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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병장 변윤중의 순절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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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의병장 변윤중의 순절
- 삼강정려각, 봉암서원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 있는 봉암서원을 간다. 봉암서원은 봉암산 아래에 있는데 1697년에 망암 변이중(邉以中 1546~1611)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서원 가는 입구에 황주 변씨 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이 있다. 삼강이란 조선 사회의 기본적 윤리강령으로 군위신강(君爲臣綱) · 부위자강(父爲子綱) ·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삼강정려(三綱旌閭)란 위와 같은 도리를 잘 지킨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그 뜻을 기리는 일이다.

임진왜란 300년이 지난 1892년에 고종 임금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열사들을 찾아내어 표창하도록 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조종필이 변윤중을 충신으로, 부인 성씨 부인을 열녀로, 그리고 며느리 서씨 부인을 효부로 함께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변윤중을 이조 참의로 증직하고 그의 부인과 며느리에게도 정려가 내려졌다. 참으로 충신, 열녀, 효부이다.

삼강정려각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충신 이조참의 변윤중, 열녀 변윤중 처 함풍성씨, 그리고 효부 변형윤 처 장성서씨의 현판이 걸려 있다.

충신 변윤중의 현판 아래에는 공조판서 조종필이 1894년에 지은 삼강정려기 편액이 걸려있다. 그리고 보니 올해는 1894년 갑오년 2주갑 되는 해이다.

휴암(鵂巖) 변윤중(邉允中 1548~1597)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평소 거느린 하인들과 장정 200여명을 모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장성현 장안리에서 싸웠다. 그러나 왜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수 일 동안 왜적 수 십 명을 사살하였지만 결국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장정들을 다 잃은 변윤중이 피를 흘리면서 마을에 돌아오자, 마을 노인들은 빨리 몸을 피하도록 권하였다. 그는 도망간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마지막 싸움터였던 부엉 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변윤중의 부인 성(成)씨도 남편의 뒤를 따라 가겠다면서 마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이 몸을 던진 바로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변윤중의 아들 형윤과 며느리 서(徐)씨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부엉바위로 가서 보니 부모님의 시신이 나란히 떠 있었다. 이를 보고 아들 형윤이 죽으려 하자 서씨 부인이 남편의 소매자락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은 이 집안의 외아들이므로 만일 죽는다면 후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당신대신 목숨을 바치겠소." 하더니 제기를 안고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날이 1597년 9월 18일이었다. 왜군이 물러간 뒤에 아들 형윤이 부모와 아내의 시신을 거두었다. 부인 서씨가 떨어진 곳은 하류였는데, 거슬러 올라가서 시부모 곁에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충신과 열녀, 효부가 죽어서도 한 곳에 함께 하였으니.

봉암서원 들어가는 입구 가까이에 시징당(是懲堂)이 있다. 시징당이란 당호는 “오랑캐를 응징한다.”는 의미로 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인데, 안내판에는 “망암 변이중 선생은 화차 300대를 자비와 집안 동생 변윤중의 도움으로 제작해 그 중 40대를 행주산성에 보내 행주대첩을 거두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망암 화차는 전면과 좌, 우측 3방면에 승자총통을 장착해 40발이 연속 발사되는 신무기로 우리나라 국방과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라고 적혀 있다.

변윤중은 화차 제작의 숨은 공로자이다. 그는 변이중의 사촌동생인데 변이중이 화차 300량을 만들 때 재산을 털어 물자를 조달해 줬다. 봉암서원 입구의 장자동(長者洞)은 변윤중이 만석꾼으로 살았다 해서 지어진 동네 이름이라고 한다.

시징당 안에는 변이중이 만든 화차 모형, 총통, 신기전 등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무기 모형이 18점 전시돼 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강당 대청마루와 방이 있다. 강당 이름은 성경당(誠敬堂)이다. 변이중은 자신이 지은 글 심득(心得)에서 성경(誠敬)을 학문의 종지(宗旨)로 했다. 그래서 강당 이름도 성경당으로 지은 것 같다. 강당 동·서편에는 동재인 훈덕재, 서재인 경의재가 있다.

이어서 내삼문을 지나 사당으로 들어갔다. 내삼문의 이름은 엄온문(嚴溫門). 변이중의 문인인 추담 김우급(1574~1643)의 변이중에 대한 만시에 나온 글 “망치칙엄즉지온(바라보면 엄하시나 가까이 대하면 따뜻하셨도다)”에서 엄(嚴)과 온(溫)을 딴 것이다.

사당 이름은 종앙사(宗仰祠)이다. 종앙이란 이름은 홍수주의 상량문에 “크게 어지시어 한 시대에 스승이 되시니”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란다. 사당에는 변이중을 주벽으로 하고 윤진, 변윤중, 변경윤, 변덕윤, 변휴, 변치명 등 6명을 종향으로 해 모두 일곱 분을 모시고 있다. 이들 중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변이중, 변윤중 그리고 윤진이다.

변윤중은 학행으로 추천되어 벼슬이 상의원직장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시 선조 임금을 모시고 모진 고충을 겪으면서 의주까지 갔으며, 그 뒤 1597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장성 향리로 돌아왔다.

이어서 휴암 바위를 찾아간다. 휴암(鵂巖)은 수리부엉이 바위란 뜻이다. 이는 변윤중의 호이기도 한데 휴암이 있는 곳은 호남고속도로 장성JCT 맞은편에 있다.

한편 변윤중의 묘소는 장성군 장성읍 부흥리 육태동에 있다. 묘갈명은 홍석희가 지었는데 비의 명문은 이렇다.

영령이 죽지 않으심이여,
휴암강은 만고에 푸르게 유유히 흐르며
혼백이 영구히 의탁하심이여.
육태산(六駄山)은 천추에 높고 높게 서 있도다.
황고(黃誥), 단설(丹楔)을 내리심이여,(포장과 정려를 내리심이여)
임금의 은혜가 두터우시며 수풍(樹風)의 소리 날카롭도다.
비석에 말씀을 새김이여,
영원토록 후세에 전해질 것이로다.

변윤중, 그는 고을 수령들이 모두 도망갔어도 의연하게 장성을 지킨 의인(義人)의 표상이다.

사진
1. 삼강정려각
2~4 정려각 안의 충신 효부 열녀 현판
5. 시징당
6. 변윤중 묘소

주1) 임진왜란 중에 발명된 신무기 3가지는 거북선과 화차와 비격진천뢰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한산대첩에는 거북선이 등장하고 행주대첩에는 화차가 사용됐다. 신무기가 조선군의 승리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나주의 나대용이고, 화차는 장성의 변이중이 제작했다. 이런 첨단 과학무기를 만든 두 사람 모두 전라도 사람이다.

행주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였다. 정조 임금도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를 만들어 한 차에 총구 40개를 뚫어 연속발사가 되게 했다. 전라순찰사 권율의 행주대첩은 이 화차에 힘 입은 바가 크다.” 했다.

주2)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 오륜(五倫)은《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 군신유의(君臣有義) · 부부유별(夫婦有別) · 장유유서(長幼有序) ·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말한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