 던지니
아아아 정유재란 치욕의 태
아아아 어찌 우리 잊을손가.
자손만대 잊을손가 정녀여 의녀여

가슴깊이 간직했던 은장도 꺼내어
더렵혀진 팔을 끊고 황룡강에 몸 던져
한 여인의 굳은 절개 일편단심
원당산 기슭 위에 기슭 위에
팔 하나 묻혔으니 정녀여 의녀여.

또한 여류시인 김양식(김혜정으로도 불린다.)의 장편 서사시집 ‘기씨부인전’도 출간되었다. 김양식은 1999년에 시집 ‘은장도여, 은장도여’를 발간하였는데 2009년에 ‘기씨부인전’으로 책 이름을 바꾸어서 개정판을 냈다.

이 시집은 서문에 이어 8장과 종장 모두 9장으로 되어 있다. 2,400여 행의 장편 서사시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참상을 읊으면서 기씨부인의 순절에 초점을 맞춘다. 일비장이라는 소재 하나를 장편 서사시로 엮어 내는 솜씨가 놀랍다.

시집 ‘기씨부인전’의 서문(序文)은 이렇게 시작된다.

전라남도 장성군 맥동을 가로질러
겁으로 흘어내리는 황룡강 강둑 황토길 따라
여름 내 무성턴 억새풀들은 가을을 재촉하는 듯
어느새 갈바람에 뽀얀 꽃씨를 꿈처럼 날리며
기씨부인 기리어 찾아든 나그네를 반기는구나.

맥동리 원당산 울산김씨 선산 중턱
기씨부인 죽어서도 시어른 뫼시는듯
위로는 당대 손꼽이던 유학자 하서 선생과
왜란 중 순절하신 시아버님 종자호자(從字虎字) 무덤 옆에
기씨부인 이승에 떨구고 간 흔적으로
제 팔뚝하나 묻은 애절함이여...

이 서사시의 하이라이트는 제6장의 ‘황룡강 푸른 물에 몸을 날리니’이다. 왜놈에게 붙잡힌 손목에 대한 표현은 가히 압권이다.

더럽고도 더러운 왜놈의 손 -
짐승 같은 왜놈에게 잡혔던 이 손 -
부정 타고 부정 탄 이 팔목을
어찌 그냥 지닌 채 조상 앞에 가오리까.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먼저 가신 조상 앞에 어찌 가오리까.
어찌 뻔뻔스레 이 손목 지닌 채 그냥 가오리까.

기씨부인은 은장도로 손목을 자르고 황룡강 물에 빠져 죽었다. 너무나 애달프다.

기씨부인
마음은 이미 죽음을 작정하였으니
먼저 조상 어른들께 이렇게 하직인사 올리고는
하늘의 번개 치듯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가슴에 품었던 은장도 뽑아들고
한 순간 혼신의 힘을 모아
부정 탄 손목하나 이승에 뚝 잘라버리고는
외마디 소리 또 한 번 크게 치며
황룡강 구비치는 푸른 물에 몸을 던지니.

그런데 서사시는 일비장 묘비에 적힌 음기나 기타 사실과는 사뭇 다르다. 사실과 다른 네 가지 사례를 살펴본다.

첫째 서사시집에는 기씨부인의 두 오라버니 효민, 효맹이 임진왜란 초기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봉 기대승 행장을 보면 이들은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둘째 서사시에는 기씨부인의 시아버지 종호 옹이 맥동마을에 밀어닥친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왜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기씨부인 묘비 음기에는 남편 김남중이 시아버지 종호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을 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셋째 서사시에는 기씨부인의 남편 김남중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쟁터에 나섰다가 7년 전쟁이 끝난 후에 장성 집에 돌아온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기씨부인 묘비 음기에는 김남중은 정유재란 때 부친과 함께 강원도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넷째 서사시에는 김중총의 아내 박씨부인이 집의 대들보에 목매달아 죽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집에서 목매달아 죽었다면 이 경우는 열부로 정려를 받기가 곤란하다. 열부로 순절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살로 취급될 수도 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성 사람들’ 책에는 박씨부인은 왜군들의 손아귀에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어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다. 필자는 혼자 된 박씨부인이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만나 욕보지 않으려고 강물에 뛰어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이 문제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한편 2013년 11월에는 장성군이 자체 제작한 음악극 ‘기씨부인전’이 공연되었다. 극단 연바람(대표 오성완)은 11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간 장성문예회관에서 청소년 및 주민 등 900여명을 대상으로 총 4차례에 걸쳐 공연을 하였다. 장성군은 이 음악극 공연에 약 5,000만원을 투자하였다.

음악극 ‘기씨부인전’은 언론과 관객들에게 크게 호평을 받아 금년 3월 21일 장성 문예회관 대공연장 개관 기념으로 앙코르 공연을 하였다.

이 음악극은 매우 감동적이지만 한 가지 장면은 수정하였으면 좋겠다. 음악극에서는 기씨부인이 왜적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칼로 자살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기씨부인이 왜적에게 더럽혀진 팔을 자르고 황룡강 물에 빠져 죽었다.

앞으로 공연 때는 기씨부인이 은장도로 팔을 자르고 황룡강에 물에 빠지는 장면이 연출되었으면 좋겠다.

한편 광해군은 1617년(광해군 9년)에 임진왜란 때의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삼강행실도의 속편인 이 책에는 총 1,725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시 충신 54명, 효자 94명, 열녀 436명 총 584명이 수록되어 있다. 열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에 대하여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부녀자 중에 절개를 지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가 없었고, 효자가 그 다음이고 충신은 또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드러나게 칭도할 만한 자가 또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아! 선비들이 평소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할 때에는 누군들 내가 대장부라고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위태로움에 처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에는 도리어 부인네들보다도 못하였구나.

정유재란 때 정절을 지킨 기씨부인과 박씨부인. 그녀들은 전쟁터에서 왜군과 싸우지는 안했지만 진정으로 애국한 열부들이다.

사진 1. 2. 기씨부인과 박씨부인 정려각

주 1) 서사시는 팩션이다. 팩트와 픽션이 어우러져 있다. 즉 사실과 허구가 혼재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시나 소설 등 문학이 얼마나 사실에 충실하는가이다. 역사는 유익함을 중요시하고 문학은 즐거움을 중요시한다지만, 요즘 방영되는 역사드라마는 지나치게 흥미위주가 많다.

그 예가 드라마 ‘기황후’이다. 이럴 경우 시청률은 올라가겠지만, 역사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반면에 드라마 ‘정도전’은 나름대로 사실에 기초한 정통 역사드라마로 평가되고 있다.

주 2)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는 ‘양씨삼강문’이 있다. 여기에는 1593년에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양산숙의 충(忠)과 양산룡과 양산축의 효(孝) · 양산숙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누이의 열(烈)을 기리고 있다. 이 정려는 1635년(인조 13년)에 세워졌다.

왜군이 전라도를 쳐들어오자 나주 박호동에 살던 양산룡과 양산축 형제도 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나섰다. 양산룡의 아버지는 송천 양응정이고 할아버지는 학포 양팽손으로 지조 있는 사대부 집안이었다.

이들은 9월 17일에 배를 타고 서해바다로 나가려고 삼향포(무안군 몽탄)에 도착하였다. 배가 막 떠나려는 즈음에 수척의 왜선이 갑자기 들이닥쳐 포성이 하늘을 진동하였다.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패한 일본수군은 조선함대를 찾으려고 무안, 함평, 영광 앞바다를 뒤지고 다닌 것이다.

화를 면할 수 없게 되자 양산룡의 어머니 박씨는 형제들에게 “나는 대부(大夫)의 아내이다. 왜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온 가족들이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건지자 그녀는 오히려 화를 내며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는데 건지면 무엇하냐?”하고는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양산룡과 양산축이 다시 어머니를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 들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죽고 말았다. 양산룡의 아내 류씨, 누이동생도 따라 죽었다.

이어서 양산숙의 아내 이씨와 양산축의 아내 고씨도 함께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하인들이 건져냈다. 두 여인은 포구 앞 승달산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왜적들이 몰려오자 이씨 부인은 스스로 목에 칼을 꽂았다. 이씨의 자결을 목격한 적들은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양산축의 아내 고씨만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제봉 고경명의 손녀인 고씨는 왜군이 물러가자 하인 2명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였다.

한편 전쟁의 수난은 기씨부인이나 양씨 일가뿐이 아니었다. 팔도의병장 김덕령의 부인 이씨도 왜적을 피하여 담양 추월산 보리암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여 오는 왜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낭떠러지에 몸을 던졌다. 나중에 정조 임금은 김덕령이 태어난 마을을 충효리로 이름 지어 주고 충효비를 마을 앞에 세워주었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주인공인 서하당 김성원도 노모를 모시고 화순 동복의 성모산(聖母山)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왜적이 나타나 노모를 살해하려하자 몸으로 가리어 함께 죽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산을 모호산(母護山)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성산별곡’ 앞부분을 읊어본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낮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주 3) 1597년 10월 8일에 선조 임금은 자신을 허물하는 교서를 전라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에게 내렸다. 이 교서를 읽으면 전라도의 참상을 실감할 수 있다.

호남과 호서는 참으로 세족(世族)이 사는 부고(府庫)로서 백성의 번성함도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되었는데 병화가 일어난 후로 칼날과 기근과 역질에 죽은 자가 십에 팔구가 되니, 외롭게 남은 민생이 피폐가 심하여 마음 아파함이 하루도 잊지 못하였다.

지금 왜적의 독기 부림이 전보다 더 심하여 칼날이 미치는 곳에는 어린 아이도 남기지 않아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루니 서울아래 천리 지역이 모두 살육하는 장소가 되었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