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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진, 입암산성에서 순절하다(2)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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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 입암산성에서 순절하다(2) 이미지 1윤진, 입암산성에서 순절하다(2) 이미지 2

제4회 윤진, 입암산성에서 순절하다(2)

수은 강항(姜沆 1567~1618)은 ‘율정윤공 행장(行狀)’에서 윤진의 죽음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윤진의 아들 운구(雲衢)는 윤진의 외종제 구식(具湜)과 함께 그 날로 권부인의 시신을 찾아내어 평상시 옷으로 염을 하였으나, 윤진의 생사는 모르다가 열흘이 지난 후에야 윤진의 처남 석주 권필과 함께 비로소 풀밭 속에서 율정공의 시신을 찾아냈는데 얼굴빛이 펄펄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다.

아! 이상하도다. 마을 사람 중에 공의 죽음을 본 사람이 있었는데 왜적이 흰 칼날을 드러내고 대들어도 그는 가만히 앉아 칼날을 받으면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얼굴빛도 변함이 없었다고 하며, 공을 의사(義士)라고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수은 강항은 영광 출신으로 1597년 9월 23일에 영광 논잠포에서 일본 수군대장 도도 다카토라에게 잡히어 4년간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했는데 <간양록>를 남겼다. 그는 포로생활 중에 선종 승 후지하라 세이카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강항은 윤진을 가로되, “어버이 친상(親喪)에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 효(孝)라 할 것이요, 난리에 굴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충(忠)이라 할 것이며, 덕망이 온 고을에 미쳤으니 인(仁)이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후 나라에서는 윤진의 충성심을 높이 생각하여 좌승지 벼슬을 내렸고, 권씨 부인에게는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그리고 입암산성을 다시 수리하면서 순의비를 세우고, 봉암서원에 배향하였다.

한편 정읍 출신 이경국(李敬國 1549~1597)과 이안국(李安國 1553~1597) 형제도 입암산성에서 윤진과 함께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두 형제가 죽자 아우 이영국이 위험을 무릅쓰고 집안 하인 용쇠와 같이 두 형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왔다. 이경국의 부인 여산 송씨도 장사 지낸 후 3일 뒤에 이경국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입암산성 안에는 윤진 순의비와 이경국․이안국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윤진 순의비는 1742년(영조 18년)에 세워졌는데 전라도 관찰사 권적이 비문을 짓고 장성도호부사 이현윤이 글씨를 썼다.

순의비에는 ‘부부가 함께 죽어 절의를 둘 다 이룬 것은 참으로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요, 백세를 내려가도 감동할 일’이라고 적혀 있다. 명문(銘文)은 이렇다.

저 남쪽 땅을 바라보라.
바위가 있으니 높고 높도다.
지아비는 충의에 죽고
지어미는 절개에 죽었도다.
한 몸 되어 살신성인하니
만고에 어울려 열렬하도다
바위가 갈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름이 그처럼 없어지지 않으리라.

그러면 여기에서 윤진에 대하여 알아보자. 지금까지 윤진에 관한 자료는 각종 자료마다 다르게 나와 있어 이번 기회에 제대로 정리하고자 한다.

윤진(尹軫 1548~1597)은 호가 율정(栗亭)으로서 판교 윤강원의 둘째 아들로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윤혜(尹譓)는 성삼문․박팽년과 교유하였는데 단종 임금이 폐위되자 오천 김경수의 증조부 도암 김처리와 같이 장성으로 은거하였다.

한편 윤진의 아버지 판교 윤강원은 의리 있는 선비였다. 중종 때에 김안로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상소를 올린 진우(陳遇)를 때려죽였다.

진우는 명망 있는 자이어서 서울에 친구들이 가득하였으나, 그가 죽자 혹시나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조문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윤강원은 평소에 진우와 그리 친하지 않았으나 진우를 위해 제문을 짓고 장사를 치러주었다. 다행히도 김안로가 실각되어 그는 별 탈을 입지 않았다.

명종 시절에 윤강원이 평안도사를 마치고 서울에 오자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인 정순명․이기 등은 그에게 술자리를 베풀고 유관의 죄를 밝히어 상소하라고 부추겼다. 그런데 윤강원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정순붕․이기 등은 노하였다. 이후 윤원형 일파인 정순붕 등은 아버지 판교공을 의금부에 하옥하였고 그는 곤장을 맞고 강원도 양구에 유배되었다. 윤진은 아버지의 유배지 양구에서 태어났는데 2남 5녀 중 막내였다. 부친 판교공은 다시 강진현으로 유배되어 10여년을 지냈는데, 부친이 강진으로 유배될 때는 윤진의 나이 2~3세였다.

윤진은 어려서부터 근엄하고 성인다운 기상이 있어 하서 김인후(1510~1560)가 그를 보고 칭찬하여 앞으로 큰 재목이 되리라 하였다. 윤진은 원대한 꿈을 안고 성장하면서부터 학문에 진력하였다. 부친의 강진에서의 귀양살이가 풀리자 그는 부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서 당시의 명현들과 사귀다가 부친상을 당하였다.

경기도 과천에서 3년 상을 마치자 조정의 친구들이 윤진을 경기전 참봉으로 천거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모친과 큰 형이 집안이 가난함을 토로하자 그제야 나아가 순릉참봉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 선공감봉사(奉事)로 전보되었다. 윤진은 1590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시묘살이를 하여 1592년 1월에 복을 벗었다. 그런데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강원도로 피신하였다. 부친이 강진에서 유배 살이 중에 친척 중 전(前) 장연현감 윤문(尹雯)이란 분이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장성에 별장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강원도에서 다시 전라도로 내려와 장성 저산(罝山)에 살았다.

1592년 7월에 윤진은 김경수(金景壽), 기효간과 함께 장성 남문창의를 주도하고 격문을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1월 10일에 의사 38인, 집안 하인 8명, 군량 31섬을 가지고 와서 창의에 참여하였다.

11월 17일에 장성 남문의병은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부사 기효간, 참모 김홍우와 함께 종사로 임명되어 대오를 편성하였다.

장성 입암산성, 봉암서원, 오산창의사, 호남오산남문창의비를 가면 의병장 윤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윤진은 1594년에 임압산성 수축 공사를 완성하였다. 사적 384호인 입암산성은 전라도로 들어가는 요충지이다. 입암산의 계곡 능선을 따라 만든 포곡식 산성으로 현재는 약 3.2㎞정도 남아 있다. 산성 안에는 창고와 무기고 객사 그리고 안국사 등 6개의 사찰이 있었다 한다. 1980년대 까지만 하여도 성내리라는 마을이 있어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는데, 현재에도 남문과 북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한편 윤진은 1729년에 봉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봉암서원은 망암 변이중의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1697년에 봉암산 아래에 세워졌다. 또한 윤진은 오산창의사에 김경수․기효간 등과 함께 배향되어 있고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 호남오산남문창의비에도 장성남문창의 의사(義士)로 기록되어 있다.

의병장 윤진. 그는 수많은 왜적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서도 의연하게 입암산성을 지킨 의인(義人)의 표상이다.

사진
1. 봉암서원 - 망암 변이중 서거 400주년 기념식 (2011년)
2. 오산창의사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주1) 율정 윤진에 관한 기록은 봉암서원지에 있는 ‘율정선생관계문헌’과 수은집에 있는 ‘윤진행장’과 ‘윤진을 포상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請褒尹珍疏)’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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