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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진, 입암산성에서 순절하다(1)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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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진, 입암산성에서 순절하다.(1)

1597년 8월 16일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전라도를 초토화하였다. 고을 수령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관아를 버리고 도망갔고, 백성들은 산속으로 숨거나 배를 타고 피난가기에 바빴다. 의로운 선비들도 의병을 일으킬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였고 마을들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의롭게 나선 이가 있었다. 장성의 윤진과 변윤중이 그들이다. 먼저 윤진에 대하여 알아보자.

9월 7일에 직산 전투에서 패전한 왜군은 방향을 돌려 다시 남하하였다. 9월 16일에 왜군은 정읍에서 지휘관 회의를 하였고, 시마즈 요시히로(도진의홍)는 왜군 1만 명을 이끌고 노령을 넘었다. 이날 시마즈는 장성 입암산성(笠岩山城)을 함락시켰다.

입암산성은 전남 최북단 입암산 687m 정상 아래 625m에 석성으로 쌓여진 성으로, 이곳은 도로가 모두 입암산 서쪽의 갈재 협곡을 통과하고 서해안과도 가까운 산악이어서 옛날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입암산에는 이미 삼한시대에도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후백제 때에도 중요한 요새지로 여겨졌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사절요>에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 6차 침입 때 몽고군에 항거하여 무장 송군비(宋君斐)가 이곳에서 방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593년 2월 장성현감에 부임한 이귀(李貴 1557~1633)는 입암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는 관내에서 백성을 동원할 형편이 안되어 의승장 법견(法堅 1552~1634)에게 산성 수축 공사를 맡겼다. 법견은 전라도내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거의 완성하였다. 그런데 1594년 초에 이귀가 전보발령이 나자 임압산성 축조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

이러하자 1594년 3월경에 전라도관찰사 이정암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율정(栗亭) 윤진(尹軫 1548~1597)을 축성 책임자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였다. 윤진은 1592년에 장성남문 창의에 참여한 바 있는 선비였다. 선조 임금은 명하기를 “산성은 백성의 운명과 관계되고 국가를 보장하는 곳이니 조속히 성을 중수하라.”하였다.

윤진은 선조의 어명에 따라 밤낮으로 산성에 있으면서 손수 널판을 나르고 삽질을 하여 성을 중수하였다. 이 때 의승장 법견 등 승려들도 공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1594년 2월 27일자 참조) 그리하여 포루(砲樓)를 설치하고 창고와 사찰을 세우는 등 요새지를 만들었다.

한편 정유년(1597년) 7월에 한산도가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윤진은 부인 권씨와 아들 윤운구(尹雲衢) 등 가족들을 데리고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입암산성 이웃 네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고을 수령과 함께 성을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여기에서 네 고을은 장성, 진원, 정읍, 고창인 듯하다.

그런데 왜군들이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8월 20일에 전주성을 무혈입성한 후에 전라도 전역을 점령하자 정읍, 고창, 영광, 진원 고을 등 대다수 전라도 수령들이 모두 관아를 버리고 도망을 갔다. (1593년 10월 13일 선조실록 참조)

윤진은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성을 지켜야만 하였다. 그는 가까스로 주변에서 백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들은 모두 싸워 본 경험이 없는 농민들이었다. 그를 따르던 구생(具生)이라는 사람이 “윤공은 성을 쌓으라는 명을 받았지, 성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피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윤진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조정에서 이 성을 쌓은 것은 오늘의 난리에 대비코자 한 것이니 어찌 신하된 도리로 내 살 길만 바라리오. 이 성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고 오늘은 바로 내가 목숨을 바칠 날이다.”라고 말하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의병들은 모두 흩어지기에 바빴다. 그는 몇 명의 의병과 같이 힘껏 싸웠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1만 명의 왜적을 어찌 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성이 무너졌다. 윤진은 창칼에 목이 찔려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태연한 모습으로 순절하였다. 윤진의 부인 권씨도 남편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왜적에게 욕보지 않고 정절을 지키려고 품에 간직하였던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왜적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옷도 벗기지 않고 가버렸다. 부인 권씨는 예조참의 권벽(1520-1593)의 딸이고 시인 석주 권필(1569~1612)의 누나였다.

주1) 이귀(李貴 1557~1633)는 호가 묵재로서 율곡 이이의 문인이었다. 그는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논변이 탁월하였다. 임진왜란 때 그는 선조 임금을 호위하였고 1593년 2월에 장성현감에 부임하였다. 그는 장성남문의병을 적극 지원하였고, 정예군 40명을 뽑아 담용군(膽勇軍)이라 이름 붙이고 고패(高沛), 박검동(朴儉同) 등 왜적의 간첩을 사로잡았다. 담용군은 담력 있고 용맹스러운 군사라는 뜻이다. 요즘말로 말하면 특전사 군인과 비슷하다.

또한 이귀는 병사 300명을 절강병법(浙江兵法)으로 조련하였다. 절강병법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창안한 왜구(倭寇) 격퇴에 명성을 올린 실전전술이다. 그의 책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온다. 기효신서는 1560년에 척계광이 절강현(浙江縣)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한 병서(兵書)이다. 권1 속오편(束伍編)으로부터 권18 치수병편(治水兵編)에 이르는 총 18권으로 되어 있다.

당시 왜구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습지가 많은 중국의 절강 지방 등을 노략질하였다. 명군이 이들을 소탕하는 데에는 종래 북방 유목민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편제된 군제(軍制)와 무기 및 전술이 적합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은 왜구의 기습적인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부대(小部隊)의 운용과 접근 전에 적합한 전술을 고안하였다. 이 병법(兵法)이 절강(浙江) 지방에서 나왔다고 하여 절강병법(浙江兵法)이라고 하는데, 이는 명확한 지휘편제와 연대책임을 강조하는 속오법(束伍法)을 채택하고, 조총(鳥銃)․등패(藤牌)․낭선(狼据)․장창(長槍)․권법(拳法) 등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기효신서 책이 조선에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 이후였다. 선조는 명나라의 이여송의 군대가 절강병법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효신서 책을 입수하여 그 전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장성현감 이귀도 기효신서를 입수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읍병 300명을 절강병법으로 훈련시켰다.

주2) 법견(法堅)은 호가 기암(奇巖)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장으로 활약하였다. 나중에 임암산성이 완성되자 그는 산성의 수호를 맡는 산성수장(山城守將)이 되었다.

주3) 양은용의 글에 의하면 이순신의 수군 의승장 자운 스님의 동생인 급암(汲巖)은 장성 입암산성 승장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정유재란 시 입암산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당시에 임암산성 안에는 안국사(安國寺) 등 사찰과 암자가 6개나 있어 상당수 의승이 기거하였으리라 추정되며, 이들도 윤진과 전투를 하였을 것이다.

주4) 윤진 부인 권씨의 가계를 살펴보면, 윤씨 부인의 아버지 습재(習齋) 권벽(權擘)은 예조참의, 강원도관찰사를 하였고, 서인으로서 송강 정철과 친하였다.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은 권벽의 다섯째 아들인데, 조선 중기 최고의 시인이었고 정철의 문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광주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 권필은 팔도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의 원통함을 읊은 취시가(醉時歌)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임진왜란 의병장 해광 송제민의 사위이기도 하다. 광주 운암서원에는 권필의 신위가 장인 송제민과 함께 모시어져 있다.

그런데 송제민은 장성 남문의병 맹주 오천 김경수의 둘째 아들 김극순의 장인이기도 하다. 김극순은 첫 부인이 송제민의 딸 홍주 송씨이고, 두 번째 부인은 하곡 정운룡의 딸 동래정씨이다.

사진
1. 입암산성도(규장각 소장)
2. 입암산성 진지배지도
3. 김극순 단비
4. 윤진 순의비 - 입암산성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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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김선기, 전라도 성터이야기, 보림, 2006
o 허경진 옮김, 석주 권필 시선, 평민사, 1990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부록)

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9일(기축) 15번째 기사

전라 감사 이정암이 전라도의 방비책에 관해 장계하다.

전라 감사 이정암이 장계하였다. “신이 비변사의 행이(行移)를 보건대, 신이 아뢴 것으로 말미암아 광양(光陽)·섬진(蟾津)·구례(求禮)·석주관(石柱關)·운봉(雲峰)·팔량치(八良峙)·장수(長水)·육십치(六十峙) 등에 새로 첨사(僉使)·만호(萬戶)를 두는 일은 한편으로 계획하고 경영하여 내년 봄에 파수처로 삼을 것이며, 본현감(本縣監)으로 만호를 겸임시키는 것이 온당한 지의 여부는 다시 헤어려서 아뢰라고 하였는데, 신의 망령된 생각은 이러합니다.

일찍이 각포(各浦)의 진장(鎭將)을 보건대 그 의식(衣食)을 장만할 길이 없으므로 입방(入防)한 군졸을 덜어내어 대량(代糧)을 거두고 있으니 이것이 첫째 폐단이며, 포소(浦所) 근방의 주민이 진장(鎭將)에게 투속(投屬)하므로 그 고을의 수령(守令)과 서로 다투어 으레 혐극(嫌隙)을 일으키니 이것이 둘째 폐단인데, 만일 고을의 수령으로 겸임시킨다면 이 두 가지 폐단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군영(軍營)과 수비청(守備廳)을 간략하게 설치하고 군기(軍器)·군량(軍糧)을 나누어 두어, 사변이 있으면 입방한 군졸과 경내의 병민(兵民)을 거느려 지키고 막으며, 사변이 없으면 수졸(戍卒)을 군관(軍官)에게 나누어 부치고 그 고을로 돌아와 관사(官事)를 처리한다면 관속(官屬)을 이거(移居)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백성이 왕래하되 그 경내를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니 무방할 듯합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타관(他官)이 이미 진장으로 차출되었더라도 이따금 수령으로 겸임시켜도 안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따로 두는 것과 겸임시키는 것의 편부(便否)는 조정에서 숙의(熟議)하여 시행하소서. 또 섬진·석주관·팔량치·육십치에는 다 육군(陸軍)을 두고 첨사·만호는 병사(兵使)에게 예속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석주 만호(石柱萬戶)는 구례(求禮)를 남원(南原)에 병합시킨다면 전 현감(縣監) 이원춘(李元春)을 그대로 만호로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나 병합하지 않는다면 세 고을의 현감들은 만호를 겸임해 차출하고, 새로 제수(除授)하는 섬진 첨사(蟾津僉使)는 재략(才略)이 있고 일에 익숙한 사람으로 십분 가려 차출하여 바삐 부임시키소서. 그런 뒤에야 성을 쌓고 군영을 설치하는 따위의 일들을 새로 함께 계획하여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 46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2월 3일(임자) 7번째 기사

비변사에서 전라도 각지의 산성을 수축하여 들어가서 지키게 하도록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일 전라 감사 이정암(李廷馣)의 장계에 의하면, 도내의 산성을 살펴보니 남원(南原)의 교룡산성(蛟龍山城), 담양(潭陽)의 금성산성(金城山城), 순천(順天)의 건달산성(乾達山城), 강진(康津)의 수인산성(修仁山城), 정읍(井邑)의 입암산성(笠巖山城)이 모두 천험(天險)의 요새로 되어 있어 난을 당하여 화를 피하는 데는 이보다 좋은 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입암산성이 제일 훌륭한 천험인데, 고성(古城)을 수축하는 데는 인력이 많이 들지도 않고 또 도내(道內)의 중앙에 관애(關隘)를 이루고 있으므로 힘을 합하여 지킨다면 하도(下道)의 적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대소(大小) 인민이 모두들 이를 수축하여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으로 만들기를 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에서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외환(外患)이 그치지 않아서 전쟁이 말할 수 없이 많았는데도 지탱하여 보수(保守)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산성의 이로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은 환란을 대비함에 있어 이 일에 제일 관심이 깊었었는데 태평이 계속된 이후로는 전혀 축설(築設)하지 않았기 때문에 흉적들이 한번 일어나면 승승장구하여 이르는 곳마다 붕괴되어, 흩어져 달아난 인민들마저도 몸을 숨길 곳이 없어 모두 적의 칼날에 죽게 하였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합니다.

대저 적이 믿고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오직 철환(鐵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평지에 있는 성은 거개가 낮기 때문에 적이 비루(飛樓)를 타고 성안을 넘겨다보면서 조총(鳥銃)을 난사, 성을 지키는 군사로 하여금 머리를 내놓지 못하게 한 다음, 용력있는 적이 긴 사다리와 예리한 칼을 가지고 성첩(城堞)을 타고 곧바고 올라와 대초(大鍬)로 성을 파괴하곤 합니다. 그래서 성을 지킬 수가 없는데 진주(晉州)에서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산성의 경우는 높이 반공(半空)에 솟아 있으므로 비루가 있다 해도 쓰기가 어렵고, 올려다보고 조총을 발사해도 곧바로 올라갔다가 도로 떨어지게 되므로 적의 장기(長技)가 모두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아군이 궁시(弓矢)나 석거(石車)로 위에서 마구 물 붓듯이 쏘아대면 비록 원숭이 같이 날렵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인천산성(仁川山城)·구월산성(九月山城)·미타산성(彌陀山城)·행주산성(幸州山城)의 싸움에서 모두 지리적인 험요(險要)를 이용하여 승리를 획득한 것입니다.

지금도 곳곳에 지형을 선택하여 산성을 쌓은 다음 백성을 인솔하여 들어가 보전하게 하고, 공사(公私)의 저축을 모두 모아다가 그 가운데 적치하게 함은 물론 들을 깨끗이 비운 상태에서 적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적이 올려다보면서 공격해 와도 번번이 패배할 것이고, 또 들에는 노략질할 것이 없어 군량을 대기가 어렵게 되면 반드시 우물쭈물하다가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패주하는 때를 이용하여 각진(各陣)에서 정예병을 출동시켜 적의 앞뒤를 단절하기도 하고 혹은 귀로(歸路)에서 요격하기도 하는 등 공격한다면 몇 번 하지 않아 적의 기세는 절로 쇠약해지고 아군은 절로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오늘날 적을 막는 방책은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인심(人心)이 먼 장래를 생각하지 않아 온갖 일이 폐이(廢弛)되어 비록 시행할 만한 계책이 있어도 조처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정암의 말도 혼자의 의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역시 본도의 인정을 인하여 이렇게 아뢴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한바 교룡산성은 남원에서 5리(里) 안에 있습니다. 남원에는 원래 성이 있고 낙 참장(駱參將)이 새로 수축한 것도 굳게 지킬 만하니, 산성에서 마주 대하여 함께 지킨다면 더욱 적이 감히 침범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금성 산성은 전에 이성임(李聖任)이 수축하였고,

입암산성은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거의 다 수축했습니다. 건달 산성과 수인산성 또한 이 예에 의해 수축하게 하고 미리 근처의 인민들에게 알려 만일 적변이 발생하면 제때에 들어가 보전하여 기필코 지키도록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도내에 민력(民力)이 바야흐로 고갈되어 성을 수축하는 역사에 다시 민력을 쓸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귀가 도내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편의에 따라 역사를 끝마치려 한다는데 이 계책이 매우 온편합니다.

이정암에게도 이 예에 의해 시행하게 하되 역사가 끝나거든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기타 동복 산성(同福山城)·옹성산성(甕城山城) 등도 또한 이렇게 순차적으로 수축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장성현감 이귀는 유생(儒生)으로서 도임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도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제조하는 등 조처가 제대로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즐겨 따른다고 합니다. 모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진실로 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귀의 일은 매우 가상한 것이니 상을 논하여 포장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권면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도내의 여러 고을에도 이런 내용으로 신명(申明)하여 계칙(戒飭), 모두 이귀가 한 것처럼 각기 본읍의 군사를 초발하여 성심껏 훈련시키되, 조총을 가르치기도 하고 궁시를 익히게 하기도 하여 조처에 방도가 있게 되면 백성이 수고롭지 않고도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전라도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예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귀의 일은 매우 가상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일은 비록 사람들의 기림이 있어도 실효가 없는 경우가 있으니, 실상이 드러난 후에 포장하도록 하라.”하였다.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27일(병자) 3번째 기사

비변사에서 입암산성 등의 수축을 총섭장 유정과 승군에게 책임지울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늘 권협(權悏)의 장계를 보니 ‘삼가(三嘉)의 악견 산성(岳堅山城), 합천(陜川)의 이숭 산성(李崇山城)은 비록 외형상 험하기는 하나 모두 철환(鐵丸)의 사정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인정(人情)이 위태롭게 여긴다. 곽재우(郭再祐)의 말로는「가야산(伽倻山)의 용기산성(龍起山城)과 지리산(智異山)의 귀성산성(龜城山城)은 형세가 높고 깎아지른 듯하며 성안이 넓어 보통 산성에 견줄 바가 아니어서 참으로 얻기 어려운 천험(天險)이다.」고 하니, 만약 총섭장(總攝將) 유정(惟政)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승도(僧徒)를 모아 형편대로 수축하게 한다면 백성의 힘을 번거롭히지 않고도 공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또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笠巖山城)은 험준한 기암 절벽으로 적을 피하는 데 있어서 첫째 가는 곳이다. 지금 수축을 거의 마치고 또 사찰을 세워 영구한 계책으로 삼고자 현감 이귀(李貴)가 중 법견(法堅)을 불러 그 일을 주관토록 하였다. 만약 조정에서 부총섭(副總攝)이라는 관교(官敎)를 성급(成給)해주고 또 인자(印子)를 내려 권장한다면 공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권협이 그 형세를 직접 보고 도내의 민정을 살펴서 말한 것이니, 악견·이숭 두 산성은 전적으로 유정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승도를 모아 형편대로 수축하게 하고, 입암산성도 이귀의 말대로 법견을 부총섭으로 삼는 것이 시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관교(官敎)를 만들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토벌한 승려를 총섭이라 이를 수는 있지만 한 개의 산성을 수축하는 승려에게 갑자기 총섭의 권한을 주고 교지와 인자까지 내려준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다시 살펴 시행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상의 전교가 과연 윤당합니다. 다만 그 이름만 칭호하고 별달리 총섭의 권한은 주지 않더라도 앞으로 이를 칭탁한 범람한 일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려우니, 군공(軍功)으로 논상(論賞)하는 규례에 의하여 대선 체문(大禪帖文)을 만들어 보냄으로써 권하여 이루도록 기약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