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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군의 전라도 점령과 도망가는 고을 수령들
작성자 김세곤
내용

제2회 왜군의 전라도 점령과 도망가는 고을 수령들
- 남원성 순절과 3차 남문의병이 더욱 빛나다.

1597년 7월 16일에 일본 수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거제도 근처의 칠천량에서 전멸시켰다. 왜군의 다음 목표는 전라도였다. 8월초에 5만6천명의 일본 육군과 수군은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소서행장이 이끄는 육군은 남해안을 따라 하동, 구례로 진격하였고, 일본 수군은 8월 3일에 두치진(전남 광양시 다압면 소재)에 들어왔다. 8월 7일에 왜군은 구례를 점령하였다. 구례·곡성 지역은 아수라장이었다. 8월 12일에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이 장사 50명과 수 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일부 고을의 수령들은 관아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갓 부임한 전라도관찰사 황신도 전주 감영에서 부안군 변산으로 피신하였다.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4일간 남원성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명나라 총병 양원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4천명의 조·명 연합군은 우키다 히데이에(우희다수가)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지휘하는 5만6천명의 왜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왜군들은 잔인하였다. 4천명의 병사와 1만여명의 백성들을 모두 죽였다. 산하를 불태우고 사람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챙겼고 도공들을 잡아갔다. 남원성 전투에 종군했던 일본 승려 쿄넨은 8월 16일자 조선일기에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이 처참하구나.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흔적이 남원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만 명의 의로운 이들이 함께 묻혀 있는 무덤.

남원성에서 싸우다 죽은 이는 장성출신 송약선(宋若先 1568~1597)이 있다. 그는 청백리 송흠 4대손이었다. <호남절의록>에는 송약선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져서 왜군의 칼에 피살당함을 수치로 알고 활시위로 목을 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약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부인 박씨도 자결하였다. 그 지아비에 그 지어미이다. 장성군 삼계면 발산리 대무마을에 있는 송약선 묘소의 묘비에는 “부(夫)는 군(君)을 위해 죽고, 부(婦)는 부(夫)를 위해 순절하였으니 충(忠)과 열(烈)이 일문(一門)에 남았다.”고 적혀 있다.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했던 김부와 최보의도 전사하였다. 나주 출신 김부(金溥 1569~1597)는 임진왜란 때 김경수 등과 함께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여 나주의 모의도유사(募義都有司)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그는 금성유진장으로 병사를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갔는데 성이 함락되던 날 왜적과 싸우다가 병사 이복남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때 나이 29세였다.

이 당시 김부의 아내 임씨는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영암 노진에 이르렀을 때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씨는 품고 있던 아이를 여종 연금(延今)에게 맡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보살펴서 김씨 집안의 맥을 이어다오. 나는 깨끗한 몸으로 돌아가 내 남편을 만나겠다.”고 하면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후 아들 효선(孝善)이 장성하자 그는 남원성 순절지와 영암 노진에 여막을 짓고 6년을 지냈다. 나라에서 충․효․열이 있다 하여 그에게 참봉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효선은 죄인을 자처하고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정읍출신 최보의(崔寶義 1547~1597)도 아버지 최준(崔准)과 함께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최보의는 임진왜란 때 의병과 군량 등을 모아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고, 1차 의병 시 용인까지 진격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 8월 중순에 최보의의 아버지 최준이 교룡산성 별장 신호를 따라 남원성에 들어가자 최보의도 같이 성에 들어가 부친을 도왔으나, 아버지가 순국하자 그도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적진에 돌입하여 왜적 수십 급을 사살하고 순절하였다.

송약선과 김부, 그리고 최보의는 남원시 만인의총 내 충렬사에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한편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에 맹주 김경수는 사촌동생 김신남을 불러 다시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8월 17일에 김신남은 3차 창의하였다. 의병 200인을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여 여러 고을의 의병과 군량을 모았다. 8월 18일에는 고창의 김홍우가 명나라 장수 해생 등의 접반사로 아우 광우, 덕우를 보내고 의사 100인을 데리고 합세하였다.

장성 출신 김중기와 박안동, 부안 출신 김세 등도 의사 300여명과 함께 왔다. 8월 19일에 군오를 점검하였다. 김국서, 박성, 김익웅, 김무철 등이 합세하고, 김성진이 의사 57인과 군량 12섬 등을 가지고 와서 합류하였다.

이어서 장성 의병은 전주를 떠나서 여산에서 숙박하고 안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김홍우가 명나라 장수 해생 등을 따라 소사에서 왜적을 대파하니 왜적들이 흩어져 이웃 고을로 들어갔다.

이후 김신남 등은 안성에서 왜적을 맞아 싸워 32명을 목 베고 왜적의 칼 3자루를 빼앗고 포로 17인을 구출하였다. 김성진 등은 적을 추격하여 격파하다가 힘을 다해 죽음을 당하고 아군의 전사자 역시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 날 전투에서 김성진, 허상징, 송정춘, 오인갑 등도 순절하였다. 이렇게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김신남의 3차 의병은 9월 10일에 파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화제를 바꾸어 왜군 동향을 알아보자. 9월 7일에 직산 전투에서 패전한 왜군은 방향을 돌려 다시 남하하였다. 9월 16일에 왜군은 정읍에서 지휘관 회의를 하였고, 당일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1만명의 왜군을 이끌고 노령을 넘었다.

9월 중순까지 왜군들은 전라도 50여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다.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에는 고니시(소서행장), 우키다 히데이에(우희다수가), 나베시마(과도직무), 시마즈(도진의홍), 요시라 부대의 전라도 점령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여 본다.

1597년 9월 1일 소서행장의 부대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서 왜교(倭橋)에 성을 쌓고 군대를 나누어 본성과 광양성(光陽城)을 지켰다.

9월 15일 나배시마 등은 전라우도로 내려가면서 모두 분탕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여 민패(民牌)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

도진의홍 등의 적은 순창ㆍ담양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고 지켰다. 창평ㆍ광주ㆍ옥과ㆍ동복ㆍ능주ㆍ화순 같은 데는 적병이 많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며 민패를 발급하여 불러다 항복시켰다.

9월 17일 적장 평조신(平調信)이 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임실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그대로 본현에 유둔하고, 산에 들어간 사람을 유인해 내다가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도(右道)로부터 곡성으로 들어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9월 18일 적병 수천 명이 우도로 해서 남원에 이르렀고, 다음날 구례로 향하였다가 이어서 사천으로 들어갔다.

9월 19일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근일에 내려오는 왜적은 다 남원을 거쳐 구례로 향하여 갔다. 운봉ㆍ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이들 왜적이 불의에 돌진해 왔기 때문에 살해당하고 약탈당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시마즈(도진의홍)의 군대들은 9월 27일에 해남을 점령하고 방문(榜文)을 걸고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백성들을 다루었다. 즉 농민들은 평상시와 같이 농사에 힘쓸 것을 장려함과 동시에 왜군에 저항한 선비들을 밀고하도록 포고(布告)하였다.(기타지마 만지 책 p 208 참조)

한편 전라도 각 고을 수령들은 왜군이 전라도에 발을 들여놓자 싸울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관아를 버리고 도망쳤다. 영광군수, 고창현감, 정읍현감, 옥과현감, 진원현감, 평창현령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13일 참조)

주1) 8월 27일자 선조실록에는 ‘비변사가 도망치기에 바쁜 관리들을 단속하고 영구히 등용하지 말자‘고 기록되어 있다. 9월 5일자에는 ‘비변사가 전라감사에게 본도로 돌아와 복무하도록 지시’한 기록이 있다.

주2)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는 남원성 함락시 심당길 등 조선의 도공 80명을 포로로 일본에 연행하기도 하였다.

주3) 1597년 10월 13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진원현감(珍原縣監) 심윤(沈惀)은 벼슬을 버리고 순찰사 진하에 있는데 왜적이 고을에 가득하여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진원현에 왜군이 상당기간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록)

선조 93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0월 13일(경오) 7번째 기사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들에 관해 보고하다.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장계하기를, “도내에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들이 많지만 선후와 원근의 차등이 없지는 않습니다. 길이 막혀 소식이 불통하므로 근처에 있는 각 고을만 우선 소문에 의해 기록해서 아뢰고 나머지 각 고을 수령들은 뒤에 듣고 보는 대로 아뢸까 생각합니다. 바닷가의 각 관아는 육로(陸路)와 같지 않아서 창고의 곡식을 미리 조치해 산실되지 않게 할 수가 있는데, 대개 다 헛되이 버려서 난민들이 차지하게 하거나 기회를 틈타 도적질을 해서 피란하는 자산을 삼기도 하니 극히 분통합니다. 우선 더 조사하여 아뢸까 생각합니다. 진산군수(珍山郡守) 신택(申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아에 남아 분발해 왜적을 쳤는데 군사가 흩어지고 힘이 다해 숲 속에 숨었다가 왜적에게 살해되었고 처자는 모두 사로잡혔으니 매우 측은합니다. 조정에서 참작해 권징(勸懲)을 보이소서.”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에 대하여 황신이 아뢴 것은 다음과 같다.

“여산군수(礪山郡守) 이빈(李馪)은 관아를 버리고 피신했다가 이제야 관아로 돌아왔고, 전주부윤(全州府尹) 박경신(朴慶新)은 성을 버리고 피신하였다가 왜적이 경내에 이르자 타도로 피난갔으며, 전주판관 박근(朴瑾)은 성을 버리고 피신하여 간 곳을 알 수 없고, 익산군수(益山君守) 이광길(李光吉)은 관아를 버리고 순찰사의 진중으로 갔다가 함께 금산(錦山)으로 가는 도중 왜적을 만나 타도로 달아났었는데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습니다.

김제군수(金堤郡守) 고봉상(高鳳祥)은 적을 만나 피신하였다가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고, 만경현령(萬頃縣令) 조응서(趙應瑞)는 가장 먼저 관아를 버리고 경내에 피신했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으며, 임피현령(臨陂縣令) 이산휘(李山輝)는 가장 먼저 관아를 버리고 경내에 피신했다가 조방장(助防將)의 진중으로 갔었는데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습니다. 용안현감(龍安縣監) 정지(丁至)는 경내에 피신했는데 적이 경내를 침범한 뒤에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함열현감(咸悅縣監) 박정길(朴廷吉)은 전주가 함락되자 경내에 피신했다가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으며, 옥구현감(沃溝縣監) 김희온(金希溫)은 경내에 피신했다가 조방장의 진중으로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습니다.

부안현감(扶安縣監) 권성(權省)은 경내에 피신했다가 지금은 돌아왔고, 무장현감(茂長縣監) 이남(李覽)은 경내에 피신했다가 적이 고을에 들어온 후에는 섬 속으로 피란했으며, 영광군수(靈光郡守) 전협(田浹)은 경내에 피했다가 왜적이 경내에 침범한 후에는 섬 속으로 피란했고, 고창현감(高敞縣監) 문희개(文希凱)는 왜적이 본도에 침범하자 남원이 함락되기 전에 관아를 버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읍현감(井邑縣監) 이진(李軫)은 관아를 버리고 순찰사의 진 아래에 와 있다가 이미 관아로 돌아갔고, 고부군수(古阜郡守) 이정립(李廷立)은 경내에 피신했다가 적세가 핍근해 오자 섬 속으로 피란했으며, 금구현감(金溝縣監) 한수성(韓守性)은 타도로 피란했다가 이제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고, 태인현감(泰仁縣監) 박지술(朴知述)은 타도로 피란하였는데 지금도 있는 곳을 알 수 없습니다.

고산현감(高山縣監) 최철강(崔鐵剛)은 경내에 피란했다가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고, 금산군수(錦山郡守) 홍창세(洪昌世)는 왜적이 경내에 들어오자 타도로 피란했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에 돌아왔으며, 무주현감(茂朱縣監) 김백추(金百秋)는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고, 진안현감(鎭安縣監) 오장(吳長)은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으며, 장수현감(長水縣監) 강복성(康復誠)은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고, 옥과현감(玉果縣監) 홍요좌(洪堯佐)는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내려왔으며, 진원현감(珍原縣監) 심윤(沈惀)은 벼슬을 버리고 순찰사 진하에 있는데 왜적이 고을에 가득하여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평창현령(平昌縣令) 백유항(白惟恒)은 왜적이 경내에 들어올 때 최후에 피신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었는데 가까스로 도망해서 지금은 도내(道內)에 있습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 (발췌)

1597년 9월 1일

소서행장 등의 적이 구례로 해서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을 치고, 본부의 사람들에게 패(牌)를 주어 속여서 꼬여 소집하고, 군대를 나누어 본성과 광양성(光陽城)을 지키고, 사방으로 군대를 흩어 외촌에 주둔하며, 항복하여 붙은 사람과 같이 집결하여 한 마을을 만들고, 벼와 곡식을 수확하여 식량을 준비했다. 패를 받은 사람은 각각 쌀 3말씩을 납부했다.

우희다수가는 섬진강(蟾津江)으로 해서 한산도(閑山島)에 유둔했다.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9월 15일

○ 청정 등 적이 청주에 이르러 길을 나누어 내려갔다. 1대는 청산(靑山)ㆍ황간(黃澗)을 지나 성주를 거쳐 남도로 내려가고, 다른 1대는 함창(咸昌)ㆍ상주(尙州)로부터 인동(仁同)ㆍ대구(大丘)를 거쳐 내려가고, 또 1대는 문경(聞慶)ㆍ군위(君威)ㆍ비안(比安)으로 해서 내려가 모두 전에 있던 소굴로 들어갔다.

나배시마 등은 청주로부터 공주로 도로 나와 청정의 군대 수만 명과 같이 호서의 우도를 분탕질하고, 이어서 전라우도로 내려가면서 모두 분탕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여 민패(民牌)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

○ 도진의홍 등의 적은 순창(淳昌)ㆍ담양(潭陽)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고 지켰다. 창평(昌平)ㆍ광주(光州)ㆍ옥과(玉果)ㆍ동복(同福)ㆍ능주(綾州)ㆍ화순(和順) 같은 데는 적병이 많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며 민패를 발급하여 불러다 항복시키니, 달려가 붙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저자를 열어 교역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연도(沿道) 각읍의 왜적도 모두 이같이 하였다. 동복(同福)의 생원(生員) 김우추(金遇秋)가 본 현의 왜장(倭長)에게 편지를 올려 이르기를,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한 호(戶)로 편입되어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하고, 끝에다 서를 지어 붙이기를

칼을 짚고 동해를 건너오니 / 杖劍渡東海
장군은 왕의 보필감이요 / 將軍王佐才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다면 / 殺人如不嗜
천하가 모두 돌아올 것이요 / 四海盡歸來 하였다.

그 뒤 난리가 평정되자 사림들이 왜적에게 붙었다는 것으로 죄주었다. 이때에 “창전(昌全)ㆍ옥삼(玉三)ㆍ동이(同二)ㆍ곡일(谷一).”이란 말이 있었는데, 전(全)이란 것은 창평 한 고을 사람이 전부 들어갔다는 것을 말함이고, 3ㆍ2ㆍ1이라 함은 그 괴수가 옥과에는 셋, 동복에는 둘, 곡성에는 하나라는 말이다.

9월 17일 적장 평조신(平調信)이 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임실(任實)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그대로 본현에 유둔하고, 산에 들어간 사람을 유인해 내다가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도로에다 난동을 금지하는 군대를 두어 왕래하는 왜적으로 하여금 수색하고 노략하지 못하게 하니 궁한 백성이 우선 당장에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에 적병이 상도(上道)로부터 혹은 백여 명, 혹은 5ㆍ60명, 혹은 천여 명, 만여 명에 이르는 집단이 연속하여 내려왔다.

○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도(右道)로부터 곡성(谷城)으로 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남원 출신 하원서(河黿瑞)의 딸이 곡성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하원서는 민패를 차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 딸을 보고 요시라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요시라는 주관하는 왜장을 불러 물어 보니 하씨의 딸은 금법을 내리기 하루 전에 붙들려 왔다고 하여 원서는 찾아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9월 18일 적병 수천 명이 우도로 해서 남원에 이르렀고, 다음날 구례로 향하였다가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갔다.

9월 19일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근일에 내려오는 왜적은 다 남원을 거쳐 구례로 향하여 갔다. 운봉ㆍ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이들 왜적이 불의에 돌진해 왔기 때문에 살해당하고 약탈당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참고문헌 >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2008
o 김세곤, 임진왜란과 장성남문의병, 온새미로, 2014
o 최영희, 임진왜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o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2000
o 조경남, 난중잡록,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o 조원래,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2001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