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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작하면서
작성자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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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과 장성>

제1회 시작하면서

1597년 정유재란은 전라도에게는 재앙이었다. 왜적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7도가 무너졌어도 전라도만은 무사하였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군을 막고 전라도 의병이 육지에서 왜군을 막았다. 그리하여 호남은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보장이 되었다.

1596년 9월에 명나라와 일본 간에 4년 여 간에 걸친 강화교섭이 완전히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사분란하게 조선 재침략을 진행한다. 도요토미는 조선 침략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것과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을 주된 원인으로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도요토미는 치밀하게 작전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는 “가장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부터 먼저 공격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과 양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7년 2월에 도요토미는 군대를 1번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14만1천5백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재침략한다. 먼저 일본은 이순신 제거 작전을 벌이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백의종군 시킨다. 그리하여 7월 16일에 거제도 근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다.

곧바로 왜군은 전라도를 침공하여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8월 20일에는 전주에 무혈 입성하였다. 전주에서 왜군은 지휘관 회의를 한다. 이들은 도요토미의 지시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고니시가 이끄는 좌군은 전라도 일원과 충청도 서부를 휩쓸고, 가토가 지휘하는 우군은 충청도 내륙을 거쳐 경기도를 친 다음 서울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서 새로운 작전도 통과된다. 일본수군이 육군을 싣고 서해를 통해 서울로 올라가는 작전이었다.

우군에 속해 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의 휘하 2만5천명이 별동군으로 분리되어 좌군에 편입되었다. 별동군은 금구, 김제, 고부, 장성, 나주 등 서해안 고을들을 휩쓸고 9월 15일경에는 해남 어란진 근처에 주둔하였다.

아울러 고니시의 좌군은 8월 28일에 전주를 출발하여 임실, 구례를 지나 9월 1일에는 순천에 주둔하였다.

한편 왜군은 9월 7일 직산전투에서 패하자 다시 남하한다. 9월 16일에 왜군은 정읍에서 지휘관 회의를 한다. 이 회의에는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모리 등 14명의 장수가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왜군은 시마즈와 고니시 등 좌군이 전라도에 주둔하여 성을 쌓을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하여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1만 명의 왜군은 즉시 전라도로 내려간다. 시마즈 군은 9월 21일에 장성을 점령하고, 9월 24일에는 나주, 9월 25일 영암을 거쳐 9월 27일에 해남에 주둔하였다.

9월 중순에 장성은 큰 참화를 겪었다. 9월 16일에 윤진은 입압산성에서 18일에는 변윤중이 휴암바위에서 순절하였고, 9월 19일에는 기씨부인과 박씨부인이 황룡강에 몸을 던졌다.

왜군은 장성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고 코를 베어갔다. 산천을 불태우고 문화재들을 약탈하였다. 필암서원, 모암서원, 청백당, 기영정 등이 이 시기에 불탔다.

한편 9월 16일에 일본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패배하자, 도도 다카도라의 일본 수군과 나베시마 별동대는 해남 우수영을 초토화하고 무안․함평․영광 등지를 다니면서 방화․약탈․납치․살인을 하였다.

특히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행로를 찾기 위하여 무안, 영광 앞바다를 다니면서 정찰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9월 19일자 ‘난중일기’에는 ‘저녁에 영광 법성포에 이르렀더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의 집과 창고 곳곳에 불을 질렀다.”고 적혀있다.

9월 22일에 일본 수군은 무안에서 군자첨정 정기수를 사로잡았다. 23일에 일본 수군대장 도도 다카토라는 영광 출신 선비 강항을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붙잡았다. 강항은 순천 왜교성, 경상도 안골포를 거쳐 대마도에 잠시 머물다가 일본 에이메현 오즈성에 끌려갔다. 이후 강항은 교토에서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그에게 조선 성리학을 가르쳤다.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강항은 4년의 포로 생활 끝에 1600년에 귀국하여 문집 ‘간양록’을 남겼다.

9월 27일에는 선비 정희득이 영광 칠산 앞 바다에서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수군 부장인 모리 다다무라에게 붙잡혔다. 그는 일본 시코쿠의 도쿠시마현에 끌려갔다. 정희득은 1599년에 귀국하여 고향 함평에 돌아왔는데 일본 포로 체험일기 ‘월봉해상록’을 남겼다.

이렇게 전라도가 초토화되자 10월 8일에 선조는 자신을 허물하는 교서를 전라도 백성들에게 내렸다.

물론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례 칠의사의 석주관 전투, 죽천 박광전의 화순 동복 전투 등 일부 지역에서 의병들이 나섰지만 국지전에 그쳤고 역부족이었다. 이 시기에 고을 수령들은 아예 도망가고 일부 향리들은 왜군에 달라붙어 지역 선비와 양민을 괴롭혔다.

1598년 1월에 부제학 신식이 조정에 보고한 전라도 백성 실태를 보면 정말 참담하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본도는 병화(兵禍)가 더욱 혹심했던 탓으로 읍리(邑里)는 폐허가 되어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곡식은 들판에 가득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간이 살아남은 백성이 흙집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곡식을 가져다가 근근히 입에 풀칠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에게 잡혀 머리를 깎였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또한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상심되고 참담스러움을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선조실록 1598년 1월 21일)

정유재란 때 전라도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도요토미의 전쟁 목표는 임진왜란 때와는 달랐다. 명나라 정벌이 아니라 조선 점령이었다. 그것도 전라․경상․충청도 점령이 우선 목표였다.

도요토미는 장수들에게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하면서 닥치는 대로 조선 백성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이런 도요토미의 지시에 가장 피해를 입은 지역이 전라도, 경상도였다.

또한 왜군들은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닥치는 대로 코를 베었다.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통으로 보냈고 도요토미는 접수증명서를 발행하였다. 일본 문헌에 의하면 9월 21일에 진원현에서 870개의 코가 일본에 도착했고, 영광과 진원(현 장성읍, 진원, 남면, 황룡, 동화, 삼계, 삼서 지역으로 추정됨)에서 10,040개가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 9월에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금구와 김제에서 취한 코 3,369개를 도요토미에게 보냈는데 그 증명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도요토미는 교토 대불사 앞에 코무덤을 세우고 1597년 9월 28일에 법요식을 치렀다. 위령제의 총괄 지휘는 상국사 승려 사이쇼 쇼타이였다. 지금은 이총(耳塚 미미츠카)으로 불리고 있는 코무덤에는 10여만 개나 넘은 코가 묻혀 있다. 여기에는 전라도 백성들의 코가 상당수 묻혀 있다고 추측된다. 코무덤은 교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쿠오카현 카시이, 오카야마현의 비제시(備前市)와 쯔야마시(津山市), 가고시마성 부근에도 코무덤이 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만 코를 베면 사람은 대개 죽지만 코를 베이고도 산 사람도 있었다. 정유재란이 끝나자 전라도 사람 중에는 코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온 이야기이다.

이뿐이 아니었다. 왜군들은 조선 사람들을 잡아서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들 포로들은 일본에서 노예처럼 살거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왜군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끌고 갔다. 남원성에서 순절한 이복남 장군의 셋째 아들과 장성 기씨부인의 두 아들들이 그들이다.

물적 피해도 엄청 컸다. 방화와 약탈이 전라도 전역에 일어났다.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도 불탔고, 담양 소쇄원, 광주향교도 소실되었다.

아울러 임진왜란은 약탈 전쟁이었다. 도요토미는 미리 6개 특수부대(도서부, 공예부, 포로부, 금속부, 보물부, 가축부)를 편성하여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문화재와 책들은 물론이고 동식물도 가져갔다.

도자기와 도자기공도 데려갔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남원성 전투이후 데리고 간 도공 심당길은 지금은 가고시마 심수관가 사쓰마 도기의 전통을 잇고 있다.

일본 후쿠야마 안국사에는 종군 승려 안고구지 헤게이가 담양 용구산 반야암에서 가져간 불화가 소장되어 있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 1557년에 발간한「주자문록」도 가져갔는데 이 책은 지금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정유재란이 끝나자 후유증은 너무 심각하였다. 인구가 크게 줄고 농토가 황폐하여졌다. 1600년에 진원현은 자립이 불가능하게 되자 간판을 내리고 장성현과 합병하였다. 전국에서 유일한 일이었다.

사진
1. 남원 만인의총
2. 남원 충렬사
3. 남원성
4. 오늘이 오늘이소서 탑

주) 기타지마 만지의 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의하면 남원성 전투에도 참전한 바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1만 명의 왜군은 9월 16일 정읍회의 이후 곧 바로 전라도로 남하하여 21일까지 5일간 주둔하면서 장성을 침탈하고, 9월 24일에 나주, 9월 25일에 영암을 거쳐 9월 27일에 해남에 진주한다. 이들은 10월 10일까지 해남에 머물면서 전라우수영을 초토화하고, 11일에 해남을 떠나 강진에 갔다가 다시 해남에 와서 10월 13일 해남을 떠나 10월 14일 나주, 10월 20일 담양, 10월 21일 순창, 10월 23일 남원, 10월 25일 구례, 10월 26일 하동을 거쳐 10월 29일 경상도 사천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사천에서 왜성을 쌓고 그곳에 계속 진주하였다.

(부록)

선조 96권, 31년(1598 무술) 1월 21일(정미) 4번째 기사

부제학 신식이 전라도의 관군·의병의 실태 및 백성 안정책을 건의하다.

부제학(副提學) 신식(申湜)이 전라도에서 올라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윤음(綸音)을 받들고서 장사(將士)와 군민(軍民)들을 선유(宣諭)하고 방어에 대한 형지(形止)를 살펴보았습니다. 병사(兵使) 이광악(李光岳)과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이 함께 남원(南原)에 주둔해 있는데, 처음부터 주둔할 병영이 없이 10리 밖에 있는 촌막(村幕)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휴번(休番)을 제외하고 여러 곳에 나누어 매복시킨 군사가 2백여 명이며, 현재 거느리고 있는 군사는 겨우 3백 명이라고 합니다. 방어사가 거느린 군사는 휴번을 제외하고 각 처에 나누어 매복시킨 군사가 2백여 명이며, 현재 거느리고 있는 군사는 겨우 2백여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 대부분이 오합지졸(鳥合之卒)로 궁시(弓失)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위급할 때에 쓰기가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잔병(殘兵)으로는 요로(要路)에 매복하였다가 소수의 왜적을 토벌하는 데는 그래도 혹 가능하겠지만, 막강한 대 부대의 왜적은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매우 한심합니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경준(李慶濬)도 역시 남원에 있는데, 그가 거느린 병마(兵馬)는 적을 만나면 용감하게 잘 싸우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일이 없으니, 이들을 잘 쓴다면 힘을 얻을 수 있겠다고 합니다.

감사(監司) 황신(黃愼)은 수하에 거느린 군사가 전혀 없고, 별장(別將)이라고 부르는 구덕령(具德齡)·송덕일(宋德馹)이 혹자는 2백 명을 거느리고 혹자는 30~40명을 거느리고서 적이 있는 근처를 오가며 매복하고 있습니다. 각처의 의병(義兵)들은 혹자는 70여명을 거느리고 혹자는 20~30명을 거느리고서 각 고을에 흩어져 왕래하며 매복하고 있는데, 이름만 있을 뿐 실적이 없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본도는 병화(兵禍)가 더욱 혹심했던 탓으로 읍리(邑里)는 폐허가 되어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곡식은 들판에 가득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간이 살아남은 백성이 흙집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곡식을 가져다가 근근히 입에 풀칠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에게 잡혀 머리를 깎였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또한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상심되고 참담스러움을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을 안집시켜 무마하는 책임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조정에서 대부분 잘 골라서 보내지 않는가 하면 혹 부득이 바꾸어 임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온갖 방법으로 피하려드는 것은 물론 여러달 동안 부임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관사(官事)를 그르치고 있습니다. 감사 황신이 이 일을 매우 근심하여 간절히 말하였기 때문에 감히 아울러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참고문헌 >

o 무등역사연구회, 전라도 역사이야기, 선인, 2013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2008
o 김성한 , 7년 전쟁 5권, 산천재, 2012
o 장성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성사람들, 2013
o 노성환, 일본에 남은 임진왜란, 제이앤씨, 2011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