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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근대 민족운동과 장성의병을 돌이켜 보며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20회 한국근대 민족운동과 장성의병을 돌이켜 보며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1896년 2월 기우만의 장성 거의로부터 시작된 행주기씨의 의병운동은 이후 1907년 기삼연의 재기로 이어져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큰 불씨를 지폈다.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 기삼도의 매국오적 암살 시도와 1919년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행주기씨의 이러한 민족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노사 기정진의 척사사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장성 지방에서 행주 기씨 집안이 일으킨 민족운동은 무려 4대에 걸쳐 지속된 것으로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사상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중엽 노사 기정진이 기초를 닦아놓은 척사사상을 단순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로지 성리학을 높이 세우고 다른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배척하는 그야말로 세계정세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사상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서양세력과 일본에 의한 외압이 가중되어 가고 대내적으로는 봉건제도의 모순과 지배층에 의한 착취의 심화로 인하여 농민경제가 피폐해지고 있던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해 있던 내우외환의 위기적 상황과 역사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노사의 척사사상이 호남지역에서 강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터전이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1876년 조선정부가 일본의 군사적 압력에 굴복하여 개항 조약을 체결하자 이후 특히 호남지역은 일본에 의한 경제적 침탈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당시 호남은 호남평야와 나주평야를 품은 전국 최대의 미곡생산지였기 때문에 개항 이후 일본은 자국에 필요한 쌀과 기타 곡물을 호남으로부터 대량 유출해 갔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은 단지 무역 또는 밀무역을 통한 쌀의 유출에 만족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등 다른 어느 지역보다 극심한 토지침탈을 자행하였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점자 불법으로 매입한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면서 호남 곳곳에 대규모의 일본인 농장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세력의 호남지역 토지침탈과 경제침략은 호남 민중의 반일감정을 더욱 확대하여 의병투쟁의 잠재적 불씨를 키웠다.

노사의 유리론적 척사사상이 호남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의병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면, 개항 이후 호남지역 일대에서 행해진 일제의 경제 침략은 그러한 민족운동의 물질적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우만이나 기삼연처럼 노사의 문하에서 직접 배출된 의병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노사학파의 제2세 또는 제3세에 걸친 인맥까지 고려하면 노사학파가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만하다.

1896년 기우만의 장성의병은 그 활동 기간이 비교적 짧았지만, 1907년 가을 기삼연의 봉기는 그 영향이 호남 전역에 미칠 만큼 광범하고 심대하였다. 이후 기삼연의 영향을 받은 호남의병의 항일투쟁은 1909년 가을 일본군에 의한 이른바 ‘남한대토벌’이 실시될 때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제 기삼연 사후 호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1908년 1월 말 기삼연이 체포되어 곧 바로 일제에 의해 처형된 사실이 알려진 이후, 의병세력을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민들의 항일투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기삼연의 도통령으로서 지휘권을 인수받았던 김용구는 물론이고, 호남창의연맹소의 선봉장으로 기삼연의 분신과도 같은 역할은 했던 김준은 일제가 기삼연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고 광주, 함평, 영광 등지에서 맹렬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준의 의병투쟁에는 그의 동생인 김율도 함께 하였다. 두 형제는 기삼연 사후 의병부대를 <호남의소>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일본 군경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일항쟁을 벌였다. 기삼연을 계승한 김준·김율 형제의 적극적인 의병투쟁에 맞서 일본군 또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토벌’을 여러차례 감행하였다. 마침내 1908년 4월 19일 광주수비대를 중심으로 김준 의병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8개 종대를 편성하여 보름에 걸친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그 와중에 동생 김율은 광주 소지방(所旨坊, 현 송정읍)에서 붙잡혀 광주감옥에 갇히었고, 김준은 동생 율의 구출을 위해 어등산에 들어가 기회를 엿보던 중 4월 25일 일본군 수색대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김율 또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키려는 일병에 의해 어등산에 끌려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김준·김율 형제 사후에도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준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이 잔여 의병을 수습하여 강력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외에도 전해산, 심남일, 오성술 등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호남 전역에서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전해산은 1909년 가을 일본군이 실시한 ‘남한대토벌작전’ 에 앞서 미리 부대를 해산하고 몸을 숨겼으나, 그 해 말 체포되어 이듬해 7월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 박영근 등 호남의병의 맹장이었던 동지들과 함께 대구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특히 전해산과 심남일은 ‘죽고 삶을 미리 알기는 심남일이요, 신출귀몰(神出鬼沒)의 명장 전해산’이라는 말을 남길 만큼 기삼연과 김준 형제 사후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들이 기삼연으로부터 받은 영향과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에 있어서 기삼연의 위치에 대하여 전해산은 <<진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았다.

“비록 불민한 전수용(전해산)으로도 일찍이 당세의 대인 군자를 상종하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호해(湖海)에서 칼을 짚고 서서 모름지기 성옹(기삼연)의 훈시를 받았었고, 일찍이 성시(城市)를 방황하면서 녹노(고광순)의 절의를 들었다.” 이처럼 기삼연 사후에도 그의 영향으로 인하여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8년 및 1909년 상반기 호남지역은 전국에서 의병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다.

일본군의 정보 자료를 분석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1908년 전남과 전북에서 일어난 전투횟수는 전국 대비 25%, 전투의병수는 전국 대비 24.5%였다. 1909년 전반기 전남과 전북에서 일어난 전투횟수는 전국 대비 47.3%, 전투의병수는 60.1%였다. 특히 전남에서의 의병투쟁이 강력히 전개되어 1909년 전반기 전국 대비 전투횟수 31.5%, 전국 대비 전투의병수 45.6%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당시 의병역량이 호남, 특히 전남에 집중되어 있었던 셈이다.

1908년 이후 호남지역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오래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중 하나로 1907년 가을 이후 경기와 강원, 그리고 충북 등 중부지방과 경북 일대에서 전개된 일본군의 강력한 의병 진압으로 중부와 동부지역 의병세력이 약화되었고, 또 그 일부가 일본군의 ‘토벌공세’를 피해 호남지역으로 이동한 탓도 들 수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호남지역 내에 의병투쟁의 강력한 근거지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생을 비롯한 평민 출신(예컨대 보성의 안규홍 등)의 의병지도자들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호남 민중의 끈끈한 결속, 여기에 신식무기로 무장 훈련된 해산군인들이 결합하였던 것이다.

호남의병들은 종전과는 달리 일정한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 부대의 의병장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도 부장이 지휘권을 계승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근의 다른 부대와 합병하여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대규모의 전면전보다는 소부대 중심의 유격투쟁을 통해서 적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부터 약 2년간 전해산과 심남일의 의병부대를 비롯하여, 문태서, 이석용, 안규홍 등이 지휘하는 수많은 의병부대가 호남 곳곳에서 대일항전을 벌였다.

이제 일제는 호남지역 의병세력을 뿌리 뽑지 않고는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병항쟁의 궁극적인 진압이 어려울뿐더러 더 나아가서 조선의 완전한 식민지화에도 큰 지장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마침내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에 걸친 대규모 군사작전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말이 ‘남한’ 대토벌이지 실제로는 전라남북도의 의병세력을 섬멸하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이를 위해서 일본은 일본 육군 2개 연대로 구성된 여단병력의 한국임시파견대를 본토에서 급파하였다. 또 전라남북도 해안에 수뢰정을 동원하여 바다를 봉쇄하였다. 이렇게 의병을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 채 일정한 지역을 밀집 수색하는 이른바 ‘교반적(攪拌的)’ 방법으로 일본군은 호남 의병에 대한 잔혹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등지고 벌어진 호남지역에서의 대일 의병항전으로 애를 먹은 일본군이 행한 보복적인 군사작전으로 인하여 호남의 수많은 민중과 의병들이 사망하고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일본군의 ‘대토벌’ 상황을 기우만은 “적의 세력은 더욱 치성하여 주재(駐在)하는 병참이 별처럼 벌여 있고 바둑처럼 두어져서, 주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다.”라고 표현하였다. 황현 또한 ‘대토벌’의 만행에 대해서 “사방을 그물치듯 해놓고 순사를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그래서 행인의 발길이 끊기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 강자는 돌출하여 싸우다 죽었고, 약자는 기어 도망하다가 칼을 맞았다.”라고 그 참상을 고발하였다.

노사 기정진의 척사사상에서 정신적 기틀을 잡은 장성의병과 그 뒤를 이은 호남 각지에서의 의병항쟁은 일제가 저지른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전국적인 의병들의 항쟁도 사실상 이때부터 쇠퇴기에 들어섰다. 그러나 호남의병이 보여준 백전불굴의 항일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지도자 기삼연 선생의 순국은 호남지역 의병항전의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처럼 장성의병을 중심으로 한말에 전개된 호남지역 항일의병투쟁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항일독립운동으로 면면히 계승되었으니, 장성의병이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만큼 중요한가는 일일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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